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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을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09. 6. 26.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을 찾아서

 

이 탑은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라고 합니다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은 국보

 제16호로 안동시 법흥동에 있으며 이 탑이 있는 일대가 법흥동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 시대때 건립되었다는 법흥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탑 이외의유물들은

 남아 있지 않고 고성 이씨 탑동파의 종택이 있습니다 안동의 역사서인 영가지에는

 조선 성종18년(1487)에 고쳤으며 법흥사가 3칸 정도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법흥사에 속해 있던 탑으로 추정은 되지만 탑 주위로 민가와 철로가 들어있어서

 정확하게 확인을 할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다고 합니다

 

 

 탑은 1단의 기단 위로 7층의 탑신을 쌓아올린 모양으로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중상과 사천왕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전탑은 진한 회색의 무늬없는 벽돌로 쌓아올린 탑신은 1층 몸돌에 감실을

마련하였는데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 놓아서 아쉬움이 큽니다

 

사천왕상과 8부중상은  기단의 남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1층 몸돌에 감실을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전탑은 7층이나 되는 높은 층수에 높이가 17m 기단너비가 7.75m 의

거대한 탑임에도 매우 안정된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붕돌은 위 아래 모두 계단 모양의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과는 달리

윗면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내에서는 남아있는 전탑 가운데서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고 합니다 

 

 

이 탑은 지붕에 기와를 얹었던 자취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목탑을 모방하여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는 전탑입니다

 

 

 

탑을 멀리서 보면 지붕 부분의 기와가 드문드문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탑의 상부에는 금동장식으로 된 상륜부가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객사 소용물을 만드는데 쓰려고 녹여 버렸다고 하니

이 탑이 조선시대에 받았던 대접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일대의 지명을 법흥리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법흥사에 세워진 전탑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 놓아 아쉬움을 남기는 이 탑은 7층이나

되는 높은 층수에 높이 17m, 기단너비 7.75m의 거대한 탑

임에도 매우 안정된 자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탑의 상륜부는 소실되었고, 탑신의 벽돌들은 틀어져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것만 같았습니다,

 

  

하대중석은 시멘으로 덮여 있었고 지대석인 사천왕과 팔부중상만이

안간힘으로 힘겹게 이 탑신을 받들고 있었습니다  

 

 단층의 기단부에는 팔부중상과 사천왕상을 조각한

판석을 세워서 전탑을 조성하였습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탑을 말하며.

 법흥동에 세워져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있던 탑으로 추정합니다

 

 

 기단부의 문짝은 페인트칠한 나무판자로 붙여져 있었으며,

옥계석에는 풀들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세워놓았고, 기단 남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1층 몸돌에 만들어진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탑은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입니다  

 

 

 안동 신세동 7층전탑으로 국보 제 16호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전탑은 기와지붕을 얹고 맨 위에 화려한 금동상륜을 씌웠던 아름답고 늠름한

 탑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원래 모습에서 많이 훼손된 채 철길옆에 답답하고

위태롭게 서 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이 탑의 기단부에는 팔부신중과 사천왕상을 새긴 판돌이 면석의 일부을

이루고 있고 그 위쪽으로는 경사지게 시멘트를 발라 마감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일제시대의 대대적인 보수때에

원형이 변형된 것으로 보입니다.

 

 

국보지정과 보물지정의 차이점은

국보는 보물의 가치가 있는 것 중에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기술적 가치가 가장 으뜸인 것으로,

제작연대가 오래되고 시대를 대표하거나 가장 우수하며 특이한 것으로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있는 문화재이고  

  

보물은 국보처럼 시대를 대표하거나 특이한 것이 아니더라도 또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없더라도, 일반적인 지정의 수준에 이르면 보물이 됩니다.

보물의 수는 국보보다 많고 동형(같은 형태)의 것들이 많습니다.

  

국보로 지정되면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습니다.

국보의 지정번호는 가치의 높고 낮음을 표시한 것이 아니고

지정된 순서를 말하는것이라고 합니다.

 

국보란 역사적·학술적·예술적·기술적인 가치가 큰 문화재로서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한 문화재로 보물로 지정될 가치가 있는 것 중에

제작연대가 오래 되고 시대를 대표하거나, 유례가 드물고 우수하며 특이하거나,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있는 것을 지정합니다.  

 

이종악의 산수유첩의 오른 쪽 끝 부분에 보이는 신세동 칠층전탑이 보입니다.

 이 그림의 전탑은 기단부가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7층의 탑신이

분명히 나타나 있어서 18세기 중엽에도 탑의 모습은

지금과 거의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세동 칠층전탑이 지금은 비록 바로 옆으로 나있는 철길에 의해 좁고 답답한 공간속에 갇혀 있지만, 원래는 탁 트힌 앞쪽으로는 멀리 호수가 보였던 아름다운 풍광속에 있었습니다. 위의 이종악의 산수유첩에서도 그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안동시 법흥동 칠층전탑을 정원으로 하고 있는 고성 이씨 탑동파 종택입니다

 안동 영남산의 동쪽 기슭에 작은 계곡을 끼고 있는

넓은 대지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집의 본채는 조선 숙종 30년(1704)에 좌승지 이후식이 지었다고 하며

 북정은 영조 51년(1775)에 진사 이종주가 지었다고 합니다

 

 솟을 대문채, 사랑채, 안채, 정자와 연못 등이 있으며 안채의 동쪽에는 3칸 크기의

 사당이 있습니다   가옥 전체를 당호인 임청각이라고 하며 임청각에 딸린

별당채를 군자정이라고 부르는 이 가옥은 고성이씨 대 종택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국무총리)을 지낸

독립운동가 이상룡의 생가이기도 합니다

 

 

 이 집은 숲이 우거진 야산과 계곡으로 흐르는 물을 건물과 잘 조화시켜서

지어진 사대부 집안의 저택으로 전통적인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현 소유자의 11대 조상인 이후식(1653 - 1714)이 조선 숙종때 안채를 짓고 이어

사랑채를 짓다가 완성하지 못한 것을 손자 이원미가 마저 짓고 대청인

영모당도 지었다고 합니다대청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북정은 조선 영조 51년에 지었다고 합니다

 

 

원래는 아흔아홉칸의 큰 집이었으나 일제의 중국침략이 본격화 되던 1930년대

 후반 청량리와 경주를 연결하는 중앙선 철로(1936 착공 - 1942 개통) 가 

 이집을 통과하게 건설하면서 파괴되고 50여칸 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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