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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최진립장군이 기거하시던 충의당과 충노비각을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1. 2. 26.

최진립장군이 기거하시던 충의당과 충노비각을 찾아서

 

병자호란 때

순절한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기거하시던 충의당과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는데

어찌 우리종들이 충노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항변을 하며 함께 목숨

 바친 종들을 위하여 종가에서는 반상의

계급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상민도

아닌 종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장군의 제사

뒤에 상을 물려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종가에서는 종 노비와 비각이 함께

조성 되어 있다고 해서 충의당과 충노

비각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충노비각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는데 어찌 우리 종들이

충노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과  반상의 계급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종의 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장군의 제사 뒤에 상을 물려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하는 것과 또 종 노비와

 장군의 비각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정무공 잠와 최진립 장군이 손수 심으셨다는 노거수는

 회나무로 일제강점기와 6.25 당시 한 때

 고사 했다가 다시 소생한 나무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이 나무는 1986년 11세손 영안 이라는 분이

성력을 기울여 주위의 환경을 정화하셨으며

 

 1997년에는 나무의 수세가 약해서

경주시에서 양생을 하였다고 합니다 

 

 

 

 

오래된 노거수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께서

손수 심으셨다는 회나무로

약 400년이나 된다고 하며

 

 지금은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는 나무입니다

 

 

 

동경지 충의편에 있는 것으로 병자호란 때

 

충노 기별이 장군의 옷을 받아 입고 울면서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는데

어찌 충노가 되지 못하리오

라고 하면서

 

장군을 따라 선봉으로 나아가 열심히 싸우다가

 장군과 함께 전사를 하였다는

감명 깊은 이야기 입니다

 

 

 

 

반상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양반이 세워준

 충노각이란 생각지도 못할 이야기 입니다만

 

최씨 종가에서는 당시 종에게도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으로 생각 됩니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동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을 제수 받았으나

벼으로 사직하였다고 합니다

 

 

 

정유재란(1597)때 결사대를 인솔하고 서생포의 적을

격멸한데 이어 권율과 함께 도산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1600년 여도만호 겸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취임을

하지 않고 1607년 도총도사에 제수되자

 비로소 관직에 났다고 합니다

 

 

 

 한 틀(셋트)을 보기 드문 연자방아 돌인데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만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움이 이 받침돌의 경사면과

 굴림돌의 안쪽으로의 경사각이  축을 중심으로

 맞물려 돌아가야만 힘이 적게 들면서

곡식을 잘 찌을 수 있다고 합니다  

 

 

 

 

충의당(忠義堂) 입구라고 큰 표지석이 반가이

맞이하고 있는 충의당입니다

 

 

 

 대문이 잠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만

오늘 따라 오는 손님을 반기려는 듯

 출입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바로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 집은 정무공 최진립(1568 - 1636) 장군이

 기거하시던 사랑채에 해당되는곳으로

 

처음에는 당호를 흠흠당(欽欽堂)이라고 하였으나

 1760년 경 중수를 하고 난 뒤에 충의당

(忠義堂)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종택의 사랑채 앞에는 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사당 표지석으로 보이는 석물 한 점이

 출토되어 놓여 있는것으로 보아 이 곳에

사당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충의당 이라는 대형 현판 옆에는 충의당 기문이 있는데

면암 최익현이 이 곳에 직접 와서 쓴 것이라고 합니다 

 

 

 

 

 경모각이라고 조각된 현판입니다 

 

 정무공의 저서로는 정무공기실(貞武公紀實) 2권이

있으며 1637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647년에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경주의 숭렬사,

경원의 충렬사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정무(貞武)입니다

 

 

 

최진립장군의 묘역에 있던 장군석(무인석) 4점 중에서

 상단에 있던 1점과 하단에 있던 2점을 기단석은

부러진체 절취해 갔다고 합니다

 

 

 

 

묘역에 있다가 도난 당한 하단의 장군석(무인석)입니다

종가에서는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종가에는 유물과 유품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고 합니다만

 

근자에 얼마간 남아 있던 고문서와 목판들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모두 옮겨서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유품 중에는 장군이 직접 사용하였다는 지휘도가 있었는데

 길이가 85cm 칼자루의 길이가 15cm 이며

 

 

 임진왜란 때 장군들이 사용하던 칼 중에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칼은 이순신장군의 칼을 비롯하여

서너점 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신라의 전신인 진한 6부촌 의 하나인 돌산 고허촌의

 대인 소벌도리를 득성조(得姓祖)로 하는 

경주최씨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때

 

천하제일의 명문가 로 중국에 까지 문명을 떨친

 고운 최치원 선생을 시조로 합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17대 손인 정무공

최진립(1568 - 1636)장군은

 

경주시 현곡면 구미동에서 태어나서 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의 가암촌에 정착하면서

가암파의 파조가 됩니다 

 

 

 

 

이 곳 내남면 이조리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께서는

사성공파로 가암촌에 정착하면서

이조종파(가암파)의 파조가 됩니다만

 

 

 경주 최부자집으로 이름난 교동 최부자댁도

셋째 집으로 이 곳에서 교동으로

옮겨가게 된 것입니다  

 

 

 

 

신사명변(愼思明辨)이라고 중용에

 나오는 글이 있습니다 

 

 

 

 

사랑방으로 들어 가기전 외부인들이 출입하던 방문으로

 디딤돌이 생각나서 올려 봅니다

 

 

 

 

충의당은 앞면이 4칸이고 옆면은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왼쪽 2칸은 온돌방으로 하고 오른 쪽

2칸은 마루로 하였습니다

 

 

 

 

 

 어릴 적에 소죽을 쑤어주던 그 가마솥과

 아궁이가지금도 눈에 생생합니다

 

큰 소와 작은 소 두마리의 식사인 소풀하고

소쭉 쑤어주는 것은 저의 담당

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금수강산이라던 우리 국토가 벌거벗었던

그 때 그 시절 산림녹화와 산림애호를

 외치면서 집집마다 아궁이 개량사업을

 하던 시절의 불조심 아궁이입니다 

 

 

 

 입춘대길 (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라는 입춘첩이

출입문의 양쪽 문짝 위에 붙여져 있습니다

 

 

 

 

 평소에는 삼문으로 출입을 하지 않고 평소에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작은 대문입니다

 

 

 

 최진립 장군이 용인 험천에서 중과부적으로 몰리자

사람들을 둘러 보며 너희들은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 없다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죽을 것이다

라고 하며 계속 활을 쏘면서 분전했다고 합니다

 

 

 

 

난이 끝난 뒤 시신을 수습할 때 장군은 온 몸이

화살을 맞은채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전황이 불리해 지자 자신을 평생

따르던 두종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던

충노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비석의 앞면에는  노자수불능전독불능사야

(老者誰不能戰獨不能死耶)라는 글이 있고

 

뒷면에는

 내 비록 늙어 잘 싸우지는 못할지언정

싸우다가 죽지도 못하겠는가?

 

라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병자일기에 있는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최진립 장군의 연세가

칠십이라충청감사 정세규가 후방을 지켜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장군은 비장한 목소리로 내 비록 늙어 잘 싸우지는

 못할 지언정 싸우다가 죽지도 못하겠는가?

라고 하면서

 

말을 달려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던 중 용인 험천에서

적의 대군을 만나 격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셨다고 합니다

 

 

 

 

  인조대왕어필제문(仁祖大王御筆祭文)이 충의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크게 새겨져 있습니다 

 

 

 

 

최진립 장군은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셨고

 

용산서원에 제향과 충렬사우라는 사액까지

내려지는 최고의 기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종가에서는 노거수 앞에 장군의 얼을 기리는 기마동상

 건립을 추진 중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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