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신도비를 찾아서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25세 때 임란을 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찔렀으며
27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정유재란때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왜적을 토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공적으로 난이 끝난뒤 선무공신에
녹선되었으며 오위도총부도사, 마량진 첨절제사,
경원도호부사, 가덕진수군첨절제사, 경흥도호부사,
경기 충청 황해 삼도 수군 통제사를 역임 했으며
공조 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으로 무과
출신의 장군에게 공조참판이라는 관직을
내린 것은 능력과 국왕의 신임이 그만큼
두터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신도비각
이 신도비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신도비입니다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제 8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습니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은 최고운 선생의 후예로
사성공파에서 다시 마을 이름을 따서 이조
종파(가암파)의 파조가 됩니다
경기감사 정세규가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하면서
장군이 나이가 많은 것을 배려해서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자 강개하게 말하기를 ......
내가 늙어서 장수의 역할을 감당할 수는 없지만
함께 따라 갈 수는 있습니다
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싸움에
동참하였다고 합니다
용인험천지역에서 중과부적으로 몰리자
사람들을 둘러보고
너희들은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 없다
고 하시면서......
나는 여기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죽을 것이다 라고 하며
활을 계속 쏘시면서 분전했다고 합니다
난이 끝난 뒤 시신을 수습할 때 바로 그 곳에서 장군은
온 몸에 화살을 맞은체로 발견되었다고 습니다
또 다른 감동적인 일화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죽기전 전황이 불리해 지자 자신을 평생 따르던 두 종에게
나는 여기서 죽을테니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답니다
이 때 환갑을 넘긴 두 종은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는데
어찌 우리 종들이 충노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항변하면서 함께 목숨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종가에서는 이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장군의 불천위 제사를 올린 뒤 상을 물려
이들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반상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상민도 아닌 종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이 제사의 전통은 이어오고 있으며
지금 종가에서는 종노비와 비각을 충의당 옆 자리에
세워서 그 충노의 뜻을 기리고 있답니다
사후에 판중추부사 김시양은 최진립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는 뜻은
속으로 본래 정해서 창졸간에 전사한 유와는 다르니
그 문에 정려를 내리시라고 청하여 ......
신라의 고총인 개무덤 앞에 정려되어 비와 비각이
함께 남아 있는데 지금은지붕과 기둥이 낡아서
대대적으로 보수중입니다
내비록 늙어 잘 싸우지는 못할 지언정
싸우다가 죽지도 못하겠는가 ?
이 정무공 최진립장군의 신도비는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는 비석이
땀을 흘린다고 합니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은 63세 때 공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으로 임명 되셨는데
조선시대에 무과출신의 장군에게 그직이 내려진 것은
능력과 국왕의 신임이 그 만큼 두터웠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곳까지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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