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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을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0. 9. 26.

 안강읍 두류리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을 찾아서

 

이 부도탑은

안강읍 두류리에 있는

원광법사의 부도로 알려져

있으며 높이가 2m 정도로 부서진채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이라고

니다 1층의 몸돌 4면에 4각형의 문틀을

새기고  불상을 안치 하는 감실을  들고

그안에 앉아있는 불상을 돋을새김하였으며

지붕 돌은 밑면의 층급 받침이 4단 입니다. 

원광법사는 신라진평왕 52년에 황룡사에서

돌아가시자 명활산에 장사 지내고 삼기산

금곡사에 부도를 세웠다고 하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해 오고 있는 부도탑

입니다 . 원광법사 부도탑 

 

 

 

 

금곡사지 원강법사부도탑은

경북문화재자료 제97호로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시대의 유적으로 신라 진평왕 때의

고승 원광의 부도탑입니다.

 

 


 

 630년(진평왕52)에 황룡사( 皇龍寺)에서 입적한

원광법사를 명활산( 明活山)에 장사 지내고

 금곡사에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금곡사는 원광이 30세 되던 해, 평소 수도 생활을

 하던 경주 안강의 삼기산( 三岐山) 아래에

 창건한 절인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습니다.  

 

 

 

 

현재의 탑은 당시에 도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부도탑은 하층 기단에 있는 사각형의

 문비( 門扉)안을 아치형으로 파고

 

 

 

 

그 안에 좌불상을 양각한 탑신을 놓고

 그 위로 옥개석( 屋蓋石:지붕돌)

2개만 놓았습니다.  

 

 

 

 

상층 옥개석 윗면에는 노반( 露盤)이

남아 있습니다.

 

 

 

 

원광은 속성(俗姓)이 박씨이며 13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합니다.   

 

 

 

  

화랑도의 생활신조가 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제정했으며 불교사상뿐 아니라

문장에도 능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대승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신라에서

 강의한 최초의 학승이었고, 불교의 토착화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합니다.  

 

 

 

  

이 금곡사가 있는 산은 금곡산

(金谷山)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삼기산(三岐山)'이라 하였고

 

 '삼국유사'의 <원광서학(圓光西學)을 보면

민간에서는 '비장산(臂長山)'으로도

불렀다고 합니다. 

 

 

 

 

비장산으로 불린 내력이나 금곡사 모두

원광법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금곡사는 원광법사가 창건하고

머물었으며 또 원광법사의 부도탑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삼국유사'에서

 

 원광법사는 '의해(義解)' 편의

 첫머리에 나옵니다.  

 

 

 

 

'의해'란 불법의 의리(義理)를 깨달아서

안다는 뜻인데, 이는 원광법사가 바로  

 

 

 

 

신라에서 최초로 불법의 요체를 터득한

승려였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원광법사는 당나라 때 편찬된

 '속고승전(續高僧傳)'에 그 전기가

실릴 정도로 탁월한 승려

였다고 합니다.   

 

 

 

 

 일연 스님은 이 전기를 <원광서학>에

 옮겨 실었다고 합니다.  

 

 

 

 

원광은 처음에 문장을 익히고 노장 사상과

유학을 두루 배웠으며 제자백가의 서적과

역사서도 탐구하였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삼한(三韓)에서는 명성을 떨쳤으나

중국에 견주면 아무래도 손색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외(海外)로 갈 뜻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윽고 원광은 스물다섯 살 때 배를 타고

금릉(金陵)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금릉은 지금의 남경(南京)입니다.  

 

 

 

 

원광이 남경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보아 경주에서

 출발해 우리의 남해를 지나서 먼저 상해(上海)에

도착했던 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상해는 아시아에서 가장 길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장강(長江)의 맨 아래에 있는 도시로

 중국 동해의 입구라고 합니다.  

 

 

 

 

그래서 상해라 불리었다고 합니다. 

 

 

 

 

원광은 장강의 하구에 이르렀기 때문에

 금릉으로 곧바로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상해에서 금릉까지는 약 300km 거리이지만

 장강을따라 배를 타면 그렇게

 멀지 않다고 합니다.  

 

 

 

 

원광은 곳곳에서 의문을 가졌던 문제들을

물으며 그 뜻을 풀어갔습니다. 

 

 

 

 

이윽고 장엄사(莊嚴寺)라는 절에서

강설을 들었다고 합니다.  

 

 

 

 

세간의 전적(典籍)들을 읽으면서 거기에 이치가

 다 있다고 여겼던 원광은 불교의 종지에 대해

 듣고서는 눈이 활짝 열렸다고 합니다.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듯하였다고 합니다.

 

세간의 전적들은 오히려 썩은 지푸라기

처럼 여겨졌다고 합니다.  

 

 

 

 

원광은 진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불법에

귀의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빌었습니다.

  

 

 

 

진나라 임금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원광은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원광은 이제 승려가 되어 불교의 미묘한

이치의 세계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갖가지 경전들과 논서들을 두루 탐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소주(蘇州)의 호구산(虎丘山)에 가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며 선정에 드는

공부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성취가 알려지자 승려의 무리들이 그에게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원광이 유학을 갔던 그 때는 남북조 시대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수(隋)나라가 통일을 이루자 원광은

 서울인 장안에 가서 유학하면서 불법을 폈습니다 

 

 

 

 

원광은 중이 되고 난 뒤에 나이 서른에 삼기산에서 홀로 머물며

도를 닦았습니다. 그가 머물었던 곳이 지금의 금곡사입니다.

금곡사는 특별히 빼어난 풍광이 없는데다 구불구불 산길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외딴 곳에 위치해 있어서 한마디로

조용히 수행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입니다. 

 

 

 

 

 

 

 

                                금곡사와 원효대사


● 유학을 가서 승려가 된 원광

 

'속고승전'에서는 원광이 스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신라가 아니라 중국에서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원광서학>에는 다른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본래 '수이전(殊異傳)'이라는 기이한 이야기를 모아 둔 책에 있던 것을 일연 스님이 옮겨 실은 것입니다.


● 토착신이 원광에게 유학을 권하다

 

이 절에서 수행하던 원광에게 신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이 신은 삼기산을 관장하던 토착신입니다.

그런데 이 신이 원광에게 "어째서 홀로 이곳에 머물며 자신만을 이롭게 하며 중국에서 불법을 배워 와서 이 나라의 중생을 널리 구제하려 하지 않느냐?"고 다그쳤습니다.

 

이에 원광은 자신도 중국에 가고 싶었으나 바다와 육지가 가로막고 있어서 가지 못한다고 변명하였습니다. 당시는 삼국이 치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던 때라 한강 유역을 지나 서해를 거쳐 중국에 가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윽고 신이 중국에 가는 길을 가르쳐주었다고 합니다. 신이 가르쳐준 길이 어떤 길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짐작하건대, 삼기산에서 내려와 앞서 말했던 하곡지의 물길을 따라서 형산강으로 갔다가 그 끝에 있는 포항의 바다에서 배를 타고 남해로 중국에 가는 길이었으리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배는 신라나 중국의 상선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신이 일러준 대로 바다를 건너간 원광은 11년 동안 중국에 머물면서 삼장을 통달하였습니다.

그리고 600년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먼저 삼기산의 절을 찾아갔습니다.

밤에 신이 나타났고 신은 원광에게서 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로써 토착신과 불교는 오롯하게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불교는 보편적인 종교였으니 당연히 토착신앙을 포용할 것이지만 토착신앙 쪽에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바로 민중의 절실한 바람과 열린 마음에 따른 것이리라 추측됩니다 

 

이는 법흥왕 때 토착신들을 모시던 귀족 지배층이 불교의 공인을 반대하자 이차돈이 목숨을 내던져야 했던 일과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원광은 자신에게 길을 알려준 신의 참모습이 보고 싶었습니다.

이에 신은 "내일 아침에 동쪽 하늘 끝을 바라보시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튿날 원광이 동쪽 하늘을 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닿았습니다. 그리하여 삼기산을 "팔을 길게 뻗은 산"이라는 뜻의 '비장산'으로도 불렀던 것이라고 합니다.


● 세속을 도외시하지 않은 원광법사


<원광서학>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열전'에도 나오는 내용인데 그 유명한 '세속오계(世俗五戒)'와 관련된 것입니다.


수나라에서 돌아온 원광은 가슬갑(嘉瑟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 가슬갑은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동쪽으로 9천 보가량 되는 곳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자세하게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운문사가 있는 산이 지금은 운문산으로 불리지만 본래는 '호거산(虎踞山)'으로 불리었습니다.

 "범이 웅크린 듯한 산"을 뜻하는데 호거산은 원광이 유학을 갔던 중국 소주의 '호구산'과 이름도 비슷하고 뜻도 상통한다고 합니다.

민중들의 이야기 속에서 둘이 하나가 되었으리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가슬갑으로 원광을 찾아온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바로 귀산과 추항이라는 선비였습니다. 그들은 군자와 사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는 유교의 본령에 해당하는데 왜 굳이 승려인 원광을 찾았을까?

'논어'나 '예기'를 읽으면 충분히 체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문제는 당시 신라에 전해진 유교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원광이 중국에 유학을 가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원광은 세간과 출세간의 도리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가르침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임전무퇴(臨戰無退)'와 '살생유택(殺生有擇)'을 가르쳤는가?

이는 신라가 당시에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전쟁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 놓여 있었고 귀산과 추항 역시 언제든지 종군해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물러나지 않는 대범함과 결단력, 용맹함을 지녀야 하고 전쟁을 한다면 살생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불필요한 희생은 될 수 있는 한 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원광이 비록 출가하여 불살생의 계를 받은 승려였으나 그가 살았던 시대를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 상대가 출가한 승려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에게 승려로서 지켜야 할 덕목을 강요할 수도 없었습니다.

부처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알맞은 설법을 폈던 것처럼, 원광 또한 속세의 선비에게 그 처지에 알맞은 덕목을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이야말로 원광이 펼 수 있는 최상의 방편설법이었습니다.


● 유학의 길을 열다


'속고승전'에 따르면 스물다섯에, '수이전'에 따르면 서른 중반에 원광은 유학을 떠났다고 합니다.

나이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자각이 있고 난 뒤에 유학을 하였다는 데서는 공통된 점입니다. 이치를 탐구하겠다는 열정에는 거친 바다도 낯선 풍토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 두루 다니며 배우고 익힌 원광은 중국 땅에서 교화를 폈습니다.

그의 전기가 '속고승전'에 실렸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승려였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광은 중국을 떠나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신라야말로 그의 교화가 절실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토착신과의 약속이기도 했습니다.


원광 이전에도 바다를 건너가서 도를 깨치려고 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원광의 유학에 밑거름이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이제는 원광이 다음 세대에 진정한 유학의 길을 열어주었으니 그것은 참된 깨달음을 위한 구법(求法)의 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원광보다 더 멀고 험난한 길을 나선 승려들도 나타났습니다.

바로 천축으로 떠난 구법승들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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