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팔도문화재답사

간월암을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0. 2. 1.

 간월암을 찾아서

 

 

간월암은

과거 피안도 피안사로

불리며 밀물때에는 물 위에

떠 있는 연꽃 또는 물 위에 떠 있는

 배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여  연화대

또는 낙가산 원통대 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절입니다  간월암은

서산군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작은 암자로

조선 초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송만공 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암자와는

달리 간조시에는 육지와 연결되고  만조시는 섬이

되는 신비로운 암자로  만조시에는 물 위에 떠

있는 암자처럼 느껴집니다.   밀물과 썰물은

6시간마다 바뀌며,  주위 자연경관과 옛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고찰이 어우러져 관광객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는 곳 입니다

 

 고려말 무학대사가 이 곳에서 수도를 하던 중 달을 보고 홀연히

도를 깨우쳤다고 하여 암자의 이름을 간월암이라 하고

섬 이름도 간월도라 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숭유억불정책으로 간월암이 폐사되었던 것을

1941년 만공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만공선사는 이 곳에서 조국의 해방을 위한 천일기도를 드리고

 바로 그 후에 광복을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간월암은 밀물과 썲물 때 섬과 육지로 변화되는 보기 드문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특히 주변의 섬들과 어울어진 낙조와 함께

바다 위로 떠 올랐을 때의 경관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간월도는 서산군 부석면의 남쪽 천수만 안에 위치한 작은

섬마을이었으나 1983년 10월에 천수만 간척사업으로

 인근에 있는 창리와 방조제가 연결되어 섬마을을 면하게 되었으나

교통수단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옛날 그대로 라고 합니다  

 밀물과 썰물은 6시간마다 바뀌며, 주위 자연경관과 옛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고찰이 어우러져

관광객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또한 간월도에서 생산되는 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굴부르기군왕제가

 매년 정월 보름날 만조시에 간월도리 어리굴젓 기념탑

앞에서 있는데, 이 행사는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은 청결한

아낙네들이 소복(흰옷)을 입고 마을 입구에서 춤을 추며 

출발하여 굴탑 앞에 도착하면 제물을 차려 놓고 굴 풍년 기원제를

지내며 채취한 굴은 관광객에게 시식도 시켜준다고 합니다. 

  안면읍에서 서쪽 해안으로 들어가면 방포항이 있는데 신라시대

때는 이곳을 ‘건승포’로 불렀다고 하던 명칭이.

 신라 말에는 ‘젓개포구’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절을 개조한 포구’라는 의미에서 ‘절개 포구’라고 부르다가

  ‘젓개포구’로 부른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에는 신라 말 무학대사가 해안 옆에서 절을 짓고 살면서

도를 닦다가 배가 자주 좌초돼 인근 간월도로 절을 옮겨

간월암을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지고 있습니다 

무학대사가 사찰 옮겨 어부들의 목숨을

구하였다는 이야기 입니다    

신라 말 무학대사 건승포서 정진하던 중  어선이 자주 좌초되자 간월도로

절 옮겨 “허허, 이거 큰일 났구나. 또 배가 암초에 걸려 가라앉고 있어.”

 

옛날 젓개포구 옆에서 무학대사가 자그마한 암자를

창건해 수행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 절 앞을 지나는 배가 자주

좌초를 당해 인명이 희생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서해 바다라 파도가 거세지도 않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배의 침몰 사고를 보면서 무학대사는

 적잖이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학대사는 제자들에게 지시를 했습니다.

  “내가 이곳에 절을 짓고 수년동안 수행을 하고 있는 이유는

만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내가 제도해야 할 중생들 가운데는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는 선원도 있고,

 땅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들도 있다. 그중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이 절을 지날 때마다

 희생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구나. 그러니 너희들이

왜 배들이 이 절을 지나다가 좌초되는지 원인을 알아 보거라.”

 스승의 지시에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그중 한 스님이 묘안을 떠올려 말을 꺼냈습니다.  

  “여기서 아무리 방법을 찾아봐도 원인을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 중에 누가 아예 고기잡이 배를 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스님이 반대했습니다.

“만약에 배를 타고 나갔다가 좌초되어 목숨을

잃어 버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질 않습니까?”

그랬습니다.  

 배가 좌초되는 이유를 알려고 하다가 중한 목숨만 더 잃을 것이 뻔했습니다.  

한참 고민하던 스님들 가운데 한 스님이 묘안을 꺼냈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것에 대비해 우리 가운데 한 명이 인명구조용 배를

큰 배에 싣고 출항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제일 젊은 스님이 어부가 되어 고기잡이 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출항에 앞서 스님은 어부들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여보게들, 자네들도 알다시피 건승포 앞에만 가면 배가 뒤집히니 혹여

그렇지도 모를 것에 대비해 작은 배를 한척 마련해서

고기잡이를 나가도록 하세.”

건승포 앞에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사실을 알고 있는 어부들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인명구조용 배를

함께 싣고 고기잡이를 나갔습니다.

며칠을 바다에서 보낸 어부들은 만선의 기쁨을 안고

건승포로 돌아오기 위해 뱃머리를 돌렸습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선장이 배를 몰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배를 조종한 경험이 있는 선장이

침착하게 건승포로 조타수를 돌렸습니다.

선장은 인적이 없는 항구인 건승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사찰에서 나오는

불빛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기도하기 위해 켜 놓은

사찰의 불빛을 등대 삼아 서서히 항구로 배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걸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배가 멈춰버렸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선장님.”

 

선원들이 깜짝 놀라 선장실로 달려갔습니다.   “큰일났네. 만선의 기쁨을

누리기는 틀린 것 같네. 배가 암초에 걸려 버렸다네.”

사태가 화급해지자 어부로 변신한 스님은 암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명구조용 배를 바다에 띄웠습니다.

 

 “스님, 많은 어선들이 밤늦게 항구를 출입할 때 우리 절의 불빛을 등대삼아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절 앞에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너무 커

밀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썰물 때는 배의 바닥이

 암초에 부닥쳐 사고가 일어나기 쉽습니다.”

 

 무학대사가 한동안 말을 들은 후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방도가 있겠느냐?”

“저, 저….”

 

제자인 스님은 차마 사찰을 옮겨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그러자 무학대사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너의 입으로 절을 옮겨야 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겠다는 뜻이로구나.

내 너의 뜻을 알겠으니 이만 물러가도록 해라.”

 

 

제자가 물러간 뒤 무학대사는 법당에서 깊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며칠동안 문밖 출입을 하지 않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법당 문을 활짝 연 뒤 제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내가 이곳에 절을 지은 지 10년이 넘었다.

여기를 다녀간 제자들도 100명이 넘었어. 하지만 이제 이 절의 기운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머지않아 이 절을 폐사시키고 새 수행처를

찾을 것이니 그리 알고 준비하도록 하라.”

 

 

 

그러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그러면 어디로 수행처를 옮기시려 하십니까?”

 

무학대사는 조용히 답했습니다.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50리 떨어진 조용한 곳이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사찰에 모셔놓은 부처님과 사찰건물을 해체한 뒤

부재들을 수레에 싣고 50리 길을 이동했습니다.

 

 

무학대사는 안면도를 한 바퀴 돌아 지세를 살핀 뒤 한 곳에 짐을 내릴 것을

명했습니다. 그곳은 풍랑이 휠씬 조용했습니다.

 

 

대신 밀물 때는 바닷물에 잠겨 섬이 되는 현재의 부석면에 위치한 간월도

였습니다. 이곳에서 무학대사는 수행을 하다가 달을 보고 홀연히 도를

깨치시고 난 후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菴)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무학대사는 그 후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스승이 되어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는 등

   조선의 건국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조정에서는 간월도,

황도 등을 사찰 땅으로 하사했습니다.

  이후 간월암은 조선왕조의 불교배척 정책으로 완전히 폐사됐다가

근세에 만공선사가 제자인 벽초스님에게 명해 중창했다고 합니다.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섬들 사이로 드러나는 일출과 일몰은 빼어난

장관을 이루는 간월암은 하루 두 번씩 밀물과 썰물 때는

 섬과 육지로 변화되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사찰로 요즘도 기도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 간월암이 있는 바로 이 곳이 간월도 어리굴젓으로

유명한 어리굴젓의 특산지 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구전에 의하면 간월도의 어리굴젓은 그 맛이

뛰어나서 식탁위의 명찬으로 고려말기 부터

  조정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조선조에 와서는 태조대왕의

왕사이시던 무학대사께서 이 곳 간월암에서

 수도를 하실 때 처음으로 태조대왕에게 진상하여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려져서 이 때 부터

간월도의 어리굴 젓이 진상품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간월도의 굴은 다른 지방의 굴과 자라는 과정이 특이하여

어릴 때에는 돌과 바위 등에 붙어서

 석화로 자라나다가 완전히 자란 뒤에는 돌과

바위에서 떨어져 갯 벌에서 갯벌에서 사는

 토굴로 변했을 때 이 굴을 아낙네들이 채취하여

어리굴젓을 담그는데 특히 굴의 색깔이

 검고 몸에 물날개(굴 알에 난 미세한 털)가 많이 돋아 있기 때문에

양념이 골고루 묻어 발효가 잘 되어 특유의 맛을 낸다고 합니다

어리굴젓의 제조과정을 보면 주민들이 지금도 조상전래의

재래식 방법을 그대로 지켜서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먼저 바다에서 채취한 굴을 까서 맑은 해수에 깨끗하게

씻은 다음 대바구니에 받쳐 물끼를 모두 뺀 다음에

 천일염으로 간을 맞추고 질그릇에 넣어 섭씨 15도의

서늘한 곳에 2주간을 발효시킨 다음

 다시 대바구니에 받쳐 물끼를 없애고 잘 빻아진

고추가루를 알맞게 잘 버물려서

옹기에 담아두면 좋은 어리굴젓이 된다고 합니다

간월도의 특산물인 어리굴젓은 고려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오랜 세월을 우리의 전통음식문화를

전수 보존해 온 간월도리 주민들의 긍지를 더 높이며

조상대대로 이어온 어리굴젓의 제조방법을

 후손들에게 전수계승토록 하여 서산군의 특산물인

간월도 어리굴젓의 명승을 오래오래 

간직하고자 이 곳 간월도리에 이 기념탑을 세운다는

비석이 간월도의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간월도에는 몇 번 다녀온 곳입니다만 여행으로 다녀온 것과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것은 보는 눈의 시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팔도문화재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비리의 고인돌을 찾아서  (0) 2010.03.04
덕숭산 수덕사를 찾아서  (0) 2010.02.04
범어사 가는 길에   (0) 2009.12.12
영천 충효재를 찾아서   (0) 2009.12.10
강호정을 찾아서  (0) 2009.12.0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