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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답사

중국 상해.장가게, 항주 여행기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05. 7. 3.

중국 상해.장가게, 항주를 다녀와서

 

일시 : 2004. 01. 26 - 01.30

행선지 : 중국(상해․장가계․항주)

주관여행사 : 경주월드투어

같이 한 사람 : 류용태, 이대철, 최재모, 이의관, 하성찬 부부 동반

여행경비 : 여행사 지불 1인당 790,000원(가이드 비 포함, 단 회사 인솔자 가이드비 200,000원 별도 지불)

 

 

 

 

   비단 장수 왕서방의 나라, 항상 내 조상을 괴롭혀 온 나라,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과거에는 우리보다 앞선 문화였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나라,

미우나 고우나 우리 이웃일 수 밖에 없는 나라,

세계의 중심임을 자처해서 나라 이름도 ‘중국’이라고 오만을 부리는 나라.

내가 지금까지 중국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다.

 

그 중국으로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것도 세계에서 자연 경관이 가장 수려하다는 장가계와

중국 제일의 국제 도시 상해, 그리고 지상 낙원이라는 항주를 향하여.

  10시 반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수속을 마치고 11시 10분 2층으로 올라가서 면세점을 둘러보고

12시 탑승구를 빠져나가 12시 30분 상해로 향했다.

비행기는 중국 동방항공. 국제선 비행기로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이륙을 하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데 귀가 멍해진다. 하품을 한 번 하고 밖을 내다본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넓은 김해평야 여기저기 비닐하우스가 보인다. 이어 펼쳐지는 부산 시가지, 골짜기를 따라 형성된 취락,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남해의 작은 섬들이 무척 정겨워 보인다.

한가로이 떠 있는 배 또한 평화롭기만 하다. 저 멀리 아득히 멀어지는 육지. 보이느니 대부분이 산이다.

우리국토 면적의 7할이 산이라지만 실제 공중에서 보면 거의 9할이 산으로 보인다. 엷은 구름들이 비행기 아래로 흐른다.

하늘이 아래에 있다. 순간 비행기가 거꾸로 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12시 45분 기내식이 나오기 시작한다.

물티슈가 먼저 나오고 이어서 조미가 된 땅콩이 든

小食品이 한 봉지씩 배부되고 식사가 제공된다.

김치와 조그마한 고추장 1통, 버터와 빵과 도시락이 나왔다.

도시락 뚜껑을 여니 시래기와 닭고기가 밥과 함께 들어 있다.

지난 번 아시아나 항공으로 태국에 갈 때에 비하면 부실한 편이다.

 

비행기가 갑자기 비포장 길을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기류가 고르지 못한 탓이란 안내 방송과 함께 현재 상해의 기온은 영상 3도라고 한다. 중국어, 영어에 이은 한국어 안내 방송이다.

물론 한국 부산을 출발했다고는 하지만  외국 국적의 비행기에서 우리말 안내 방송을 들으니 절로 어깨가 으쓱해진다.

실제 탑승객의 대다수는 한국 관광객인 듯 대화하는 말을 가만히 듣자하면 한국말 일색이다. 계속 신문에 눈을 떼지 않고 있으려니 멀미가 날 것 같다.

창밖을 내다보니 온통 구름이다.

 

위도 아래도 구름. 그 속을 비행기가 나는 것이다.

저 아래 희뿌연 구름 아래로 작은 섬이 보이는가 하는데 3-4척의 배가 줄을 지어 항해를 하고 그 건너편에 육지가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육지가 아닌 구름 이었다.

조금 후 다시 보니 제법 큰 섬이 보인다.

그런데 이 섬은 해수면과 높이가 거의 같아 마치 천을 물 위에 띄워 놓은 것 같다. 드디어 중국 대륙이 완연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 나라 서해안과 마찬가지로 갯벌이 넓게 발달되어 있다.

 

이어 반듯하게 경지 정리가 된 논밭, 주황색 지붕을 가진 똑 같은 모양의 집들이 무척 깔끔하게 보인다.

그런데 집  주위에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리도 흔한 차도 사람도 보이지를 않는다. 마치 유령의 집 같다.

그리고 산이 보이지 않는다.

끝없이 벌판이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시계를 보니 2시 5분전 우리나라와는 1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현지 시각으로는 12시 55분이다. 浦東國際空港이라는 붉은 색 글씨가 낯설게 느껴진다.

공항 규모는 나라의 규모에 걸맞게 대단하다.

나중에 현지 가이드로부터 들은 내용인데 이 포동공항은 아직도 공사가 진행 중이며 2005년 최종 완공되면 연간 7천만 명의 승객과 5백만 톤의 화물처리능력을 갖추게 되어 아시아 1위의 공항이 될 것이라고 한다.

상해에는 또 다른 하나의 공항이 있는데 홍교공항(虹橋空港)이다.

이 홍교공항은 중국 3대 공항의 하나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해 유일의 공항이었으나 현재는 국내선만 운항을 한단다.

공항 내는 한산하다. 붉은 색의 등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자세히 보니 등의 전체적인 모양이 ‘春’字 모양을 하고 등 아래에는 한자로 봄 ‘춘’자가 새겨져 있다. 우리의 설날을 이곳에서는 춘절이라 하고 연중 가장 큰 명절이다.

공식적으로 3일간의 연휴가 있지만 지방별로 10일에서 2주 이상 많게는 한달 가까이 쉬기도 한단다.

 

 

 

1시 55분 출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현지 가이드가 우리 일행을 맞이한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가 고향이고, 이민 3세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현지 관광버스에 오르자 마자 북한 말의 억양으로 안내를 시작한다.


“상해는 중국 4대 직할시(북경, 천진, 중경)의 하나로 면적은 6,340.5㎢로 서울특별시의 10배, 인구는 1300만을 넘는다.

상하이의 옛 이름은 후 즉 호(삼수변에 집 호). 고기잡는 통발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현지 차량 번호판에 첫글자는 ‘호’로 시작한다.

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상하이가 세계에 알려진 것은 아편전쟁 이후. 영국, 미국, 프랑스가 상하이 와이탄(외탄)지역을 조차(租借)하면서 국제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현재 정치를 제외하고(정치는 수도인 북경) 모든 면에서 상해가 제1의 도시로 북경에 비해 10년을 앞선다.

이 곳에는 한국 기업도 전체 외국 기업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황포강을 중심으로 포동과 포서로 나뉘는데 포서는 구시가지, 포동은 신시가지이며, 고층 건물은 외국인이 설계를 하고 똑 같은 건물이 없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 보이는 건물은 하나같이 멋지게 보인다.

빌딩 숲 사이로 허름한 건물도 보인다.

 

 

 


15시 첫 관광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했다.

과거 프랑스 조계지 내에 위치해 있으며 우선 엄청난 관람객에 놀라고, 그 규모의 초라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이 청사는 마당로(馬當路)에 있는 3층 벽돌집으로, 1926년부터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 직후까지 사용하던 곳이다.

매우 낡고 도  로 옆에 위치해 있어서 언뜻 보면 쉽게 지나쳐 버릴 수도 있을 만큼 초라하다. 짧게 비디오 시청을 하고 각 층의 관람에 들어갔다.

 

1층에 바로 회의실 있고, 그 뒤로 주방이 있다.

2층에는 이승만, 박은식, 이동녕 등이 사용하던 집무실이 있으며, 3층에는 요인 숙소와 전시관이 있다.

아무리 망명정부라 해도 한 나라의 정부 청사치고는 너무 초라하여 그 당시의 상황을 가히 짐작하게 한다.

청사 내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위 사진 중 건물 바깥은 본인이 디지털 카메라로 직접 촬영한 것이고, 김구 선생의 흉상은 인터넷에서 복사해온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그 현장 홍구공원으로 향했다. 길이 비좁고 차량도 사람도 그리 붐비지 않는다.

길가에 반갑게도 삼성 에니콜 휴대폰 광고 전광판이 보인다.

초라한 아파트 밖에는 대나무에 빨래를 해서 걸어 놓은 옷가지가 어지럽다.

밖에 빨래를 늘어 놓으면 벌금을 부과한다는데도 근절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곳은 습기가 많고 실내에 난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은 그렇게 해서 빨래를 말릴 수 밖에 없단다.

어저께 눈이 왔다는데 길가의 가로수 잎이 푸르다.

 

포서에 침대 하나를 놓고 사느니 포동의 주택 한 채를 부러워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이 곳 포서지구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땅 값이 엄청나게 비쌌다고 한다.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이 곳 포서의 경우 10㎡의 비좁은 집에 2-3세대가 살며 방에는 3층 침대를 사용한다나.

그러나 지금은 형편이 역전되어 포동지구가 훨씬 생활수준이 높다. 얼마를 가다하니 기아자동차 간판이 보인다.

 

15시 20분 드디어 홍구 공원에 도착. 그러나 지금은 안타깝게도 공원이름이 노신공원(魯迅公園)으로 개칭이 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의거 현장으로 기억되는 곳으로, 윤의사의 항거를 기념하는 기념비와 매정(梅亭 : 메이팅)이란 이름의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그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초라하기 그지 없다.

                                        

 공원 이름에 걸맞게 이곳에는 노신의 묘와 기념관   이 위치해 있다.

기념관은 노신의 고향인 소흥성의    건축 양식을 따라 지어졌으며, 기념관 안에는 작가의   필체가 담긴 원고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 직접 관람하지는 않았다. 중학교에    다닐 무렵 읽은 ‘아Q정전’이라는 노신의 작품이 생각   난다.

안타깝게도 윤봉길의사의 의거 현장은 노신의   무덤이 되어 있으며 그 앞에는 모택동이 직접 쓴 ‘魯 迅先生之墓’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15시 50분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 이홍화 양은 말씨 자체는 그리 칭찬하고 싶지 않지만 관록은 상당한 듯 하다.

중국의 역사, 각 지역의 특성 등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 중 중국의 4대 미인으로 서씨, 왕소군, 초선, 양귀비를 꼽는다며 이들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를 재미있게 한다.

 

 

그 내용을 옮겨 둔 것이 부실하여 인터넷을 통해 검색한 내용을 덧붙여 본다.


중국 고대 소설 중에 자주 「침어낙안(浸魚落雁)의 용모,  폐월수화(閉月羞花)의 아름다움」이라는 말로 여인의 아름다움을 형용한다.

원래 침어(浸魚),  낙안(落雁),  폐월(閉月),  수화(羞花) 는 고대의 사대미인 즉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를 가리키는 말이다.

각각의 칭호에는 재미있는 고사가 있다.

 

침어(浸魚) -  서시(西施)

서시는 춘추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이다. 

어느 날 그녀는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었다.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서시는 침어(浸魚)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낙안(落雁) -  왕소군(王昭君)

한(漢) 대의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이다.

한 원제는 북쪽의 흉노를 다독거리기 위해 그녀를 선발하여 단우씨와 결혼을 하게 하였다. 집을 떠나가는 도중 그녀는 멀리서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를 보았다.

고향생각이 물밀 듯 밀려와서 금(琴)을 탔다.  한 무리의 기러기가 금(琴) 소리를 듣고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에 왕소군은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폐월(閉月) -  초선(貂蟬)

초선은 한(漢) 헌제(獻帝)때의 대신 왕윤(王允)의 기녀이다.(왕윤은 그녀를 딸과 같이 대했다고 함.)  그녀는 용모가 명월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어느 날 저녁에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웠다.

왕윤이 말하기를 "달도 내 딸에게는 비할 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 고 하였다.

이 때부터 초선은 폐월(閉月)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수화(羞花) -  양귀비(楊貴妃)

당대(唐代)의 미녀 양옥환(楊玉環)은 당명황(唐明皇)에게 간택되어져 입궁한 후로 하루 종일 우울했다.

어느 날 그녀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드렸다. 함수화는 바로 잎을 말아 올렸다.

당명황이 그녀의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 에 찬탄하고는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고 칭했다


다음 코스는 해외 관광의 가장 큰 병폐 쇼핑이다.

명주 솜과 비단 등을 파는 곳으로, 간단한 제조 공정 관람을 마친 후 패션 쇼도 보여준다. 모델들이 우리 나라와는 달리 인물이 빼어나지 못하고 세련미가 없다.

그래도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인 아가씨, 긴 치마의 양 옆이 터져 허벅지를 드러낸 아가씨 등이 실크 옷으로 멋을 부린다.

몇몇 교장부부는 명주 솜과 이불 카버 등을 사는 듯하나 우리 부부는 관심이 없어 그냥 둘러보기만 했다.

쇼핑을 끝낸 후 술을 한 잔 곁들인 한식으로 식사를 했다 그런대로 먹을만 했다.

특히 술은 50도를 넘는 독한 술이다.

5시 45분 장가계로 가기 위해 포동 공항으로 향했다.

장가계까지는 비행기로도 2시간이나 걸릴 정도의 원거리이다.

가는 도중에 가이드 아가씨의 입놀림은 계속 된다.

 

문화혁명 당시에 남자의 이름자에는 그 글자를 따서 ‘文’과 ‘革’자를 흔히 사용했으며 우리나라와 수교 후에는 한류 열풍이 불어 여자 이름의 경우 특히 가수 주현미의 이름에서 따온 ‘賢’자와 ‘美’자를 많이 썼다고 한다.

 

앞으로 가게 될 장가계가 있는 호남성은 특히 모택동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특히 산수 경관이 뛰어난 두 지역 중 계림(桂林)이 다소곳한 여성에 비유한다면 장가계는 근육질의 남성에 비견된다고 한다.

 

시가지를 벗어나면서 차량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땅거미가 지는데 길가에 보이는 아파트에 불이 없다.

모두들 신축 아파트라 그렇다는 둥 일터에서 돌아오지 않아서 그렇다는 둥 나름대로 주장을 편다.

 

포동공항까지 가는 도로는 왕복 8차선의 넓은 도로이다.

차선에 따라 다닐 수 있는 차가 정해진 것 같다. 안쪽 차선부터 객차(버스를 의미하는 듯), 소형차, 대형차(트럭?), 소대형차로 차선이 구분되어 있고 제한 속도도 80-110Km로 되어 있다.

 

걸핏하면 우리나라 화물차 운전자들이 저속으로 달리면서 준법투쟁을 하는데 이 곳에서는 준법 투쟁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

퍽 합리적으로 제한 속도를 규정하고 있다.

 

공항으로 진입하는 도로 옆에 가로등이 참 멋지다. 멀리서 불꽃놀이를 하는 모습도 보인다. 아직 춘절 명절을 즐기는 것이리라.

19시 5분 기내에 올라가니 한국인 일색이다. 국내선 비행기를 탄 것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중국어, 영어에 이어 한국어로도 안내 방송을 하고 있다.

 

말씨로 보아 전라도 쪽 사람들이 특히 많은 것 같다. 이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내식이 나왔다. 가지덮밥에 오이장아찌가 전부이다.

 

저녁식사를 한지 얼마되지 않아 밥을 먹지 않고 그대로 물렸다.

앞 좌석에 앉은 젊은이가 지나치게 떠든다. 참다못해 좀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니 그제서야 목소리를 낮춘다.

공중도덕을 꼭 지킬 수 있도록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교육을 잘못 시켜온 내 탓이다.

지금 장가계의 바깥 기온은 0도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위도에 비해 내륙이라 추운 듯 하다.

 

21시 10분 장가계 공항에 도착했다. 검색대에서 가지고 간 소주를 압수 당했다. 생글생글 웃으며 어색한 발음으로 “소주, 소주”하기에 그냥 농담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솔 가이드 박양이 뒤처리를 하겠다며 먼저 나가라기에 그냥 나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소주를 찾기 위해 돈을 주어도 받지 않더란다.

관리들이 생각만큼 부패하지 않은 듯 하다.

소주는 빼앗겼지만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놈들 그 소주로 자기네들끼리 한 잔 하는 것은 아닐는지?

 

21시 40분 장가계 현지 관광버스에 올랐다.

동남아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곳 중국에서도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하면 반드시 현지 가이드가 안내를 맡도록 되어 있단다.

강양이라는 조선족 출신 아가씨와 비디오 촬영을 하는 현지인 아가씨가 동승을 했다.

관광객이 요구를 하지 않아도 비디오 촬영 아가씨도 필수적으로 관광객과 동행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듯하다.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약 15분 정도 소요될 것이라고 한다.

미인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잘 생긴 가이드 아가씨.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맏딸 은영이와 동갑이다.

먼저 이곳 날씨를 애기 얼굴과 같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맞혀 보란다.

모두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울다가 웃는 어린애처럼 변화가 심해서 그렇게 말한다고 한다. 또 장가계에는 중국 전역에서 그렇게 흔하게 볼 수 없는 자전거를 볼 수 없는 이유가 지형의 경사가 심하고 또 1元만 지불하면 시 외곽까지 갈 수 있을 정도로 택시 이용이 편해서란다.

이곳에 거주하는 원주민은 土家族이고 그 외에 한족을 비롯해 20여 소수 민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 조선족도 300-400명 살고 있는데 그 중 200명이 가이드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호텔에 당도 했다. 張家界國際酒店 Jangjiajie Internation Hotel 이라는 붉은색 네온이 우리를 반기고 있다. 4성급 호텔이다.

이곳에는 4성급 호텔이 두 군데 있는데 이 호텔이 최근에 지어서 시설이 좋고 다른 하나의 호텔은 3성급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들어가 보니 새로 지은 건물이라 깨끗하기는 하나 썩 시설이 좋은 것은 아니다. 이곳에 숙박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우리 한국 사람이다.

 

장가계를 여행하는 동안에 한국인을 제외한 외국인을 거의 볼 수 없었다.

한국인 관광객이 전체 외국인 관광객의 93%나 된다고 한다.

야말로 한국인 천지였다. 엘리베이트 입구에 福자를 거꾸로 붙여 놓았다.

알고보니 복이 막 쏟아지라고 그렇게 붙여 둔단다.

 ‘복을 받으려면 福자를 거꾸로 붙일 것이 아니라 복받을 짓을 해야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간단하게 세수를 마친 후 프론트 옆 Tearoom에서 인솔자인 박양이 사준 과일, 공항에서 빼앗기고 일부 남은 소주, 호텔 내의 매점에서 56元을 주고 산 죽엽청주(150元짜리 죽엽청주도 있었음)를 곁들여 간단하게 한잔을 하였다.

특히 죽엽청주는 알콜 농도가 45도로 대단히 독한 술이지만 향이 좋아 그런대로 마실만 했다.

 

 

 

 

 

2일차

7시에 식사를 하러 내려가 보니 식당이 벌써 가득 찼다. 모두가 한국인이다.

가까스로 자리를 잡았다. 독특한 향료를 사용하여 우리 구미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에 아무 음식에나 손을 댈 수 없고 실제 음식을 먹어보니 우리네 식성에 잘 맞지 않다.

다녀 본 호텔 음식 중 제일 못한 편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먹어두어야 한다.

흰죽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8시 8분 호텔을 나와 장가계로 향했다.

‘人生不到張家界 百歲豈能稱老翁(豈자는 어찌 기) 사람이 태어나서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면 장가계에 가지 않았다면 헛살았다는 말이리라.

차 중에서 들은 강양의 안내를 대충 요약해 본다.


이 곳은 약 3억 8천만년 전에는 바다였으나 육지로 융기가 이루어진 후 침식과 자연붕괴 등으로 지금의 깊은 협곡과 기이한 봉우리의 절경을 이루게 되었으며, 원래 지명은 大庸[(대용), Dayong]이었는데 1982년 9월 25일에 국가로부터 “장가계국가삼림공원”으로 지정되고, 그 후 1988년에는 국무원에서 국가급중점풍경명승구로서 지정하였으며, 1992년에는 세계자연유산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1994년 4월 국무원에서 장가계시로 승격시켰다. 張家界란 장씨의 마을이라는 의미로 한 고조 때 유방을 도와 천하를 평정한 책사 장량(張良)이 터를 잡은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장가계국가삼림공원, 천자산자연보호구, 삭계곡자연보호구의 3개 풍경구로 알려진 이곳 장가계는 오염되지 않은 생태계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아직 외국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무릉원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을 방문하고 간 사람들은 장가계의 웅대하면서도 아름답고 기이한 산세에 넋을 잃으며 이 때문에 수많은 학자, 전문가들은 “대자연의 미궁”, “지구기념물”이라고 한다.


버스는 백장협을 지나고 천자산으로 향하고 있다.

주위의 즐비한 산들이 범상치 않다. 웅장하고 화려하다.

길가에 차를 좀 세우고 보고 가자고 했다. 그러나 이 곳은 도로 폭이 좁고 굴곡이 심해 주차가 금지 되어 있고, 또 지금 보는 이곳의 경치는 별 것이 아니란다.

가이드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 경치가 별것이 아니라니!

 

드디어 매표소에 도착했다. 아직 춘절 명절기간이라 중국인 관광객이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이고, 또 한국인 관광객 수도 엄청나게 많다.

길게 줄을 서 있는데 한참 후 매표소에 갔던 가이드가 신용카드 형태의 카드를 1장씩 나누어 준다. 이 카드로 입장을 하는데 입구에서 카드를 넣은 후 지문으로 확인을 해야 한단다. 카드를 반납하지 않고 내일도 같은 카드로 입장을 하는데 지문으로 동일인임을 확인한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관람을 하는데 버스를 9번 갈아타야만 한단다.

 

희한한 곳도 있다고 생각하며 일단 버스에 올랐다.

한참 계곡을 오르다 보니 작은 터널이 나온다.

차선이 한 개 뿐인 좁은 굴로서 내부는 바위를 뚫어낸 거친 면이 그대로 들어나 있다.

굴을 막 지나는데 상여가 지나간다. 영구차는 꽃으로 장식을 하고 그 앞에 화려한 지우산이 씌워져 있다. 십 수명의 악대원이 탄 차가 뒤따른다.


버스 안에서는 중국어 안내 방송이 나온다.

한국인이 많이 탑승을 한 사실을 고려하여 한국어 안내 방송도 병행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길가에 불럭으로 지은 집이 있는데 기왓장이 이상하게도 얇고 또 작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지붕을 그릴 때 꽤나 고생을 하겠다고 옆에 있는 최교장과 농담을 주고 받았다. 더러 공터에 농구 골대도 보인다. 농구를 즐기는 모양이다.

 

천자산 입구에 도착해 300여개의 계단을 올라가니 케이블카를 타는 곳이    나타난다.

케이블카는 길이 2,084m로 해발 1,250m인 천자산 정상까지 7분 정도 걸린단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 위로 오르    는데 골짜기가 까마득하다.

 

아찔해서 시선을  아래로 향할 수가 없다.

가끔가다 군데군데 케이블의 지주가 있는 곳을 지날 때는 덜컹거리기도 한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 앉기도 한다.

깎아지른 바위가 수십 길이 넘고, 수분도 영양분도 없는 곳 그 바위 위에 신기하게도 나무가 자란다.

 

봉우리 마다 흰 눈을 이고 있다.

산이 꽤나 높은가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밤, 고구마, 엿 등을 들고 잡상인이 몰려 온다. “천원! 천원!” 우리 말로 외친다.

그만큼 우리 한국인이 이 곳을 많이 찾는 모양이다. 일행 중 밤을 사서 나누어준다. 우리나라 재래종 밤과 같이 아주 작다.

잘 굽혀졌고 맛이 좋다. 나가면서 보니 냄비에 아주 작은 돌과 함께 밤을 굽는 것이었다.

 

‘朗賢旅遊’라고 쓴 중국인 여행단이 지나간다. 현명한 사람들의 유쾌한 유람단이라는 의미이리라. 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무척 시끄럽다.


선녀가 꽃을 바치는 형상을 한 선녀헌화, 옛날 전쟁에서 진 후 황제가 쓰던 붓을 던졌다는 전설이 있는 어필봉, 과연 흙이 없는 깎아지른 바위 봉우   리에 소나무가 자라 붓을 거꾸로 꽂아 놓은 듯하 다.

그리고 또 천대서해를 보면서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하고 하룡공원 쪽으로 내려 왔다. 일 부 관광객은 짚신을 신고 있다.

눈이 쌓인 길을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신은 것이다.

그리고 보니 주위에 있는 작은 기념품 가게에 짚신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룡공원은 중국의 10대 원수 중의 한 명인 하룡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공원으로 특히  하룡장군의 동상이 엄청나게 크다.

높이가 6.5m이고, 무게가 9t이나 된다고 한다. 

 

 글자는 1995년 3월 강택민 총서기가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주위 관광을 마친 후 15분간 차량으로 원가계(袁家界)에 닿았다. 으뜸 元자를 써서 경치가 으뜸인가 했더니 원숭이 원자를 쓴다기에 원숭이가 많으냐고 물으니 지금은 겨울철이라 볼 수가 없단다.

동양의 산수화가 그대로 펼쳐진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다. 그냥 절경이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걸린 천하제일교는 높이 300m의 커다란 두 개의 바 위를 이은 것으로 넓이 2m, 길이 20m의 천연석교이다.

아마 산신이 넘나드는 다리이리라. 수십 개의 기암이 우뚝우뚝 솟아 거대한 화원을 이루는 후화원(后 花園), 너무 경관이 수려해 사람의 혼을 앗아간다는 미혼대(迷魂台) 등. 어찌 산수가 이 보다 더 멋질 수 있으랴.

 

  도중에 판자에 ‘김해 허씨, 김해 김씨, 함안 조씨’  등을 서툴게 써 둔 한 노점에 들렀다 우리 교포가 운영하는 곳이다.

꿀차, 커피, 간단한 기념품 등을 팔고 있다.

일행 모두 꿀차를 한잔씩 마셨다.

차를 기다리며 군밤을 사 먹고 있는데 어떤 중노인 한 분이 젊은이 두 사람이 맨 가마를 타고 올라온다.

대단한 효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봉호수에 갈 때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13시가 조금 지나서 백룡엘리베이터에 도착했다.

높이는 326m. 산을 따라 우뚝하게 세워진 엘리베이터 중 위쪽의 170m는 투명유리창을 통해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고 아래 156m는 바위 속 수직동굴로 되어있다.

운이 좋아 창가를 차지했다.

그런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하다. 오금이 저려온다.

대단한 기술이다.

엘리베이트 하면 으레 고층 건물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절벽에 이런 거대한 엘리베이트를 설치할 수 있었을까?

 

늦은 점심을 경복궁이라는 한식당에서 한식으로 식사를 했다. 반주를 하고자 술 종류를 물으니 鬼酒라는 술이 있는데 이곳 호남성 최고의 술이란다.

 

가격이 4만원으로 만만치 않지만 이 때가 아니면 언제 다시 맛볼 수 있으랴. 그런데 술맛이 우리 구미에는 맞지 않다. 하지만 비싸고 귀한 술이라는데 한 잔 할 밖에.

 

점심을 먹고는 수정, 진주 등 토산품을 파는 곳으로 쇼핑을 갔다. 일행 중 더러는 진주 목걸이 등을 사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3시를 지나 보봉호수로 향했다.

도중에 포항시내 교장 일행 부부 5-6쌍을 만났다.

그 중에는 지난해까지 아내가 재직하고 있는 청림초등학교에 근무한 교장 선생님도 계셨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길가에는 오전에 원가계에서 본 가마가 있고 가마꾼이 “2만원” “2만원”하면서 호객을 한다. 아하! 원가계의 그 가마를 맨 사람들이 효자가 아닌 가마꾼이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동행한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들은 가마를 태워주고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면 만원이 아니라 메고 간 사람이 각각 2만원 즉 4만원을 요구해서 시비에 휘말리니 타지 말라고 한다.

 

25분 정도 걸어서 호수에 도착했다.

 

 보봉호수는 협곡에 댐을 막아 인공적으로 만든   호수인데 주변의 산세와 아주 잘 어울리고 실제로   막은 댐이 몇 미터 되지 않아 눈에 잘 띄지를 않기 때문에 자연적인 호수와 같다. 우리는 이 곳에   서 전기모터로 운행하는 유람선을 조금전 만난 포항교장단 일행과 함께 타고 호수를 유람하게 되었다.

 

잔잔한 수면과 동력이 전기모터라 소리 없이  흘러가는 유람선 주변에 산들이 보봉(寶峯)이라는   글자에 걸맞게 절경(絶景)이다.

 

왕복 40분간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

특히 토가족 청년과 아가씨가 화답해 부르는 노래도 무척 청아하게 들렸다. 내려가는 길은 다른 쪽 길이었다.

이 곳뿐 아니라 장가계에서는 관광을 하는데 들어간 입구로 되돌아 나오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우리네 인생길이 되돌아 올 수 없는 것처럼.

관광버스에 승차를 하고 다시 쇼핑 길에 나선다.

 

잦은 쇼핑에 대해 가이드가 무척 미안해 한다.

가이드들은 쇼핑을 한 후 확인을 받아 두어야 한단다.

이번 쇼핑은 우리 동포가 경영하는 곳으로 이 사람은 중국 내 우리 동포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다른 곳은 몰라도 이 곳은 정말 믿을만한 사람이란다.

 

사향으로 만든 약제, 러시아 산 차가버섯 등을 팔고 있다.

열심히 설명을 하지만 사는 사람이 없다.

나중에 류교장이 일행 대표로서 마지못해 차가버섯을 샀다.

이어 한 시간 동안 발맛사지를 받으러 갔다.

약제를 푼 물에 발을 담근 후 맛사지를 하는데 종일 강행군을 한 발의 피로가 다소 풀리는 듯 했다.

호텔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3일차

6시 모닝 콜에 일어났다 벌써 아내는 세면을 끝낸 후였다.

항상 내가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 거저 고마울 따름이다.

6시 40분 역시 호텔 내에서 뷔페식 식사를 했다.

흰죽과 야채 중심의 식사를 하였다.

오늘은 십리화랑, 금편계곡, 용황동굴 순으로 관광이 이어진다.

 

8시 10분 호텔을 출발하여 어제 입장하던 곳으로 가서 카드를 넣고 지문을 입력하니 입장이 허락된다. 9시 5분 전 이다.

가이드를 통해 알아보니 2일 동안 장가계를 관람할 수 있는 카드의 구입금액이 한화로 약 7만원정도라고 한다. 입장료로는 꽤 비싼 편이다.

 

관광객 수는 어제에 비해 현격하게 줄어 한산한 편이다.

날씨가 무척 쌀쌀   하다. 모노레일을 타고 길이가 약5Km로 10리   나 되는 화폭과 같다는 십리화랑을 왕복하는 관광이다.

모노레일은 창문이 없고 지붕만 덮여 있는 상태라 찬 바람이 그대로 들어온다.  

 

손가락 바위, 약초 캐는 노인, 한가족 바위, 자매바위 등 다양한 형상의 바위무리의 협곡   이 10리 화폭에 거침없이 그린 산수화를 방불케 한다.

30여분에 걸쳐 십리화랑 관광을 마치고 9시 50분 다음 행선지인 금편계곡으로 향했다.

금편계곡은 장자제삼림공원 동부에 있으며 신선계곡으로도 불리는 곳이다.

들머리에 두 개의 바위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금편암과 취라한이라 이름 붙인 두 개의 거암이 인간 세상을 굽어보는 듯하다.

고개를 치켜들어 쳐다보는 주위 풍경에 넋을 잃는다.

 

계곡 길 양편으로 깎아지른 멋진 바위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산수화 속으로 들어가 니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다.

통과하는데 약 2시간 30 분이 소요된다고 한다.

 

지구 상에서 가장 공기가 청청하다는 가이드의 말을 들으며 심호흡을 해 본다.

10시 30분경까지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오기로 했다.  

하지만 언제 또 이 곳에 와 보리. 일행을 뒤로 하고 혼자 빠른 걸음으로 계곡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관광객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쳐다보면 볼수록 수려하고 웅장한 자태. 그대로 산속으로 계속 들어가면 신선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위 경관에 넋을 잃고 한참을 오르다보니 되돌아가기로 한 시각이 지나고 있다.

하지만 욕심에 그대로 돌아갈 수 없어 한참을 더 들어 갔다.

길가에 남정(南亭)이라는 현판의 정자가 보인다.

정자에 앉아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는 다시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도중에 나를 기다리던 가이드를 만났다. 미안했다. 

11시 15분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용원(龍園)산장이라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가이드와 함께 우리 일행을 따라 다니며 촬영을 한 아가씨가 구입할 사람은 신청을 하라며 비디오를 보여준다.

 

당장 신청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식사를 마치고 12시 45분 장가계에서의 마지막 관광지 황룡동굴로 향했다.

굴 입구까지는 주차장에서 걸어서 약 15분쯤 되는 데 먹거리와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많다. 웬만한 것은 모두 ‘천원’이다.

이 곳이 중국인지 한국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다.

1983년 한 촌로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이 황룡동굴은 지각운동으로 이루어진 석회암 용암동굴로서 상하 4층으로 되어 있고, 아래 2층에는 4개의 시내가 흘러내리는 동굴이다.

수직고도는 160미터, 동구 길이는 15킬로미터이며, 이미 개발되어 있는 면적이 20헥타아르에 달한다고 한다.

동굴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자그마한 안내판에 써 놓은 글자를 보고 우리 일행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保持淸潔衛生’이라 이 무슨 망발인가 말이다.

그런데 중국 한자는 이제 우리가 흔히 쓰는 그런 한자가 아니다. 지나치게 약자를 많이 쓰기 때문에 무슨 글자인지 전혀 모를 글자가 수두룩하다. 위의 안내판에서 ‘청결’할 때 ‘결’자는 삼수변에 ‘吉’자를 ‘위생’의 위자는 얼핏보아서는 한글 ‘고’자와   같다.

그래서 ‘보지청결고생’이라니 아연할 수 밖에.  

 

동굴 안에는 수많은 기이한 종유석들이 천태만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종류석이 1mm 자라는데 10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높이   19.2m, 둘레 40cm인 ‘정해신침(定海神針)’이라는 석   순. 부러질 것에 대비해 중국 돈 1억원짜리 보험까지   들어놓은 귀하신 몸이란다.

 

동굴 내에는 계단이 2,500개나 되고 뱃길도 800m나 되어 보트를 타고 동굴 내를 유람하는 것도 운치가 있었다.

규모는 방대하나 우리 나라에 있는 석회암 동굴의 황홀함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돌계단 등에 조명이 밝지 못하여 안전 사고의 위험이 있다.

 

나오는 길에 아내는 어제 원가계에서 수제품 실내화를 사더니만 이 곳에서 또 길가에서 만들고 있는 실내화를 산다.

또 아들이 좋아한다며 손목이 잘려나간 장애인이 파는 군밤도 샀는데, 차 안에 돌아와서 보니 군밤 태반이 썩었다.

결국 이 군밤은 나중에 호텔에서 버리고 왔다.

 

 

 

마지막 쇼핑을 또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발맛사지를 그냥해 주고 약제를 파는 곳이다. 중․고등학생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한사람씩 맡아 발맛사지를 하며 우리말을 한두마디씩 지껄인다. 보기에 애처롭다.

그런데 살만한 약들이 못 된다.

한 사람도 구입하는 사람이 없어 나오는데 뒷통수가 근질근질했다.

5시 20분 우리가 숙박을 한 호텔이 아닌 다른 호텔로 가서 궁중 요리로 저녁 식사를 했다.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먹어본 음식 중에는 가장 좋았다.

그런데 궁중요리라는 이름값에는 못 미치었다.

 

식사를 마치고 6시 30분. 이제 장가계를 떠나 다시 상해로 간다.

낮에 보여준 비디오를 편집해서 예의 그 비디오 아가씨가 차에 동승을 해서 비디오를 나누어 주며 개당 3만원씩에, 그리고 또 코팅을 한 사진을 장당 3천원씩 한 가족 당 8장을 배부하며 구입하라고 한다.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틀 동안 우리 일행을 따라다닌 수고를 생각해서 비디오는 2만원씩 해서 5세트 10만원을 주고 구입하고, 사진은 모두 우리 카메라에 촬영이 된 것과 같은 것들로 필요 없으나 장당 천원에라도 팔라니까 그리하지 않겠다고 한다.

결국 사진을 판매하지 못한 이 아가씨 나중에 인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팔지 못한 사진은 회사에 반납을 하면 된다고 한다.

깨름직한 마음에 다소 위안이 된다.

차중에서 가이드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들었다.

언젠가는 우리 한국에서 소설을 써서 출판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말하며 연길에서 이곳 장가계까지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할 때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리고 가이드 팁은 당초 계약에 여행사에서 부담을 하게 되었지만 5만원을 봉투에 넣어 건네 주었다.

 

7시 30분 수속을 도와주고 출구로 나올 때까지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는 가이드가 무척이나 안스러웠다.

출국장에서 장가계 풍경을 담은 2개들이 CD 세트를 사서 모두 한 개씩 나누어 가졌다. 8시 30분 출발 예정이던 비행기는 9시 10분이 되어서야 움직이기 시작한다.

희미한 공항의 불빛을 뒤로하고 비행기는 어둠을 뚫고 하늘 높이 치솟는다.

기내식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빈약하다.

방금 저녁식사를 마친 후라 그대로 물렸다.

 

10시 47분 갈 때와는 달리 홍교 공항 도착.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서니 11시 20분이다. 이홍화양이 우리 일행을 맞는다.

5성급 인터콘티넨탈 호텔은 시설이 아주 훌륭했다.

벌써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각이다. 모두가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항주를 다녀와서 동방명주탑에 올라 상해 야경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무리가 예상되지만 계획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호텔로 올라와서 간단하게 세면을 마치니 새벽 한 시이다.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4일차

5시에 모닝콜 소리에 잠이 깨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벌써 아내는 준비를 끝낸 상태. 샤워를 하고 6시에 식당으로 내려갔다. 벌써 류교장 내외가 와 계신다.

음식이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조금 기다리다 식사를 했다.

일식, 양식, 중국식의 다양한 음식이 차려져 있다.

그러나 구미가 당기는 게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몇 가지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6시 45분 호텔을 출발 항주로 향했다.

 

상해 포동지구는 시가지를 개발하기 시작한지가 10년이라는데 빌딩이 숲을 이루고 우리나라 빌딩의 경우 성냥곽을 세워 놓은 것과 높이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똑 같은 데 이곳은 같은 모양의 건물이 없다.

하나같이 건물이 멋이 있다.

모두가 외국 사람이 설계를 했다고 한다.

정말이지 아름답고  품위가 있다.

중국이라는 나라를 국민들의 경제 수준, 의식 수준을 얕보았었는데 그게 아니다. 무척 부러웠다.

 

어느 덧 시가지를 벗어나서 고속도로를 달린다.

그런데 고속도로의 포장 상태는 엉망이다. 계속 차가 덜컹거린다.

주위에 산이 보이지 않는다. 끝없이 펼쳐진 벌판, 과연 큰 나라이다.

주위에 보이는 농가는 거의 2층 구조로 된 가옥이다.

그런데 집 옥상에 자그마한 옥탑방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집에는 안테나가 높이 세워져 있고, 또 어떤 가옥은 옥상에 동방명주탑 모양의 탑을 세워 둔 것도 있다.

옥탑방은 납골당이고 안테나는 피뢰침이라는데 글쎄다.

또 이 탑은 높이 쌓아 올림으로 하늘의 축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절강성(浙江省)의 성도(省都). 중국 6대 고도(古都)의 하나.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

‘천하의 문장은 항주에서 나온다’는 바로 그 항주에 드디어 도착했다.

 이 지역의 가이드가 차에 오른다. 이름이 장미향. 연변에서 온 우리 동포 아가씨다.

지방자치법에 의해 각 지역마다 별도의 가이드의 안내를 받도록 규정되어 있다고 한다. 관광객의 주머니에서 한푼이라도 더 털어내자는 속셈이다.

 

진눈개비가 약하게 흩날린다.

제법 번화한 거리를 지나는데 우리나라 차 소나타 택시가 눈에 띈다.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그런데 한 두 대가 아니고 제법 여러 대가 보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트렁크 뒤에 붙은 표식은 北京SONATA이다.

그래도 우리나라 기술에 의해 제조된 차이니 자랑스럽다.

이 곳 항주를 찾는 관광객은 내국인이 50%, 한국인이 30%,

홍콩, 일본, 미국 등 기타 외   국인이 20%정도라고 한다.

 

 

 

 

첫 관광지 영은사에 도착했다.

이름난 광광지 임에도 불구하고 진입로 정비가 잘 되어 있지 않다.

절입구에 들어서자 장애인의 구걸 행각이 인상을 흐려 놓는다.

서툰 우리말로 “아자씨 천원! 아자씨 천원!”을 외친다.

지난 해 대만 용산사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 곳에서도 절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향 연기가 절 안에 가득하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관광객이 많다.

절의 규모가 대단하다.

운림선사(雲林禪寺)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 있는데 청나라 강희제의 친필이라고 한다. 여기에 얽힌 일화가 재미있다.

 

청나라 강희제가 항주에 여섯 번이나 놀러 왔는데, 주지 스님이 강희제 더러 현판 글씨를 부   탁했다.

강희제는 간밤에 과음을 했던지 첫 글   자인 靈을 잘못써서 雲이라고 썼다고 한다.

난처하게 앉아있던 강희제를 보고 옆에서 한 신하가 그 다음 글자를 林이라고 넌지시 말해서 雲 林이 되었고 禪寺를 덧붙였다고 한다.

 

사천왕전, 대웅전, 약사전을 두루 둘러 보았다.

특히 경내에 들어갈 때 문지방은 부처님의 목과 같으니 밟아서는 안 되고 반드시 왼쪽 발이 먼저 들어 가고 나올 때도 역시 왼쪽 발이 먼저 문지방을 넘어야 한다고 한다.

사천왕전은 규모가 굉장히 크고, 가운데 달마상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선종의 시조인 달마대사를 모신 것이다.

달마를 이은 6대 혜능으로부터 우리 나라 선종의 뿌리를 찾는다고 한다.

선종의 중국 발원지가 조계산이기에 우리 나라에서 조계종이란 종단이 생겼다고 한다.

 

대웅전 뒤쪽에는 100여 보살들이 모셔져 있고, 약사여래전에는 월광, 일광보살이 사리보탑을 들고 있으며 주위에는 12지신상이 모셔져 있다.

 

약사전을 뒤를 돌아 나오는데 수직으로 된 금속판에 열심히 동전을 붙이는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신기하게도 실제 동전이 붙기도 한다.

동전이 붙으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단다.

건물을 나오면서 보니 오른쪽에는 한자와 일어, 왼쪽에는 영어와 한글로 된 안내판이 보인다. 공연히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10시 35분 또 쇼핑. 이번에는 민물 진주 양식 제품을 파는 곳으로 국영 상점이다.

실제 조개 껍질을 벌려 진주가 들어 있는 모양을 보여준다.

아내 더러 두 딸에게 줄 귀걸이를 사라고 했다.

나는 다른 방으로 나와 찻잔을 한 세트 샀다.

국내에 비해 가격이 엄청나게 싸다.

그런데 국영 상점이라는 이곳에서도 정찰제가 아니다.

관광지 주변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에누리가 생각보다 많이 되고 있다.

 

11시 20분 쇼핑을 마치고 상당히 규모가 큰 체육관 내에 있는 한식당으로 갔다.

식당 이름이 공교롭게도 장가계에서 한 번 들러 식사를 한 적이 있는 식당과 이름이 같은 경복궁 식당이다.

한식으로 식사를 마친 후 최고 품질의 차를 생산한다는 용정 차농원으로 향했다.

 

이 곳의 차 농민이 항주에서는 가장 부유하며 생산량의 60%는 국가에 세금으로, 나머지 40%가 농민 몫이라고 한다.

가이드가 용정차에 얽힌 전설을 들려주는데 대충 요약을 하면 이렇다.


용정(龍井)이라는 샘 때문에 용정사가 세워지고 이 절에서 차를 재배한 것이 오늘날 용정차의 시작이다. 용정사에는 숭장(崇章)이란 스님이 살았는데 그는 평범한 수행승이었다.

 

 스님은 부처님이 이루어 놓은 지혜를 다 얻지는 못하지만 조금이라도 얻으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하면서 한편으로 마음속은 중생들에게 회향하고픈 심정으로 가득하였다.

 

그리하여 산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전부 수행으로 생각하고 무엇이나 가리지 않고 하였다. 산중에 들어가 손수 차를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올리고는 절 앞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는 누구나 무상으로 목을 축이고 가게끔 배려하였다.

 

그런 보살행 하기를 수년이 지난 어느 날, 머리카락이 백설같이 흰 할머니가 흰 옷을 입고 어린 동자를 데리고 와서 문수보살 앞에서 공손히 예배하고 숭장스님에게 말하였다.

“나에게 용정차를 한 잔 보시(布施)하십시오.”

 

숭장스님이 용정차를 정성껏 달여 드리자, 할머니는 그 용정차를 마시고 나서 다시 한 잔을 청함으로써 거기에 응하였다.

그날 밤에 숭장스님은 기이한 꿈을 꾸었다. 문수보살이 나타난 것이다.

“그대가 달여 준 용정차 공양을 잘 받았네.

이제부터 그대의 원력(願力)대로 사바세상으로 나가 중생들의 어두운 가슴에 등불을 밝혀주는 일을 하게나.”

숭장스님은 꿈을 꾸고 난 후 하산하여 중생 교화에 진력하였다.


문수보살까지 혹하게 만든 용정차를 가공하는 실내에 들어서자 큰 솥에 실제 차를 덖는 시연을 하고 있다. 곧 바로 상품을 안내한 곳으로 들어갔다.

 

먼저 차를 한 잔씩 마셔보라고 한다. 용정차는 ‘色, 香, 味, 形’을 두루 갖춘 차의 사절(四絶)이라고 한단다.

계속 능숙한 우리말로 차를 따는 시기에 따른 품질, 제조 공정 등을 설명한다.

그리고 나서 실제 지통(紙筒)에 차를 담는 과정을 보여 준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차를 넣는다.

 

 1통에 3만원인데 3통을 사면 작은 통 1개를 덤으로 준다고 한다.

내가 제일 먼저 3통을 주문하자 몇 사람이 구입을 한다.

사는 사람이 많아 덤으로 또 작은 통 하나를 더 받았다.

13시 20분 차농원을 출발하여 육화탑(六和塔)으로 향했다.

육화탑은 전당   강(錢塘江)의 북쪽에 있다.

특히 이 전당강은 매년 음력 8월18일 무렵이면   항주만의 바닷물이 강 상류로 흘러와 큰 파도를 일으   키는 것으로 유명하단다.

육화탑(六和塔)은 겉보기에는 13층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7층짜리 8각탑이다.

 

이 탑은 전당강 높은 물결을 가라앉히기 위해 송나라 때에 창건한 것으로 당시에는 9층탑이었으나 그 후 파괴되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남송 때인 1163년에   다시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탑 안으로 들어가면 가운데 작은 방이 있고, 나선형   계단을 타고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전당강과 그 위로 길게 이어지는 전당강대교가 한눈에 바라다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다는데 실제로 올라가 보지는 못했다.

 

14시 5분 중국 10대 명승지 중의 하나인 서호에 도착했다.

중국 전역에는 ‘서호’라는 이름을 가진 호수가 무려 36개나 된다고 한다. 한참을 기다리다


유람선에 올랐다.

유람선은 밧데리로 운항을 한다고 한다.

지난 여름 무더운 어느 날 관광객이 에어컨을 틀어 달라고 성화를 부려 작동을 하였는데 그만 호수 가운데에서 밧데리가 방전이 되어 배가 멈춘 일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을 작동시키는 일은 없다고 한다.

 

유람선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 일행은 2층 뱃머리 부분에 독방을 차지 했다.

벽하나를 사이에 두고 뒤쪽에는 중국인 관광객이 승선을 했는데 어찌나 시끄러운지 가이드의 설명을 제대로 듣기 힘들 지경이었다.

배가 소리없이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전기로 움직이니 소음이 없어 좋고, 물고기들 스트레스 받지 않을 것이고 호수를 오염시키지 않아 더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호에 대한 가이드의 안내를 요약해 본다.


서호는 5.6㎢의 면적과 15km의 둘레를 가진 타원형의 호수로서 평균 수심은 1.8m이며, 깊은 곳은 2.8m정도 된다.

 

항주에 서호가 없었다면 항주를 갈 이유가 없을 것이라 할 정도로 서호는 항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많은 문인들이 사랑한 곳으로 특히 백낙천, 소동파가 즐겨 시를 읊었던 곳이다. 서호라는 이름은 중국의 4대 미인 중 하나인 서시에 비유하여 붙여진 것이다.

 

서호는 호수면을 가르는 백제와 소제라는 두제방으로 나뉘어져 외호, 내서호, 악호, 서리호, 소남호로 세분되는데 한결같이 아늑한 느낌을 준다.

서호에는 특히 경치가 빼어난 ‘서호10경’이 있다.

 

서호 유람을 마치고 길거리로 나서는데 자전거가 무척 많다.

그런데 자전거에 자동차와 같이 앞, 혹은 뒤에 번호판이 붙어 있다.

그리고 시내 번화가에는 궤도가 없는 전차가 다니는 것이 색다르다.

 

이제 상해로 돌아간다.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산이 보이지 않는다.

무진장 펼쳐지는 농경지. 우리나라 농산물이 수입개방에 쩔쩔 맬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현장이다.

신기하게도 땅거미가 지는데 주위 농가에 불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가 보이는 불빛도 희미하고 단 한 개의 창을 통해서만 흘러 나온다.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서? 근검 절약? 이유를 모르겠다.

포동의 휘황찬란한 불빛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3시간이 조금 덜 걸려 상해에 도착. 錦江酒家라는 식당에 들렀다.

그 유명한 상해 게요리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했다.

상해민물 게요리를 먹다가 비행기 시간을 놓친 관광객이 있을 정도로 맛이 기가 막힌다는 게요리. 그런데 막상 먹어보니 요리 재료가 되는 게는 민물 게로 살이 별로 없고 맛도 소문과는 영 다르다.

단지 게를 찍어 먹는 소스의 향이 상당히 좋다.

우리나라 영덕대개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관광여행사의 사장이 우리 일행을 위해 특별하게 베푸는 음식들이다. 중국 음식점 특유의 둥근 회전 테이블에 번갈아 나오는 다른 메뉴들은 비교적 우리 입맛에도 맞고 먹을만 하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20시. 밝은 구슬 東方明珠塔으로 향했다.

아편전쟁이후 외국의 조계가 되어 서구 열강이 세운 건물들로 이루어진 곳 외탄(外灘)의 맞은편 황포(黃浦) 강변에 우뚝 솟은 이 탑은 상하이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1994년 10월에 완공 되었다고 한다.

그 높이가 꼭 우리 경주 남산 높이와 같은 468m로 아시아 1위, 세계 3위로 TV 송신탑 겸 관광 타워로 사용하고 있단다.

탑은 크고 작은 11개의 구(球)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는 진주를 황포 강은 옥쟁반을 상징하는데 크고 작은 진주가 옥쟁반에 떨어지는 이미지를 표현했다고 한다. 휘황찬란한 불빛 그 높이에 일단 압도를 당한다.

 

탑 안에는 관광객들로 북적대었으나 관람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붐비지는 않았다.

초고속 엘리베이트를 타고 전망층에 올라 내려다 보는 상해 야경은 기가 막힌다.

 

인근에 있는 금무대하(金茂大厦). ‘금이 우거진 큰 집’이라는 의미이다.

1999년 세워진 상하이 대표적 건물로 88층. 중국 1위이자 세계 3위의 빌딩이란다.

무서운 나라이다. 그리고 큰 나라이다.

 

22시 호텔로 돌아왔다.

방으로 갔다가 류교장의 호출. 마지막 중국에서의 밤에 한 잔이 없을소냐?

호텔을 나왔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고 빌딩 숲 속에서 적당한  주점을 찾을 수 없어 다시 호텔 내에 있는 바로 들어갔다.

술값이 엄청나게 비싸다.

맥주 작은 것 1병이 45元. 그러니까 우리 돈 7천 원에 가깝다.

 한 병씩 마시고는 방으로 올라가다. 23시 30분 잠자리에 들다.


마지막 날

5시 모닝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6시 조반. 6시40분 포동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에 도착하여 면세점에 들러 보이차를 샀다. 예상했던 것보다 가격이 엄청 싸다.

국내에서 차 한 덩어리에 10만원이 넘는데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2만원 미만? 그동안 단 한번 사용하고 남긴 위안화와 달러로 계산을 했다.

9시가 지나 고국 부산행 비행기가 이륙한다.

 

상하이 교통대학 도서관에는 초나라 장왕이 말한 다음과 같은 고사성어가 붙어있다고 한다.

 

“3년 동안 날지 않았지만, 한 번 날면 하늘을 치솟고,

3년 동안 울지 않았지만 한 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세계 지도가 펼쳐져 있고.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 중국,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무서운 잠재력을 가진 나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대단하다.

그 큰 나라에 우리 기업이 진출하고, 韓流 열풍이 불며,

광광객이 호기를 부리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가 문제이다.

정신 차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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