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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명가(名家) 최진립장군의 길을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1. 2. 26.

  명가(名家) 최진립 장군의 길을 찾아서 

 

2009년도에는

 MBC 에서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를 통하여 경주의 서라벌 옛땅을

 찜질방보다 더 높게 달구어 주었는데 2010년에는

 초부터 KBS에서 명가(名家)라는 이름에 걸맞게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를 첫날부터 시청자들을 불러 모우고

있는 최진립 장군의 길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KBS

주말연속극(토.일저녁 9:40)이 300년의 긴 세월

 동안 만석꾼을 이어온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를

 그려가는 과정에서 경주최부잣집과 관련된

유산들을 먼저 둘러 보았습니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25세 때 임란을 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찔렀으며 27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다고합니다 

 

 

신도비각입니다

 

 이러한 공적으로 난이 끝난 뒤 선무공신에 녹선되었으며

 경기충청황해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했으며

 

공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으로 무과출신의 장군에게

 공조참판이라는 관직을 내린 것은 능력과 국왕의 신임이 

그만큼 두터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신도비의 귀부와 비문이 있습니다 

 

이 용산서원은 정무공 최진립 장군을 행사하기 위한 곳으로

 조선 숙종 25년에  경주부윤 이형상이 지방선비들과 함께

세웠으며 임금으로 부터 숭렬사우(崇烈祠宇)라는

 편액을 내려 받았다고 합니다

 

고종 7년에 철거 되었다가 1924년에

다시 건립된 서원입니다   

 

 

용산서원에서 문중 어른들의 모습입니다 

 

 

   최진립장군이 기거하시던 충의당과

 충노비각을 찾아서

 

 

병자호란 때 순절한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이

 기거 하시던 충의당과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는데

어찌 우리 종들이 충노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항변을 하며

 

 

함께 목숨을 바친 종들을 위하여 종가에서는 반상의 계급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상민도 아닌 종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장군의 제사 뒤에 상을 물려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종가에서는 종 노비와 비각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고 해서

충의당과 충노비각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최진립 가문에 대해서 더 보시고 싶으면 우측의 검색창에

최진립 이라고 치시고 검색을 해 보세요  

 

 

조선시대 최고 부자였던 경주 최 부자 집은 9대 진사와

 12대에 걸쳐 300년 동안 만석 군을

지낸 집으로 유명합니다 

 

 

이렇게 권력과 부를 장기간 누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최부자 집의 가훈에 있지 않을까?

 

 

불에 타버렸던 최부잣집 고택을

새로 지었습니다 

 

 

 

최부잣집의 가훈입니다

 

첫째; 흉년에는 땅을 사지 않는다

 

흉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부자에게는

 부를 축척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도 이는 가진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되돌려 준다

 

그 이상의 돈은 내 돈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소작하는

 농민들에게 소작료를 감해 주었습니다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조선시대 과객(나그네)은 부자 집에서 며칠씩 묵고 가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최부자 집에서는 일년에 소비하는 쌀이

 약 3000석 정도 였으나 그 가운데 1000석은

과객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동학난 이후에도 경상도 일대에서 부자집을 터는 활빈당이

 최부자집만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넷째; 최부자집을 중심으로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주변사람들이 굶어 죽는데 나혼자 만석군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섯째;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한 번 권력이나 높은 지위에 맛을 드리면 권력 다툼에

 끼어들게 되고 오래 못가서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고 저치적으로 보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아예 권세의 자리에 끼여들지 말라는 것을

가훈으로 정했던 것 같습니다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삼년간 무명옷을 입어야 하며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하였답니다

라마 <

 

최부잣집 맏종부님으로 교동법주를

 빚으시는 어른이십니다 

 

 

 

향교 서편에는 무형문화재 제 27호인 경주 최씨 고택과

 

 조선시대 궁중주인 경주 교동 법주(무형문화재 제 86-다 호)를

빗는 양조장이 이웃에 있습니다

 

 


 

최부잣집이 이러한 철학을 갖게된 배경에는

어떤 스님의 영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용현 살롱(667)에 의하면

재물은 퇴비와 같아서 한군데 쌓아 놓으면 썩어서 냄새가 나고

여러군데로 흩어 뿌리면 곡식을 잘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된다는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최씨 집안에서는 만석이상이 되면 사회에 환원하는

철학을 실천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최부잣집 한정식으로 유명한 요석궁입니다 

 

 

 

최부자 집의 마지막 인물인 최 준은 막대한 재산을 상해

임시정부의 정치 자금으로 헌금했다가 이것이 왜경에

 탄로가 나서 옥살이까지 하였습니다

 

 

귀하신 분과 요석궁에서의 만찬은 좋은

추억들을 만들어 줍니다

 

 

요석궁을 찾아서 를 검색창에서

 찾아보세요

 

 


최준은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이었으며 현 고려대학교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건립 기금도 기부했고 8.15 광복 후

조국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에서 현 영남대학교 전신인

 대구대학을 창설 했습니다

 

 

 

그리고 민족문화유산 보호에 관심이 많아 1920년에

경주고적보존회 를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이것이 오늘날의 국립 경주박물관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 때는 의암 손병희선생, 호남갑부 김성수 선생,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 같은 분들도

 최부자집에 묵어 갔답니다

 

 

 

 

 


명가>에서 

 정려비각과 개무덤을 찾아서

 

정무공 최진립이 용인 험천에서 전사한 다음

 

 판중추부사 김시양이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는 뜻은 속으로 본래 정해서 창졸간에

전사한 유와는 다르므로

 

그 문에 정려를 내리소서" 라고 해서 신라의 고총인

개무덤이 앞쪽인 충의당 입구에 정려되어 비와

비각이 함께 남아 있는데 

 

요즈음 정려각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공사 중에 있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 수백명을 인솔하여

서생포(西生浦)에서 적을 대파하고

도산(島山)에서 대승하였습니다.

 

그리고 39년이 지나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포위당하자 그는 용인 험천에서 순절했는데,

 

꼿꼿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고 활을 쏘니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화살이 다 되자 따르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나는 여기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이 자리를 표시하여 두라’

하고는 끝까지 항전했다고 합니다.

 

 


 

난이 평정된 후에 여러 아들이 그곳에서 그의 시체를 찾았는데

 화살을 온 몸에 맞아 고슴도치와 같았으나 얼굴은

살아있는 것 같이 자약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전적 및 유품으로는 경주시 유형문화재 제28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소재지로는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황금동의 국립대구박물관의 미술실에는

 임진왜란당시 최진립을 포함한 의병장들의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수리뫼는 최진립 장군의 맏종부가 종가집에서 직접 운영

하고 있는 부잣집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전통음식 체험장 수리뫼 입니다   

 

 


 

부(富)란 것은 얻기도 힘들지만 지켜나가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자 3대가 어렵다는 말이 나왔을 것입니다.

 

게다가 어렵게 얻은 부를 이웃에 베풀고 사회에

환원할 줄 아는 아름다운 부자가 되기는

 더더욱 힘들 것입니다.

 

 

최진립장군의 종손이 기거하고 있는 종가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는 수리뫼 식당입니다

 

 


 

조선시대 경주의 최부자집은 부자면서도 존경을 받은

 집안으로 조선팔도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씨 집안의 가장 극적인 인물은 해방 전후를 살았던

최준(崔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총독부로부터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받았지만

번번히 거절했던 최준은 백상상회를 설립해 모은

 돈을 남몰래 광복회에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최준은 광복 직후 모든 재산을 털어 지금의 영남대 전신인

 민립 대구대학을 설립한 뒤 눈을 감았습니다.

 

 

조상의 나눔 정신을 이어받아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고

빈손으로 돌아간 최준의 행적은 저로 하여금

부의 사회적 가치를 새삼 음미하게 하였습니다.

 

 

 


 

이미 ‘동학의 창시자’하면 그 이름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유명하신 분이 우리 가문에 또 있습니다.

 

 

‘동학운동’하면 전라도의 전봉준을 생각하기 때문에

 최제우의 고향이 경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 것 같습니다. 

 

 

  최제우는 봉건적 체제에 대한 모순을 크게 느끼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 가르치며 37세 때

동학을 창도했습니다.

 

 

 

1860년 이후에 전개된 교조신원운동, 동학농민혁명,

 3.1독립운동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근대적 민족사

 전개의 사상적 토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최제우의 동학은 가장 기본적인 정신사적

문화유산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정에서는 동학 교문을 민중의 반란 조직 처럼

 위험시하고  특히 나라가 이단시 하던 서학으로 오인하여

최제우를 체포하여   1864년 대구 장대에서

 ‘사도난정’이란 죄목으로 처형하였습니다.

 

 

 

 


그 후로 최시형이 최제우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되었습니다.

 

최시형은 나라의 감시를 피하여 동학의 포교에 힘썼고,

처음 설법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귀천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피력했습니다.

 

 

1894년 전봉준이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키자 총궐기를 명하여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이 때 크게 지고 피신하였다가,

1898년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당하였습니다.

 



 

오늘도 고우니 방을 찾아주신 것 깊히 감사드립니다    

이곳까지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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