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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를 찾아서

오천 정씨 묘소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09. 12. 4.

영천에 있는 오천  정씨 묘소를 찾아서

 

강의공 정세아(剛義公 鄭世雅)의 신도비가 있다는 강호정(江湖亭)을 찾아갔다가

   오천 정씨(烏川鄭氏) 문중의 묘소와  강의공 정세아의 신도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세워졌다는 하천재를 마주보고 있는

오천 정씨 문중의 묘소를 둘러 보았습니다

 

 

 영일 정씨의 시조는 고려 예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의종조에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이라고 합니다

 

 

정습명은 인종이 중히 여겨 의종에게 그를 의지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의종은 바른 말을 거리낌 없이 잘 하는 그를 경계하였으며 --- 

 

 

그로 인해 습명이 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후회하였다고 합니다

 

 

 정습명 이후 벼슬이 끊이지 않았으며 포은 선생의 고조

정임은 봉익대부판도판서이며 --- 

 

 

증조는 검교군기감 정인수 이며 조부 정유는

직장동정이었다고 합니다 

 

 

정몽주 선생은 성균복응재생 정운관과 선관서승 이약의 딸 영천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우리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전환기 즉 ---

 

 

불교를 중심으로 해 오던 시속을 유학으로 바꾸어 새로운 이상국가 

건설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 

 

 

수성파와 창업파로 나뉘어 극심한 대립을 이루던 시기에

큰 족적을 남기며 순절 하였다고 합니다 

 

 

정몽주 선생의 어린 시절 학업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으나

당시의 사대부 출신이 다 그러했듯이 정습명 선생 역시

자신의 노력으로 학문을 쌓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정몽주 선생은 세상에 이름을 들어내기 전에 효행부터

실천함으로써 큰 그릇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충노 억수지 묘 라고 충노의 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가면 최진립 장군과 충노에 관한 노비와 장군의

 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는데 --- 

 

 어찌 우리 종들이 충노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과  반상의 계급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종의 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 

 

장군의 제사 뒤에 상을 물려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하는 것과 

또  종 노비와 장군의 비각이 함께 조성되어 있습니다만 --- 

 

 

이 곳 오천 정씨 문묘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백암 정의범 선생은 1560년 의병대장 정세아 선생의 장남으로 1592년 왜적의

침입으로 고을이 함락되자 아버지 정세아 장군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여 ---

 

 영천성을 되 찾고 경주성을 탈환하던 중 아버지 정세아 장군과 떨어지게 되자

 아버지를 찾아 적진을 수 없이 드나들면서 아버지를 찾았으나 --- 

 

 찾을 길이 없자 마지막으로 적진 속을 쳐 들어 가면서 종인 억수 에게 아버지는

이미 전사하신 것이 분명하니 내가 어디로 돌아가겠느냐 ?

 

 너는 나와 관계 없으니 이제는 너 갈길을 떠나거라 고 하니 억수는 말고삐를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인님이 아버지를 위해 죽기를 결심하셨는데 ---

 

 소인이 어찌 혼자 살길을 찾아 갈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주인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틈을 타서 살아나온 정세아 장군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경주성

싸움터로 갔으나 시신을 찾을 수가 없어 싸움터에서 초혼을 해 와서 --- 

 

 

 만시가 적힌 종이를 시신 대신 관 속에 넣고 선영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 묘를 시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의 묘소 아래 억수의 작은 무덤을 만들고 충노 억수의 묘라는 작은

비석을 세워 놓아  오가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정조대왕 8년인 1784년

임고면 선원 마을에 왕명으로 ----

 

   

 충효각을 세우게 되어 오늘날까지 선생의 충효정신을

길이길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명당은 정윤량이라는 효자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는데

아버지 살아 생전에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하였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

 

 묘터를 잡아 장례를 치르는데 백발 노승이 지나가면서

정효자댁의 묘소를 어찌 이 곳에 와 쓰는지 이상한 일이로다  

고 하면서 중얼거리면서 지나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상주는 그노승을 뒤 쫓아가서 고개를 넘으니 노승이 기다리고

있다가  상주가 올 줄 알았다  라고 하면서 앞장서서 ---

 

 

 여기 이 기룡산 기슭에 와서는 지팡이로 혈을 짚어 주었습니다

이 혈은 기룡의 좌장혈이요 부귀를 겸하여 기운이 융성할 것이며 ---

 

 

위인이 날 징조니라  청룡과 백호가 세겹으로 둘러졌으니 귀인이

날 터이며   물 흐름이 보이지 않으니 부자도 날 것이요

 

 

 이와 같이 크고 귀한 판국에는 손세도 좋아 이 세상에

바로 정효자요 라고 하였답니다  

 

 

노승은 신령의 명을 받고 온 설학이요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니

오늘은 길이 바빠서 곧 가야 하오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 라고 하면서 노승은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효자 정윤량이 이렇게 해서 얻게 된 명당이라고 합니다   

 

 

이 정효자가 바로 포은선생을 제향하는 임고서원을 창건하여 향풍을

크게 진작시킨 학자 정윤량이라고 합니다 

영일정씨와 오천정씨는 같다고 합니다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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