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남부지리의 영사정(永思亭)을 찾아서
시조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15세손인
성균진사 우천휘포공 선조의
추모하기 위하여 1925년(乙丑)에
지어진 영사정(永思亭)이라는 정자를
지었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까래가
썩을 정도로 건축물이 낡아서 1993년 9월에
후손들이 성의를 다 하여 새롭게 단장을 한
영사정입니다 부지리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곳으로 오래된 느티나무가 그 역사를
말 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영사정
영사정(永思亭)
내남면 부지리의 마을 입구에 있는 영사정은
시조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15세손인 성균진사
우천휘포공 선조의 추모하기 위하여 1925년
(乙丑)에지어진 영사정(永思亭)
이라는 정자입니다
고운 최치원선생은 서기 857년 신라의 수도
사량부에서 탄생하셨고
부친은 옥구의 지현사를 지낸
견일이라고 합니다
성은 최요 이름은 치원, 자는 고운, 호는 해운으로
어릴 때 부터 풍의가 아름답고 성품이 정민하시어
학문을 좋아하는 천재였다고 합니다
고운선생이 탄생하실 때 까지 신라에는 문자가 없었고
기록도 할 수 가 없는 시대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한문학을
대성시키셨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집인 계원필경집을 남기셨는데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보다도 수백년이나 앞선
기록 문자라고 합니다
단단 석중 물(團團石中物)은
반벽 반황색(半碧半黃色)이요
야야지시조(夜夜知時鳥)가
함정미토음(含情未吐音)이라
라는 글이있습니다
둥글고 둥근 돌 속의 물건은
반은 흰색이요 반은 노란색이라
밤마다 시간을 알리는 새가 뜻을 머금고도
토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글로 표현하여
석함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이 계란임을
알아마친 글입니다
崔는 높을 山 과 사람 人 흙 土를 두개
포갠 圭자로 형성된 문자 이며
이 규자는 천자에게 받은 땅을 다스린다는 뜻과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내리던
신표의 뜻입니다
최(崔)자는 하늘아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인신 최고의 신분표시였다고 합니다
최(崔)자의 숨은 뜻은 높고 크다는 뜻으로
영어로는 high and big 이라고 합니다
경주최씨의 실제 기원은 최소벌도리공이
12여개의 연맹국가중 중심세력인
6부의 대부족장으로
지배하던 BC70년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12세인 서기 868년에 만리붕정 유학길에 오르실 때
아버지께서 말씀 하시기를
=당나라에 가서 10년을 공부하여 과거를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말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하지 않을 테니
열심히 공부하여 공을 세우라
고 엄격한 훈계를 하셨답니다
선생은 인백기천으로 유학한 지 6년 만인 18세에
황제가 직접 출제를 한 과거에 합격하여
중국천하를 진동시켰다고 합니다
24세가 되던 880년에 토 황소 격문을 지으셨는데
이 한 편의 글이 반적 황 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 속의 귀신까지도 이미 너를 죽이려고 의논하였을
것이다 라는 구절에서 황소도 놀라 혼비백산
했다고 합니다
26세가 되던 해에 당나라 황제로 부터 자금어대를
하사 받아서 대궐에 무상출입을 허가받은 것으로
외국인에게는 다시 없는 특혜요
영광이었다고 합니다
29세가 되던 885년 3월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 오셨으며
대숭복사비문등의 명문을 남기셨습니다
지리산에서 성불한 사람은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많은 고승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은 고운
최치원선생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고운 최치원선생의 발자취는 국보로 지정된 진감선사
대공탑비, 쌍계사 입구의 쌍계(雙磎)와
석문 암벽각자가 있으며
신라의 소식을 들을 때 마다 귀를 씻었다는
세이암 이라는 각자가 있습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은둔의 길을 떠나면서
청산맹약이라는 글을 남기셨습니다
선생은 이 글을 남기신 다음 행적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스님이시어 산 좋다 말씀 마오 이렇게 좋은 산을
낸들 어이 떠나겠소
뒷날 내 자취 시험해 보구려 한 번 들면
또 다시 돌아가지 않을려니
이 연자 방아의 돌 짝이 한 쌍이란 것은
돌려봐야 알겠지요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 갔길레 돌들이
저토록 닳아 문드러 졌을까?
자신을 한 번 더 돌아 봅니다
고운은 대학자로 학문은 물론 불교와 도교 등
종교에도 통달한 달인으로
지리산 신선설은 천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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