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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스크랩] 신라 천년왕성 경주 월성 내부 발굴 시작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4.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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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왕성 경주 월성 내부 발굴 시작

12일 개토제, 중심부 C구역 시굴조사 착수

 

남쪽에서 본 월성

 

 

 

벚꽃이 어우러진 월성

 

신라사람들은 그들의 왕성이 달을 닮았다 해서 월성(月城)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반달 모양이라 해서 반월성(半月城)이라고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제5대 파사왕 22년(101) 봄 2월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이름하고 가을 7월에는 왕이 월성으로 옮겨가 살았다고 했다.

이후 적어도 기록만으로 보면 월성은 935년 신라 멸망에 이르기까지 정확히는 835년간 신라왕이 대대로 거주하는 왕성이었다. 월성은 어쩌면 천년 왕국과 운명을 같이하기에 흔히 천년왕성이라 일컫는다.

한국고대사 유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꼽히는 이 월성에 대한 역사적인 내부 발굴을 시작한다.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그동안 지하탐사 등을 통해 확인한 기초조사 결과를 토대로 동서 방향으로 길게 형성된 월성 전역을 서쪽 방향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A~D 4개 지역으로 구분하고, 이 중에서 중앙부에 위치하는 C구역에 대한 시굴조사에 착수한다. 이들 네 구역은 1~14 구역으로 더욱 세분했다. D구역은 7~10구역으로 나뉜다.

발굴조사에 착수했음을 알리는 개토제(開土祭)는 12일 오후 2시 현장에서 개최한다. 두 기관은 11일 오전 11시 월성에서 언론을 대상으로 현장설명회를 연다. 월성을 어떤 계획에 따라 어떻게 발굴조사하고 보존정비해서 활용할 것인지를 공개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C 구역을 대상으로 하는 이번 조사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전담해 오는 15일에 공식 착수하고는 내년 12월31일까지 시행한다. 장마 기간 등을 제외한 조사일수는 230일, 조사 면적은 5만7천㎡(약 1만7천240평)이다.

C지구는 궁성 핵심 건물들이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2004, 2007년 레이더 탐사 때 정전급 대형건물터와 연못터, 도로터 등이 탐색된 바 있다. 유홍식 연구사는 "땅밑 바로 아래 건물터 초석이 깔려 비온 뒤 초석 자리가 가장 먼저 말라 흔적이 드러나며 땅위에도 초석들 일부가 굴러다닌다"고 했다.
박 실장은 "이 구역에 길이 20m, 폭 4m의 발굴갱 50여곳을 격자모양으로 파고 유적 실체를 확인하는 초기단계 시굴조사를 다음주부터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3월까지 시굴해서 건물·도로터 등 유적들이 확인되면 지표면을 걷고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내년 12월까지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서쪽에서 본 월성

 

 

지하 레이더 탐사결과(2010년)

 

 

월성내 유구 배치도(파란색이 건물지임)

 

 

본격 발굴조사가 아니라 유적 분포 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시굴조사다. 각 트렌치(시굴 조사구덩이)는 길이 20m, 너비 4m 규모이며, 동서 방향으로 11열, 남북 방향으로 9열을 넣는다. 트렌치간 폭은 약 20m.

월성 발굴에서 C구역을 첫 사업 대상지로 선택한 까닭은 지중탐사 결과 이곳에 왕궁 중심 건물로 생각되는 대형 건물 기초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9구역 대형 건물지와 7구역 역삼각형 구조물, 8구역 문지(門址), 그리고 10구역 건물터와 문지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나아가 이 구역에 포함된 성벽 구조도 확인할 방침이다.
문화재청은 이런 기초 조사 결과를 토대로 향후 본격 발굴과 정보복원 계획을 수립할 계획이다.

월성 발굴이 얼마 걸릴지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다. 문화유산계에서는 적어도 40년은 걸릴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 때문에 당장의 성과에 목말라 하는 일부 경주 지역사회에서는 민간 매장문화재 전문발굴단을 한꺼번에 투입한 '속전속결식 발굴'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기도 하지만, 문화재청과 문화재위원회는 경주문화재연구소라는 단일 국가기관에 의한 '지속 발굴·정비'로 방향을 일단 정했다.

 

 

 



문화재청은 이번 월성 발굴에 천년고도 경주의 정체성 확보와 대통령 공약사항 이행 뒷받침이라는 두 가지 배경이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국민 문화향유 권리 보장을 위한 발굴현장 상시관람 및 전시·홍보체제를 운영하는 한편 발굴조사와 복원·정비를 동시에 추진할 방침이다.

앞서 문화재청은 월성 조사를 위해 지난해 10월21일 경상북도·경주시와 상호 업무협력 MOU를 체결하고 지난 4월28일에는 '신라왕경유적 복원·정비사업추진단'을 출범했다. 이어 지난 10월8일 경주시가 문화재청에 월성 발굴조사를 공식요청하고, 같은달 15일에는 왕경추진단 자문위원회에 발굴조사 계획을 보고하고 검토를 받았다.
이날 자문위에서는 국가기관에 의한 일관성 있는 책임조사가 필요하며, 전체적인 시굴조사보다는 일정 구역에 대한 조사를 우선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를 토대로 같은달 17일 문화재위 매장문화재분과는 월성 발굴을 허가하되, C지구 시굴조사를 먼저 하고 문지와 9구역 건물지 등에 대해서는 발굴조사로 전환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경주시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달 10일 월성 발굴조사 협약을 체결했으며,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에도 발굴착수 사실을 보고했다.

 

 

 

월성 내의 석빙고/석빙고 앞쪽이 C지구이다

월성은 1915년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처음으로 발굴조사를 했다. 당시 그는 월성 서쪽의 남쪽 성벽을 절개해 하부 5개 층위에서 골촉, 골침, 멧돼지 이빨, 사슴뿔, 동물뼈, 탄화곡물, 토기편 등을 수습했다.
이후 1979~1980년 동문지를 조사해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의 문터를 확인하고 성벽에 대한 대략적인 토층 상황과 석축 해자 유구를 확인했다. 1984~1985년에는 성벽 바깥에서 해자 발굴에 들어가 그 규모와 성격을 파악했으며, 해자가 기능을 상실한 후 통일신라시대에는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 1985~2014년 1~5호 해자와 계림 북편 건물터, 첨성대 남편 적심(積心) 건물지, 월성 북서편 건물지 등을 확인했다.

하지만 내부에 대한 본격 발굴조사는 없었다. 대신 2003~2004년 지표조사를 통해 월성의 자연적·인위적 훼손 양상을 확인, 70여 기에 이르는 초석과 연못터, 우물터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한편 '在城'(재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를 수습했다.

2007년에는 월성 내부 지하 레이더 탐사를 통해 2·3·6·9·14구역에 중요한 건물터가 집중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일단 C지구 발굴조사에 단장과 7명의 학예연구사를 포함한 조사원 10명에 준조사원 20명을 신규로 채용해 내년 말까지의 1차 조사를 할 계획이다

 

다음주부터 당장 발굴조사가 시작된다고 해도 석빙고를 비롯해 월성 일대의 관람이 금지되는 건 아니다. 연구소는 1차 조사 구역인 석빙고 앞 C지구에 대한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울타리를 설치하지만 투시가 가능한 높이 1.2m의 개방 형태다.

유홍식 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은 "기존의 관람로가 성벽쪽으로 이동해 설치되고 경계 울타리도 낮아 누구나가 발굴 과정을 구경할 수 있다"면서 "일반인들도 사전에 연락을 하면 발굴 구간 안으로도 견학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2014.12.11>

 

<< />pan>참고 자료>

 

C구역은 조선시대에 축조되어진 석빙고(보물 제66)의 남편지역 일대이다.

 

 

레이다 탐사결과, 지하의 가장 상부 층엔 'ㄱ'자형의 석렬이 있으며, 동서방향의 길이는 44m, 남북방향의 석렬은 일부 사라지기는 했지만 전체길이는 약 51m인 것으로 보인다. 중심축은 북에서 서쪽으로 7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석렬과 거의 같은 깊이에 원형 적심 군으로 이루어진 건물지가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북쪽에 있는 건물은 2×12(6m×28m) 크기로 동서장축을 이룬다. 동쪽의 건물지는 3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2×2, 2×6, 2×2칸으로 모두 합쳐 6m×28m 크기의 남북장축이다. 남쪽의 건물은 2×7(6m×20m) 크기의 동서장축이고, 이 건물의 서쪽에 6m×6m 크기의 건물이 한 채 더 있으며, 중심축은 북에서 서쪽으로 7도로 자형의 석렬과 같다. ‘자형 건물지 중심부에서 중심축이 동쪽으로 6도 기울어져 다른 방향으로 뻗은 건물지는 중복 유구로 보인다.

 

자형 원형 적심 건물지 아래층에는 정방형으로 된 여러 채의 건물지가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북쪽방향인 위쪽 열은 2열 지어 있으며, 좌우 각각의 열은 1열 지어져 있다. 위쪽 열 중 북쪽 열은 8m×8m 크기의 건물 5채가 약 8m 간격으로 동서 방향으로 나란하다. 남쪽 열은 7m 정도 남쪽으로 떨어져서 비슷한 크기의 건물 6채가 같은 방향으로 나란하다.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한 첫 번째 건물은 석빙고가 약 삼분의 일 정도 파괴한 것으로 보이며 크기가 5m×8m로 조금 작아 보인다. 북동쪽 모서리에 위치한 첫 번째 건물도 파괴되어 일부만 남아 있다.

두 번째 줄의 동쪽 끝의 건물 2채는 한 변이 6~7m로 다른 건물에 비해서 크기가 작다. 2채의 건물이 양끝의 남쪽으로 연장되어 있어 좌우의 열을 만들고 있고 상당부분 교란 및 파괴되어 있다.

 

모두 15채의 방형 건물이 확인 되었으며 건물지의 내부가 채움재로 가득한 건물이거나 지반을 잘 판축 한 건물로 보이며 건물지의 바닥깊이는 약1.3m 정도로 판단된다. 건물 배치의 중심축은 앞에서 설명한 유구들과 같이 북에서 서쪽으로 7도이다.

석빙고에서 시작하는 폭 17m, 길이 약 86m의 남쪽 방향으로 뻗은 구조물은 서쪽으로 7도이며, 북문지와 관련이 있는 도로유구로 추정된다.

 

북문지는 전랑지 방향과 북쪽으로 일치하며, 현재의 폭은 10m이며, 성벽 앞 해자 발굴시 폭 15m의 도로가 확인되었다.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메모 : 토함산솔이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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