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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태조산 도리사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5. 4. 27.

 

태조산 도리사를 찾아서

 

도리사는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태조산에 있는 절로서

조계종 제 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아도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서라벌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겨울

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하여 있음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하였으며 태조산

도리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절이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도리사는

태조산을 뒤로 하고 있는데 태조산은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 숭신산성을 축성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의 도리사는 아도가 창건했

다는 도리사는 아니고, 본래의 도리사는 폐사되

었고 후대에 도리사의 부속 암자였던 금당암을

중심으로 하여 중창한 절이 현재의 도리사로

보물 제470호의 삼층석탑, 아도화상 석상

세존사리탑·아도화상 사적비, 조선

후기의 탱화 등이 있습니다.

적멸보궁과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가여래사리탑이 있습니다.

 

 

도리사는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태조산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입니다.

  

아도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서라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하여 있음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하였다고 합니다.

 

선산의 태조산 도리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절이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도리사는 태조산(692m)을 뒤로 하고 있는데 태조산은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 숭신산성을 축성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현재의 도리사는 아도가 창건했다는 도리사는 아니고 본래의 도리사는

폐사되었고, 후대에 도리사의 부속 암자였던 금당암을

중심으로 하여 중창한 절이 현재의 도리사입니다.

 

도리사의 옛 자리는 현재 냉산의 남록 즉 현재의 도리사로 올라가기 전 골짜기

옆에 장대한 석축지가 있는데, 이곳이 옛 도리사지라고 합니다.

 

이러한 추정은 금당암은 도리사 북쪽에 있다(金堂庵在桃李寺北)”라는

신증동국여지승람불우조 기록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이 사지는 대웅전, 누각 등의 건물을 조영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대지에

위치하고 있고, 와편도 흩어져 있습니다

 

도리사는 창건 이후 조선 후기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1677(숙종 3)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린 뒤,

 

  1729(영조 5) 대인(大仁)이 아미타불상을 개금(改金)하여 금당암으로

옮겨 봉안하고 금당암을 도리사로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조사전은 정면 3, 측면 1칸의 건물이며 창건주 아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현재 영정은 직지사성보박물관으로 옮겨가고 1976년에

발견된 아도화상 석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합니다.

 

도리사의 중요문화재는 보물 제470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아도화상 석상·세존사리탑·아도화상 사적비, 조선 후기의 탱화 등이 있습니다.

  

아도의 어머니 고도녕은 중국에서 온 사신 아굴마와 연정이 깊어져

아도를 낳게 되었는데 그 후, 아도가 다섯 살이 되자

고도녕은 아도를 출가시켰다고 합니다.

 

 

아도가 16세가 되자 아도는 중국으로 가 현창화상 밑에서 수행을 하고

고구려로 돌아오자 어머니 고도녕은 아들을 불교가 없던 신라로

불법을 전하라며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신라는 외래 문물에 배타적이어서 불교 박해가 심했었다고 하는데.

그는 묵호자란 이름으로 지금의 선산부 도개에 와서 모례장자의

집에 몸을 의지하고 낮에는 일을 하여 도움을 주고 밤에는

사람을 모아 자비로운 불법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양나라의 사신이 신라에 향을 예물로 보내왔으나 그 사용법을 아는 사람이

없어 걱정 해오던 중 모례장자의 추천으로 궁에 들어가 향의 사용법을 알려주길

 

향을 불에 태우면 향기가 그윽하여 신성하기가 이를데 없고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다하였는데 이에 왕의 공주인 성국공주가 큰 병이 들어있었는데,

 

 

왕이 아도화상에게 치료를 청하니 아도화상이 칠일간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니 신통하게도 공주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고 합니다.

 

그 공덕으로 불교를 전할 기회를 얻었으나, 왕이 세상을 뜨자 아도화상을

해치려 하는 무리들이 공격을 해와 몸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모례장자의 집에 잠시 머물다 떠나려하자 모례장자가 가는 길을 물었으나 나를

만나려거든 얼마 후 칡순이 내려올 것이니 칡넝쿨을 따라 오시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 해 겨울 과연 기이하게도 정월 엄동설한에 모례장자 집 문턱으로 칡순이

들어와서 모례장자는 그 줄기를 따라가 보았더니 한 겨울인데도 복숭아 꽃과

오얏꽃이 핀 나무 아래 좌선대에서 아도화상이 정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잘 오셨오. 모례장자. 내 이곳에 절을 세우려 하니

이 망태기에 곡식 두말을 시주하시오

 

아도화상은 모례장자 앞에 작은 망태기를 내놓고 시주를 권해서 모례장자는

기꺼이 승낙을 하고는 집으로 내려와 곡식 두 말을 망태기에 부었으나

   

 어인 일인지 망태기는 두 말은커녕 두섬을 부어도 차지 않아서 결국

모례장자는 재산을 모두 시주하여 도리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아도화상은 절 이름을 복숭아 꽃과 오얏꽃의 이름을 따 도리사라 칭했고

그곳이 바로 신라에 처음 세워진 절 도리사라고 합니다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하였으며 신라에 세워진 절로서는 최초이며

연혁에는 눌지왕 때(417)에 창건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아도화상은 중국 사신과 고구려 여인 사이에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이름은 묵호자였다고 하며 그는 중국에 가서 스님이 되었으며,

 

나중에 고구려와 신라에 불교를 전하였다고 하는데. 묵호자와

아도화상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극락전 현판

 

높다란 기단 위에 세워진 극락전은 앞과 옆이 각각 세 칸 짜리

정방형에 팔작지붕을 얹은 건물로서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는 공포는 다포로 얹어

화려한 단청을 그려 넣었습니다.

 

도리사의 암자였던 옛 금당암의 법당으로 19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는 목조로 된 아미타여래불이 주불로 안치되어 있습니다

 

도리사 극락전 내에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시대 양식을 띠고 있고

높이 129, 무릎너비 92.5. 표면에는 건칠을 하고 금박을

입혔으며 상호 각부에는 색칠을 하였습니다.

 

19683월 개금을 하기 위해 불상을 다른 곳에 안치하고 밑의 보료를

들어냈을 때 그 중간에서 여러 장의 묵기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도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 대한 최초의 개금은

1731년에 이루어졌는데 이때는 복장까지 보았다고 하며,

 

  두 번째 개금은 1764년에 이루어지고 세 번째 개금은 1876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어 1968년에 네 번째 개금불사를 한 것입니다  

 

1731년에 최초의 개금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도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조성 연대는 1700년 이전인 1600년대로 추정됩니다.

 

 

 극락전의 옆 모습입니다

 

    

 꽃과 벌의 관계는?

 

 원래 칠성각 동북쪽 담장 밖에 있었던 것으로, 도굴로 인하여 계곡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77년 도리사 경내에 옮겨 칠성각 옆에 새로 기단석과

난간을 만들었고 앞면 좌우에 석등을 세웠습니다 

 

이 때,복원 공사를 하던 중 1977418일 이 속에서 금동육각사리함과 함께

세존 진신사리 1과가 발견되었으며 원래의 사리탑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도 지대석이 묻혀 있다고 합니다.

 

 보주 윗부분의 원좌 다섯 곳에 음각하여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이라고 한 자씩 새겨져 있어 석가세존사리탑이라 부릅니다 

 

 도리사 세존사리탑은 석종형의 승탑으로서 하대석 3단은 새로 만들어

올려 놓았으며 3단의 상부는 복판으로, 복련을 조각하였고,

하부에는 안상에 초문을 양각하였습니다 

 

 원래 4각형의 상대석에는 네 모서리에 각각 사자의 머리를 조각하여

놓았으며 탑신의 하부에는 단엽10판의 앙련을 조각하였고, 중앙에는

아무런 문양이 없으며 상부에는 복련을 돌렸습니다.

 

보주는 상촉의 연봉형으로 만들었고, 승탑의 높이는 1.62m,

지대석 길이 1.3m, 탑신 높이 1.02m 입니다.

 

 

탑신에는 선각으로 제석천, 범천, 사천왕들을 새겼는데 그 선들이 거침없고

정교하고 치밀하여 매우 숙달된 장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극락전 앞에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의 화엄탑이 있는데

얼른 보면 네모난 돌들을 그냥 적당히 쌓아 놓은 것 같습니다.

 

탑에 쓰인 부재의 규모와 정성을 살펴보면 갖춰야 할 형식을 다 갖추고

있는데 왜 이런 모양으로 탑을 쌓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국내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 탑은 모전석탑과 닮았으나 기단부에서

차이를 보이며 의성과 안동의 방단형석탑과 연관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보물 제470호로 지정되어 있는 높이 3.3m의 이 석탑은

극락전 앞마당 중심선에 건립되었다는 점과

  

 현 위치밖에 넓은 대지가 없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석탑의 기본형은 방형으로서 네모난 지대석 위에 기단이 놓이고

그 위에 탑신부와 상륜부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지대석은 10매의 장대석으로 짜여졌는데, 윗면에는 한 단의 각형 굄을

새겨서 그 위에 기단부를 받치고 있습니다.

  

 

기단부는 모서리에 네모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 면에 긴 네모모양의

판석을 여러 장씩 세워서 마치 병풍처럼 돌려쳤는데,

북쪽면만 7매석이고 다른 면은 모두 6매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단 갑석도 네 귀에 넓은 판석을 놓고 그 사이를 여러 장의 돌로 짰는데,

각 면이 똑같이 3매석씩으로 되어 있습니다  

 

갑석 윗면에는 별다른 구조가 없이 평평한데 그 위에 탑신이 놓였고,

각 층은 10개의 크고 작은 석재로 구성되어 있어서 마치

모전석탑의 구조와도 같은 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탑신은 3층으로 초층은 각 면에 네모난 석재를 3중으로 쌓아 이루었는데,

동면은 15매석이고 남면은 13매석 입니다.

 

그 위의 옥개는 일반형 석탑의 옥개석 형태와는 달리 지붕형의 옥개가 아니어서

받침이 없고 그 위에 낙수면도 없으며, 전탑이나 모전석탑에서와

같이 윗면에 몇 단의 층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각 층단은 기단부 갑석과 같이 네 귀에 장대석을 배치하고 그 사이를 몇 장의

네모난 석재로 결구하였고, 그 위에 2단의 층단을 놓았는데

 

그 층단은 상하층 동면이 같이 4매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남면은

하층이 5매석, 상층은 4매석입니다.

 

 

2층 옥신은 면마다 2층으로 장방형 석재를 겹쳐 조립하였는데, 남면에는

중앙에 양 문비형을 모각한 판석을 끼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얹었고.

그 위의 층단 받침은 3단입니다.

 

3층옥신과 옥개는 각각 한 개의 돌로 조성되었고 밑에 각형 1단의 받침이 있으며,

낙수면에는 2단으로 굄을 만들어 그 위에 상륜부를 받치고 있습니다.

 

상륜부에는 노반·석주, 연화가 조각된 원형의 앙화와 보주가 각각 놓였는데

이 석탑은 구조상 옥개 낙수면부에 층단을 이루고 있는 점이라든지

 

층마다 작은 석재를 여러 겹으로 쌓아 탑신부를 구성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모전석탑의 계열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건조연대는 남쪽면에 새겨져있는 양쪽 문비형의 양식과 상륜부의 조각을

비롯한 각 부재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엽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남쪽면 가운데에는 세로로 긴 네모모양의의 문비가

오목새김되어 있습니다.

 

        

  아도화상 좌선대 안내판

 

 석탑의 왼쪽에 절 밖으로 나가는 작은 돌문이 있고 그 곳을 통과하여

아래로 조금 내려서면 아도화상이 참선을 했다는 좌선대가 있습니다.

   

 네 개의 자연석 위에 대충 다듬은 넓은 돌 하나를 얹어 한 평 남짓한

곳이 있는데 아도화상이 좌선하던 곳이라 합니다

 

아도화상이 모례 장자에게 집안에 칡넝쿨이 들어오면 그 넝쿨을 따라오라고

하였는데 아도화상의 예언처럼 집안으로 칡넝쿨을 따라 이곳까지 와보니

이 바위 위에 아도화상이 좌선을 하고 있었다는 전설의 바위입니다 

 

좌선대 뒷쪽에는 2기의 비가 남쪽을 바라보고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아도화상사적비와 도리사불량답사주질비 입니다

 

아도화상사적비는 대석과 이수를 갖춘 형식으로, 비 전체 높이 296cm,

비신 높이 197cm, 84cm, 두께 24cm, 이수 높이 69cm 입니다.

 

자연 암석을 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직사각형의 구멍을 파서

화강암으로 만든 탑신을 만들었습니다.

 

비신의 앞면에는 윗부분에 가로로 아도화상사적비(阿度和尙事蹟碑)라고

전서로 적혀있고, 비문은 해서로 내용을 음각하였습니다.

 

이 비문의 끝부분에 숭정즉위후이십팔년오월 일입(崇禎卽位後二十八年五月 日立)

이라고 적혀있어 이 비는 1655(효종 6)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고,

 

아도비가 아도화상사적비를 칭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동일한 것이라면

아도화상사적비는 1653(효종 4)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비의 뒷면에는 1643(인조 21)부터 1655(효종 6)까지 13년 동안 불상

(癸未, 乙酉)과 불좌(辛卯年), 아도비(癸巳年) 등의 불사를 하였다는

내용과 그 공로자들을 기록한 자운비(慈雲碑)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도리사 불량답시주질비는 도리사에 논과 밭을 시주한 이의 이름과,

논밭의 규모를 적어놓은 비로 자연 암석을 받침 삼아 윗면에

홈을 파서 비를 꽂아두고, 머릿돌을 올려 마무리하였습니다

 

머릿돌은 앞뒷면에 굵은 선으로 연꽃봉오리와 줄기를 조각하였고, 두 옆면에는

2중으로 된 원모양의 띠를 새겨 장식하였으며 꼭대기에는 꽃봉오리모양을

한 머리장식이 우뚝 솟아있습니다.

 

앞뒷면에 세로로 새긴 비문은 앞면 첫줄에 비의 이름을 적은 후, 그 아래에

불량답(佛粮畓)을 시주한 자와 그 규모를 밝혀두었습니다.

 

비문 끝에 남긴 기록을 통하여 숙종 38(1712)에 석수 김성원(金成元)

각자하고 승통 능철(能哲)이 세웠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아도화상

 

 

 

 

 

若而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아도화상의 동상에 아도화상이 책을 펼쳐들고 있는 책에

위와 같은 글이 적혀있습니다.

 

만약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헛된 도를 행하고 있어서 여래를 볼 수 없다.

 

아도화상 석상은 1976년 현 도리사 경내 화엄석탑 뒤

석축을 정비하다가 발견하였는데

 

아도화상 석상은 자연석을 깎아서 만든 입상으로 전면 폭이 좁아

기이한 감을 주나 조각의 윤곽은 뚜렷합니다.

 

안조 때 부제학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낸 최현의 일선지

불우조에는 아도화상의 석상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금당암은 도리사 동쪽 수십보 쯤에 위치하는데 아도석상이 있다'

적혀있는 기록에 의하여 이 석상이 아도화상

석상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당시 이 유물을 감정한 동국대 황수영박사는 '도리사에서 발견된 아도상은

동남쪽 넓은 들과 긴 강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일선지의 기록과 일치되고 

 

보관이나 나발 등이 없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불상이 아니며, 퀴 코

눈 등의 모습이 이국적이기 때문에 위나라 사람과 한국여인

사이에 태어난 아도화상일 것'이라고 풀이 했습니다

 

아도화상의 석상은 총높이가 97, 마리높이가 32cm, 신체 높이 65cm,

옆면 폭 26cm, 정면 폭 17에 불과한 아담한 소상으로. 발굴 후

취급부주의로 목이 부러졌으나 복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얼굴은 좁고 긴 편이며 눈은 추켜 떠 위엄이 당당하며 양손은 치켜들어

가슴 쪽에서 서로 닿은 듯 하며 왼손으로는 법의인지 또는 연봉오리인지

잘 분간되지 않는 물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른쪽 측면에는 여덟 갈래의 화엽형 둥근 무늬를 부조했는데

가사를 고정시키는 매듭의 장엄구를 나타낸 듯합니다.

 

아도화상은 도리사에서 정진하다 금수굴에 들어가 열반에 들었다고 하며.

지금도 도리사에서는 성국공주의 병을 낫게한 아도화상 동상 앞에서  

 향을 피워 올리며 쾌차를 위해 기원하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적멸보궁을 참배하는 예법

 

 

적멸보궁 현판입니다

 

 

사리탑 안내문

 

적멸보궁 뒷편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가여래사리탑이 있습니다.

 

사각의 기단 위에 석난간을 설치하고 사방에 계단을 놓고 기단 위에 팔각의

사리탑을 세웠는데,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팔각원당 식으로 전통양식에 의하였고 설계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사리탑

앞쪽에는 배전을 건설, 참배공간을 두어 적멸보궁식을 따랐습니다

 

사리탑은 높이 560cm에 폭이 390cm로서 흰색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고려시대의 팔각승탑 형태를 본따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사리함과 사리는 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1987

주지 법등화상이 건립한 현재의 사리탑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하고 사리함은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적멸보궁에서는 뒷 유리창을 통하여 석가여래사리탑을

볼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사리는 직경 8mm 크기로 타원형이며 도굴꾼들이 골짜기에 버린 석탑재에서

진신사리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삼성각입니다   

 

   삼성각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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