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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를 찾아서

괘릉(원성왕릉)을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0. 9. 22.

괘릉(원성왕릉)을 찾아서

 

괘릉은

 신라의 왕릉

 중에서 가장 잘 갖추

어진 원형봉토분으로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왕릉이

 조성하기 전에 연못이 있어 유해를

 수면상에 걸어 안장하였을 것이라는

 속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원성왕릉 (괘릉)

 

 

 

 

괘릉(원성왕릉) 입구에들어서면 화표석 1쌍이

동서로 서 있고 안쪽으로 가면서 무인상 1쌍,

 문인상 1쌍, 돌사자 2쌍이 차례로 왕릉을

 지키고 있으며 왕릉 앞에는 혼유석이

놓여져 있습니다  

 

 

선비 모습의  문인상

 

문인석의 모습은 늠름한 모습이 다른 능묘의

 문인석에서 느껴지는 나약함과는 다르게

 강건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들어 학계에서는 문인이 아닌

무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무사 모습의 무인상

 

 무인석은 얼굴에 서역인의 특징이 나타나

 있어서 통일 신라가 서역과도 활발한

 문물교류를 하였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화표석(망주석)

 

화표석 또는 망주석 이라고도 합니다.

 

  안강 흥덕왕릉에도 있구요.  양쪽 방향에 있으며

화표석을 지나면 문인석과 무인석을 만나게 됩니다.

 

  용도는 능역의 입구를 표시하는

팔각형 돌기둥입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 표시이며

 또한 죽은 자의 부활 염원과

후손의 번창을 상징하기도

한답니다

 

 

 돌사자는?

 

 2마리씩  나누어서 마주보고 있는 돌사자는

 동남쪽과 서북쪽의 것이 정면을 키고

서남쪽과 동북쪽의 것은 각각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남쪽과 북쪽을

지키게 하는 배치 방법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원성왕은?

 

원성왕(김경신)은 혜공왕을 죽이고 왕이 된

선덕왕을 도운 공로로 상대등이 되었으며

 

37대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태종 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과의 왕권 다툼에서

승리 하여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괘릉(掛陵)이란?

 

괘릉(掛陵)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을 팔 때

 구덩이에 물이 괴어 널을 걸어(掛)서 묻었

었다는 전설에 따른것이라고 합니다. 

 

   왕릉 둘레의 바닥에는 배수를 고려하여

부채꼴 모양의 판석을 바깥으로

경사지게 깔아놓았습니다.  

 

 

왕릉 뒷쪽에는 물이 나오고 있어서 축대를 쌓고

 물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혼유석

 

괘릉은 원형봉토분으로 높이가 6m 지름은 23m로

 봉분 아래에는 봉토를 보호하기 위한

호석이 설치되어 있으며

 

호석은 목조건축의 석조기단과 같이 지대석 위에

판석으로 된 면석을 놓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렸습니다

 

 

탱석에 새겨진  12지신상(뱀)

 

 각 면석 사이에는 면석과 봉토가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탱석을 배치하였는데

탱석은 면석보다 약간 앞으로 내밀어

쇄기돌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탱석에는 두칸 건너 하나씩 무복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십이지신상을 조각

하였으며 신라 십이지신상 가운데서

가장 우수하다고 합니다 

 

 

 문무왕릉이라고 했던 단비(短碑)를 세웠던 자리

 

 괘릉은 수중에 장사하여 돌 위에 널을 걸어 흙을

 덮은 까닭에 걸괘(掛)자 괘릉이라 하였으므로

 수장한 임금이라면 문무왕릉이라고 하여

 

이 자리에 문무왕릉이라고 표지석을 세웠으나

1967년 대왕암이 문무왕을 장사지낸곳이라는

학설에 따라 표지석을 빼어 버리고

받침석만 남아 있습니다

 

 

1973년경 원성왕릉으로 수정되었습니다

 

 

 선비모습의 문인상

 

카이저 수염을 한 문인상은 문인이 아닌 무인

이라고 하며 머리에 쓴 관의 앞면에 장식

 되어 있는 곤충도 매미가 아니라 벌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1996년 이재중씨의 연구에 의하면 관 중앙의 곤충이

 매미가 아니라 벌이므로 벌에는 독침이 있어서

 위험을 막을 수 있으므로 무사의 상징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문인상의 수염과 관의 장식

 

 무인이 착용하는 대수장포라는 큰 소매가 있는  긴

도포를 입고 있음며 갑옷도 걸치고 문인들이

 휴대하는 홀(笏)이 없고 무인들이 드는

 장검(長劍)을 잡고 있기때문에

무인상이라고 합니다 

 

 

 무인상의 모습

 

 머리에는 중앙아시아식 터번을 착용하고

 오른 팔을 위로 하여 주먹을 웅켜잡고

 있으며 왼손에는 몽둥이를 잡고 있는

 서역인의 모습으로 갑옷을 입지 않고

 장식도 없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서역인의 얼굴 모습

 

팔자형 수염과 양귀밑에서 턱 전체를 덮고 있는

 턱수염과 털은 이란계통의 곱슬머리가 아니라

 용강동 석실고분에서 출토된 문관상처럼

위구르 인이라고 합니다  

 

 

  서역인상의 뒷모습에서 본 주머니

 

 서역인상의 뒷모습 중에서 뒤 허리춤에 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우리 고유의 복주머니

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산낭(算囊)이라는 것으로

 호인들이 계산하는 기계 즉 주판 같은 것을

 넣어두는 주머니라고 합니다

 

 

신라왕의 능묘에 왜 외국인상을?

 

 

신라와 당과의 관계가 대등한 위치에 있지 못했던

 입장에서 당나라 제도의 축소 또는 자숙의

형태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돌 사자상 

 

석사자의 목에는 잠자는 숫사자의 순한 모습의

목털 같지만  정교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성왕릉에 조성된 석조물들의 조각 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시대의

조각품 가운데는 가장 우수하다고 하며

 

조각수법은 신라인의 고도로 발달한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합니다

 

 

 

 

행여 누군가가 왕릉을 해칠세라 왕릉을 지켜보고

 있는 석사자상의 발톱의 강인한 표현이

사실적으로 잘 조각되어 있습니다

 

 

   

  

 서쪽을 지키고 있는 석사자상입니다만 꼬리가

 정교하면서도 암사자와 숫사자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을 감싸고 있는 목털도 한 번 비교해 보세요

세심한 부분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예술작품입니다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한 까닭?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경신 보다 서열이 높았던

 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김경신이

 복두를 벗고 갓을 쓰고 12현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자

 

 

여삼의 해몽을  듣고 알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비가 많이 와서 알천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였으므로 신하들이 김 경신을 왕으로

추대하였다고 합니다

 

 

 

승리자들의 꿈 해몽 법

 

승리자들의 꿈 해몽 방법은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거할 사람이 없음이요,

소립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12현금은 12손이 대를 이을 징조요,

천관정에 들어간 것은 대궐로 들어갈 좋은 꿈

이라고 해몽한 것으로 

 

김유신계와 가야계의 지원이 있었다는

 간접적인 표현이라고도 합니다  

 

 

 

예! 오늘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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