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숭산 수덕사를 찾아서
수덕사는 차령산맥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덕숭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옛부터 수덕사의 여승이란 노래로 유명한 선지종찰 입니다 백제 15대 침류왕
2년 (358년) 에 수덕각시라는 관음화신이 중생 제도를 위해 창건 했다는 설
화를 지니고 있는 고찰입니다 대웅전은 국보제49호로 그 형태가 장중하고
구조가 정면3칸, 측면4칸으로 된 맞배집이라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의 혜현스님이 이곳에서 삼론을 공부한 곳이라고 합니다 산위에는
남자 스님인 비구가 거처하는 정혜사가 있고 서쪽에는 여자스님인
비구니가 생활하는 총림이 있습니다 이곳 수덕사에는 관음바위를
비롯하여 미륵 석불, 만공 탑, 전원사 등이 있으며 특히
담징이 그린 대웅전 벽화가 유명한 선지종찰입니다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개 사찰이
전하지만 수덕사만이 유일하게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문헌에 수덕사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와
'속고승전(續高僧傳)'으로 백제의 고승 혜현(惠現)이
수덕사에서 주석하며 법화경(法華經)을 지송하고 삼론(三論)을
강(講)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수덕사의 사격(寺格)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덕사 대웅전 [국보 제 49호 ]은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건축물로 고려 충렬왕
34년 (1308)에 건립되었습니다.
고려충렬왕34년(1308)에 세워진 수덕사 대웅전은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라고 합니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 4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의 중간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 양식의 건물입니다. .
간단한 공포구조와 측면에 보이는 부재들의 아름다운 곡선은
대웅전의 건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특히 소꼬리모양의 우미량(牛尾양)은
그 중 백미로 꼽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내부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고
과거에는 바닥에 전돌이 깔렸으나
현재는 우물마루가 깔려있습니다
외부에 그대로 노출된 가구에 새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수덕사 대웅전은
건물의 기능미와 조형미가 잘 조화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특히 측면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가 만들어내는
구도는 수덕사 대웅전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조형미와 역사적 가치로 인해 국보로 지정된 대웅전은
현존하는 건물 중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유일한 목조건축물이라고 합니다
선禪은 붓다의 마음이요, 교敎는 붓다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붓다의 마음인 선은 자신의 마음을 가리켜 (직지인심 直指人心)
자신의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며 (견성성불 見性成佛)
문자를 세우지 않고 (불립문자 不立文字) 문자 밖의 소식을 따로
전하는 (교외별전) 것을 지침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충청도 내포땅..가야산 남쪽 덕숭산(德崇山. 580m) 중턱에 자리 잡은
수덕사는 백제시대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고찰입니다.
고려때 지은 대웅전이 건재하고, 조선 말기에는 경허(鏡虛)와
만공(萬空) 같은 큰 스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수덕사의 창건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말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시절 나옹(懶翁)이 중수했다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건립된 것으로 ,
현재까지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라고 합니다.
이를 기준으로 건축 사가들은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강릉 객사문 등 고려시대 건축의 양식과 편년을
가름하고 있다고 합니다.
엽전이 뭐길래 저토록 발바닥으로 짖밟혀 가면서도
엽전을 긁어 모으려고 아우성입니다
수덕사(修德寺)의 설화 입니다
홍주마을에 사는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습니다.
수덕도령은 훌륭한 가문의 도령이었는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 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합니다.
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습니다.
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습니다.
다시 목욕재개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 일어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다 지었습니다.
그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합니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여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입니다
포대화상은 중국 승려로 법명은 계차(契此)라고 합니다.
뚱뚱한 몸집에 항상 웃으며 배는 풍선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지팡이 끝에 커다란 자루를 메고 다녔는데 그 자루 속에는
별별 물건이 다 들어 있어서 중생들이 원하면
무엇이든 다 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포대화상이라고 불리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포대화상이 재물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화상은 중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수덕사에는 세계일화를 바탕으로 하여 민족정신문화의
모음처라는 의미의 근역성보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불교 정보를 수집·조사·보존·전시함으로써 유물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의 축척과 더불어 불교문화의 이해와
가치 재인식의 장을 마련하고 있으며 본·말사내 백제
시제부터 시작된 이 지역 불교의 원류와 시대에 따른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귀중한 불교문화재
600여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덕사의 범종은 197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경내에 직접 주조공장을 만들어
전통 범종 주조 기법에 따라 스님들이
참관하여 제작된 것으로
무게가 6,500근이고 높이가 2.7m 둘레가 4.5m나
되는 청동제 대종이라고 합니다
수덕사 대웅전(修德寺大雄殿)은 1962년12월 20일에 국보 제49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수덕사에 있는 대웅전입니다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된 맞배집이며, 공포는 2출목으로 되어 있고
대체적으로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은 형식이나,
초방(草枋) 위에 주심(柱心)도리를 지탱하는 우미량(樑)이 무량수전의
직선적인 것과는 달리 심한 곡선으로 변했고,
또 내반(內反)된 소슬, 장식적인 대공, 쇠혀처럼 뻗은 두공(頭工)의 끝 등
전반적으로 무량수전에 비해 고려 후기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940년에 수리했을 당시 나온 묵서명(墨書銘)에 의하여 그 건물의
건축년대가 1308년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관음바위는 대웅전 서쪽의 백련당 뒷편에 있는 바위로
이 바위는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신 성역으로
이 곳 관음바위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는 관음바위 입니다
수덕사는 1962년 3월 25일 공포된 종헌에 의하여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승격하였으며
현재 충남 일대에 있는 60여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덕사는 1984년 11월 29일 근대 선풍을 진작한 선지
종찰임이 인정되어 총림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름을 덕숭총림이라 고 하고 초대 방장에
혜암스님을 추대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수덕사가 덕숭총림으로 승격하게 된 것은
기존 교구 본사로서의 위상에
종합 수도 도량으로 서의 역할까지 겸비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수덕사의 명부전 현판입니다
수덕사의 대웅전에는 1938년 만공스님이
남원 귀정사에서 이운해 온
삼존불(석가불, 아미타 불, 약사불)이 봉안되어
있느데 보물 138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백련당이라는 현판의 글씨가 인상적입니다
수덕사에는 경허스님을 비롯하여 만공스님, 벽초스님 등
유명한 고승이 계시던 곳이라고 합니다
경허스님은 조선 말기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증흥조로 출현하여
무애자재로운 생활 속에서 전등의 법맥을 이으며
선불교를 진작시킨 선의 혁명가이자
대승의 실천자 였다고 합니다
선풍을 지작시킨 스님의 문하에는
근대 한국불교 선문을 빛낸 만공, 혜월,
수월스님 등이 있다고 합니다
만공스님은 경허스님의 제자로 스승의 선지를 계승하여
성풍을 진작시킨 위대한 선지식입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선학원의 설립과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 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덕승 문중의 법맥을 형성하여 많은 후학을
배출한 그의 문하에는
비구 보월, 용음, 고봉, 금봉, 춘성, 벽초, 원단스님 등과
비구니 법희, 만성, 일엽 스님 등
당대에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벽초스님은 만공스님의 법맥을 이어 1940년 부터
30여년간 수덕사 주지를 지냈으며
1985년에 덕숭총림 2대 방장으로
추대되었다고 합니다
잠시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하며
제자들에게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모두 공부라 하였으며 이는 오늘날의 선농일여사상으로
세간의 큰 귀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으로 1930년 만공 스님의
뜻에 따라 도흡 스님이 창건하셨다고 합니다
현재는 비구니 제일선원으로 백여명의 비구니들이
수행. 정진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환희대는 비구니들이 기거를 하면서
수도하는 암자로서
김일엽 스님이 주석하다가 열반한 곳으로
1926년에 창건한 건물입니다
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의 탐물은
하루 아침 이슬과 같다는 가르침입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수덕여관이 있었던 자리라고 합니다.
지금은 문화전시 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고암(顧菴) 이응로(李應魯)의 본부인이 운영하던 여관이었는데,
그분이 돌아가시고 이제는 문화전시공간으로 바뀐 곳입니다
이 여관에는 쓸쓸하고 가슴 아픈 사연이
깃들여 있다고 합니다.
1957년 고암 이응로는 자신의 예술을 국제무대에서 펼쳐 볼
의욕으로 독일을 거쳐 파리로 건너 갈 때,
그는 이화여대의 제자이었던 박인경과 함께 갔다고 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버림받은 본부인은 수덕사 입구에 초가집여관을 지어 운영하면서
수절하며 지내다가 운명을 달리한 듯하다고 합니다.
1968년 이른바 "동베를린간첩사건"으로 이응로가
중앙정보부원에게 납치되어, 1년이상 감옥생활 할 때
옥바라지한 사람이 본부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응로는 감옥생활을 마치고 미련없이
파리로 돌아 갔다고 합니다.
아마 조선여인의 체념어린 순종을 마지막으로
보여 준 사례인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 곳 마당에는 감옥생활을 끝내고 이곳에 잠깐 머물렀던 이응로가
평평하고 너른 바위에 소위 문자추상화가 새겨져 있습니다다.
수덕사에는 또 다른 볼거리가 있는데
바로 수덕여관입니다.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로 선생의 사적지입니다.
고암 이응로 화백은 1944년 수덕여관을 구입해
한국전쟁시 피난처로 사용하였으며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옮기기도 하였습니다.
현재는 새로 복원을 하여
찻집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초가집으로 복원하여 옛맛은 없으나
차 한잔 하기에는 좋습니다.
이 암각화는 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난 후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이며 이 곳 수덕여관에서 쉬면서 작품을 제작할 때
작고한 박귀희 여사께서 당신이 너무나 고생하시고 이제 나이도
있으니 좀 쉬지 않고 그 돌에 이름을 새긴다고 그러세요
좀 쉬세요 라고 하자 고암 이응로 선생께서 당신은 모르실꺼야
삼라만상의 영고성쇠를 문자적 추상으로 이 돌에 깊히 깊히
새겨두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1969년 이응로 그리다"라는 낙관도 들어 있습니다
고암이라는호는 근대의 문장가 정병조 선생이
동진의 명화가 고개지 처럼 되라는 의미로
지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고암 이응로 화백은 1989년 호암겔러리에서
초대 전시 기간 중 프랑스 파리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며
파리의 예술인 묘지에 잠드셨다고 합니다
수덕사의 여승은 보이질 않았습니다
이 곳까지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팔도문화재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멸보궁 법흥사를 찾아서 (0) | 2010.03.05 |
---|---|
인비리의 고인돌을 찾아서 (0) | 2010.03.04 |
간월암을 찾아서 (0) | 2010.02.01 |
범어사 가는 길에 (0) | 2009.12.12 |
영천 충효재를 찾아서 (0) | 2009.12.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