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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용왕전이 있는 왕룡사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0. 9. 26.

 

용왕전이 있는 왕룡사를 찾아서

 

왕룡사(王龍寺)는 1910년경에 중건된 형산의

정상에 있는 사찰인데. 김부대왕을 모신 용왕전이

있는 곳입니다. 이 왕룡사의 용왕전에는 문인상과 무인상의

 목불상 2기가 중앙단에 주불처럼 모셔져 있습니다. 왕룡사의

 용왕전은 15년전에 중건을 했다고 하며 대웅전은 최근에 새로

 지어 아직 단층을 하지 않은 상태로 있으며 절 앞에는 절벽

 위에 축대를 쌓아 올리는 대 역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김부대왕 사당은 국당리 형산 연화봉 동쪽 돌병풍 

앞에 김부대왕을 모시던 사당이 있었는데

지금의 왕룡사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국도 7호선을 따라 경주에서 포항으로 가다가 강동대교를 지나

 강동면사무소가 있는 유금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형산과 제산 사이로 형산강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법당의 현판에는 '왕장군 용왕전'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걸려 있고

주로 무속인들의 출입이 잦은 곳이며 사찰의 정식 명칭도

 '왕룡사'가 아니고 '왕룡사원'이라고 합니다

 

 

 오른쪽(남쪽) 형산을 의지하여 자리한 마을이 국당이라는

마을인데 국당(菊堂)은 형산강의 전설이 얽힌

 ‘형산’과 ‘형산목’이 있는 마을입니다.

 

 
 . 형제산을 잘라 물길을 내고 옥토로 만들어준 고마운 김부대왕을

 모시던 신당이 있었던 곳이었는데 조선시대에 이 마을에

국화가 잘 된다고 하여 국당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형산의 높이 256m의 부조 동쪽 산. 신라 때에는

북형산이라 하여 중사로 제사를 지냈는데,

문무왕 때 쌓은 석성이 있습니다.


 

이 산은 모양이 마치 연꽃처럼 생겼다고 하여  ‘연화봉’

이라고도 하며 형산성은 국당리 형산 정상에 있는

돌로 쌓은 성으로 길이가 약 720m 정도입니다.

 

 

신라문무왕 13년(673) 9월에 말갈, 거란과 동해를 통해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축조하였다고 합니다.

 

 

 건물자리와 성문자리가 남아 있고, 봉수대와 연못이 남아

 있습니다. ‘북형산성’이라고도 하며 봉수대가 있는

정상부에 성곽일부가 남아있습니다.  

 

 

형산봉수는 형산 정상에 있는 봉수대로 ‘봉우재’, ‘봉오재’

 ‘봉화재’라고도 부르며 동쪽으로는 영일현 사화랑산봉수,

 

 

서쪽으로는 영천 소산봉수에 연기를 피워

신호로 알리던 곳이라고 합니다.

 

 

왕룡사(王龍寺)는 1910년경에 중건된 형산 정상부에 있는

절로 김부대왕을 모신 용왕전이 있습니다.

 

 

이 용왕전에는 문인상과 무인상의 목상 2기가

중앙단에 주불처럼 모셔져 있습니다.

 

 

용왕전은 15년 전에 중건했으며, 대웅전은 재작년에

크게 새로 지어 아직 단층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보물 제1615호 로 지정된

'경주 왕룡사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제작연대를 비롯한

조성 주체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조선 초기 불상 중 하나로서

 높이가? 77센티미터라고 합니다.

 

 

복장(腹藏) 유물 중 '환성사미타삼존조성결원문'을 통해

불상이 1466~1474년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불상은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및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과

 유사하고 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조성기와 중수기에 의하면,

 8년(1466~1474년)이나 걸려 조성되었으며

 

 

불상 조성과 관련한 소요비용, 제작자, 발원자 등을 알 수 있어

그 가치가 국보급 이상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문화재청에서는

 

 

 2009년 4월 23일자로 보물로 지정하였는데 이 불상에서

나온 복장유물은 ?22종 99점에 달한다고 합니다 

 

 

법당의 현판에는 '왕장군 용왕전'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걸려 있고

주로 무속인들의 출입이 잦은 곳이며 사찰의 정식 명칭도

 '왕룡사'가 아니고 '왕룡사원'이라고 합니다

 

 

 김부대왕(경순왕)과 태자 김충의 목상

 

 

왕룡사(王龍寺)에 있는 목조 문·무인상으로 약 200년 전에 회나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이 두 목상은

 동쪽에 문인상, 서쪽에 무인상이 서있습니다.

 

 

이 목상은 둘 다 오른손은 옷속에 감추고 왼손만 밖으로

드러나게 조각이 되어 있으며 얼굴이 목상 길이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신장은 매우 짧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문인상은 왼손으로 턱수염을 잡고 큰 관모를

쓰고 있으며, 푸른 옷에 얼굴은 살갗색으로 칠해져 있고.

 

 

무인상은 투구를 쓰고 왼손에 무엇을 바쳐든 것 같은 형태이며

역시 푸른 옷에 얼굴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문인상은 경순왕의 이름이 김부이기 때문에 김부대왕은

경순왕으로 보여지며 무인상은 경순왕의 태자 김충

이라고 하고 또는 마의태자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이 두 목상은? 도지정 민속자료 제7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형산(兄山)과 제산(弟山)의 전설

 

 

형산강은 이 두 산 사이를 지나 포항으로 흘러 갑니다.

옛날, 형제산이 형산과 제산으로 갈라지기 전에는 남천,

북천,기계천의 물이 안강일대에 모여 호수를 형성하였고,

 범람하면 경주까지 그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강의 치수문제는 신라의 숙원사업 이었습니다.

경순왕 김부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후삼국이 일어나

서로 각축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나라 안에서는 사방에서 도적떼가 일어나 치안이

극도로 문란해지는 등 신라는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형제산을 둘로 잘라 강호수의 물을 어용사

즉 영일만으로 흘러 보내면 임정현 땅의 지정왕기가 제압되어

역적이 출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경순왕은 태자 김충과 의논하여 일간의 기도를 올리기로

 하였는데 경순왕은 하늘에 올라가 목침으로 삼층집을 짓고

옥황상제와 천지신명과 신라왕실의 조종들에게

종묘사직의 안녕을 기원하였습니다.

 

  

땅에서는 태자 김충이 형제산맥 단절을 천지신명께 기도

하였습니다, 태자는 기도 끝에 큰 뱀이 되었습니다.

 

 

이 뱀은? 사람들이 그를 용으로 불러 줘야만 용이 될 수가

있으므로 길가에 누워 지나가는 사람들이 용으로

불러주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용이라 불러주는 사람은 없고, 큰 뱀을

보고는 두려워서 달아나기만 하였다고 합니다.   

 

  

왕과 약속한 백일이 불과 하루밖에 남지 않은 날. 태자는

크게 낙심을 하고 있는데 마침 안강에 사는 한 노인이

 유금이라는 이름을 가진 손자를 업고 지나다가

 

 

큰 뱀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저런 큰 뱀도 이 세상에 있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업혀 있던 손자가 "할머니!

저것은 뱀이 아니고 용이에요"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뱀에서 용으로 변한 태자는 꼬리로 형제산을 내리치니

 형제산은 형산과 제산으로 갈라지고 그 틈으로 안강호수의

물과 경주에서 내려오는 물이 강을 이루어 영일만으로

흘러들어가니 지금의 형산강이 되었다고 합니다


 

뱀을 용으로 불러 준 아이에게 안강 호수에 물이 빠진 후

 생긴 땅과 그 일대의 논밭을 주고  들의 이름은 아이의

이름을 따라 유금들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현재 강동면의 유금이라는 지명은

여기서 비롯 되었다고 합니다.

 

 형산 산정의 왕룡사라는 절에는 김부대왕과

김충태자의 목상을 세워 재향을 하고

그유덕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왕용사에서 북동쪽으로 바라다 본

포항 시가지의 모습입니다

 

 

왕용사가 있는 북형산성의 봉수대에서 남쪽을

향하여 바라다 본 경주의 모습입니다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고 고려의

도읍지 송도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그 곳에서 

 

 

 서거하자 신라의 유민들은 그를 추모하여 북형산성터에

(형산의 정상에 있음-왜적을 막기위하여 쌓은 신라성)

형산성황사라는 사당을 건립하고

 

 

 경순왕과 그의 아들 김충 태자를

함께 모셨다고 합니다

 

   

원래는 경순왕의 유덕을 추모하는 사당으로

춘추향제를 올려 그 넋을 위로하였는데, 

 

 

 고려 말부터 기복신앙처로 전락하여 지금도

무속인이 많이 찾는 곳입니다.

 

 

'국당'이라는 이 마을 이름도 '굿당'이라는 말에서

변한 것으로 무속인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래 사당은 토막식 건물로 조선말엽까지 있었으나 

조선말 어지러운 상황을 틈타 연일의 어느 문중에서

 

 

이 사당을 철거하고 분묘를 설치하자 성터 밑에

위치한 왕룡사에서 경내로 옮겨 지금까지

모셔오고 있다고 합니다

 

 

형산성(兄山城)은 국당리 형산 정상에 있는 돌로

쌓은 성으로 길이가 약 720m 정도입니다.

 

 

신라문무왕 13년(673) 9월에 말갈, 거란과 동해를 통해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축조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건물자리와 성문자리가 남아 있고,

봉수대와 연못이 남아 있습니다.

 

  

북형산성(北兄山城)’이라고도 하는데 봉수대가 있는

정상부에 성곽일부가 남아있습니다

 

  

유금리는 동쪽으로부터 경주로 들어오고 나가는

첫 나들목으로 유금리는 1955년까지는

경주군 강동면에 속해 있다가

 

 

같은 해에 월성군으로 소속 행정기관의

이름이 바뀌었으며  

 

  

1989년도에 다시 경주군으로 바뀌었다가

95년 1월1일에 경주시와 경주군이

통합되었습니다


  

경순왕의 전설은 당시 신라시대의 상층부에서는 ‘나라를

빼앗긴 비운의 임금’으로 인식되던 경순왕이 민중에서

 ‘김부대왕’으로 찬란하게 되살아난 전설입니다.

 

  

 민중들에게는, 적어도 유금마을의 사람들에게서 경순왕은 유금이와

함께 ‘소중한 땅을 가져다 준 고마운 사람’으로 각인되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준 창조주로 되살아난 것입니다.

 

 

김부대왕에 대한 신앙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강동면

국당리의 형산 정상부에 있는 왕룡사에는 절에서 보기 어려운

 용왕전이 있고, 김부대왕과 그 신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용’은 농경사회에서 ‘물(水)’을 관장하는 신인데 벼농사에서

물은 절대적인 요소이므로 용은 ‘농신(農神)’으로

자리 잡아 오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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