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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사천 가산리 석장승을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4. 10. 16.

사천 가산리 석장승을 찾아서

  

석장승은

우리 겨레의 얼굴로

험상궂으면서도 해학적이고

익살스러우면서도 위엄을 품고 있는

표정에서 오랜 세월 이 땅에서 살아온

겨레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하는데 가산리

에는 세 쌍의 돌장승이 있는데 마을 뒤쪽의

언덕 위에 있는 남상 2기와 맞은 편 밭가에

있는 여상 2기가 상신장이고, 벅수골 마을의

당산 나무 아래 있는 남상 2기가 하신장으로

원래는 네 쌍이 건립되었지만 이 중 하신장의

여상 한 쌍을 도난당하여 새로 만들어 세웠

는데 이는 민속자료 지정에서 제외되었으며

남장승은 묘 앞에 있는 문인석처럼 관모를

쓰고 손에 홀을 들고 조복을 입고 있으며

여장승은 동자상 형태로 조복을 입었고

손에 홀을 들었으며 머리에 뿔 같은

것이 2개 있으며 남장승 아래에는

작은 감실을 만들어서 촛불을

켤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장승은 우리 겨레의 얼굴로 험상궂으면서도 해학적이고 익살스러우면서도

위엄을 품고 있는 그 표정에서 오랜 세월 이 땅에서 살아온

겨레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사천 가산리 마을의 여러 곳에는 세 쌍의 돌장승이 있는데

마을 뒤쪽의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남상 2, 맞은 편

밭가에 있는 여상 2기가 상신장입니다

 

벅수골이라는 마을의 당산 나무 아래 있는 남상 2기가 하신장으로

원래는 네 쌍이 건립되었지만 이 중 하신장의 여상 한 쌍이

도난당하여, 1980년 같은 자리에 새로 만들어 세웠는데

 

   

 

이는 민속자료 지정에서 제외되었고 6기의 장승 중 남장승은 묘 앞에

세우는 문인석과 비슷한 모습으로 앳된 얼굴로 관모를 쓰고 앞에서

모아 쥔 손에는 홀을 쥔 채 관원이 입은 조복을 입고 있으며

 

 

남장승의 얼굴은 갸름하고 눈 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갔으며 코는 길쭉한

삼각형이며 입은 꽉 다물고 있어 엄격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여장승은 머리에 2개의 상투를 튼 모습으로 긴 장옷을 입고 모아 쥔

두 손에 홀을 들고 있고 얼굴은 둥글고 눈은 돌출되었습니다.

    

 

남장승이 서 있는 아래쪽에는 감실을 만들어서 촛불을

켤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 남장승은 마을 어귀의 남장승과 비슷한 형태로 관모를 쓰고 앞에서

모아 쥔 손에는 홀을 쥔 채 관원이 입은 조복을 입고 있습니다.

 

얼굴은 갸름하고 눈 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갔으며 코는 길쭉한

삼각형으로 입은 꽉 다물고 있어 엄격한 인상입니다.

 

왼쪽 남장승은 수염이 없으나 오른쪽 남장승은

굵은 수염이 세 줄기로 나 있습니다.

 

 

마을 중앙의 남녀 석장승은 산비탈의 계단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남장승 2기는 산비탈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여장승 2기는 느티나무 아래에 동자상 형태로 서 있는데 조복을 입고 손에

홀을 들었으며 머리에 뿔과 같은 돌출부가 2개 솟아나 있습니다.

 

 

왼쪽 여장승의 오른쪽 뿔은 잘려나갔으며 눈썹이 짙고, 큰 귀를 하고 있으며,

눈과 귀에 비하여 입은 작고 긴 장옷을 입고 두 손에 홀을 들고 있습니다   

 

 

장승은 마을 어귀나 절 입구 등에 세워놓아 이정표나 마을 경계표지로서의

기능과 액막이 수호신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으며. 또한 병마와

악귀신을 막는 수호신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지명에 장승마을·장승백이·장승리·장승포·장생포라고 하는 곳은

옛날 그 마을이나 갯가에 장승이 서 있어서 생겨난 마을 이름입니다.

 

 

장승의 원말은 도교의 신선사상으로부터 취한 불로장생이란 말이었다고 하는데

장승은 주로 화강석과 소나무로 만드는데, 나무장승의 몸 기둥에는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의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돌장승의 명칭은 지방마다 다른데. 영남과 호남지방에서는 벅수, 제주도에서는 돌하르방·우석목이라고 하였으며 남해안 갯가에 돌장승이 많습니다 

 

 

장승은 국사당, 당산, 산신각, 당산나무, 서낭당 등의 당제행사와 돌무더기,

선돌, 솟대 등 무속신앙과 함께 우리나라 고유 민속 문화의 소산으로

신상과 제사, 고사, 굿 등이 오늘날까지 전승 발전되고 있습니다.  

 

 

당집 밑 넓은 공지에 옛 조창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포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중앙에 창감리가 있던 본관 건물이 있고 아래 마당 양쪽에

각각 창고가 나란히 마주 서 있는데 지금도 남아 있는 주춧돌과

축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마을에는 나라에 세금으로 바치던 물건을 임시 보관하던 창고인 조창이

있어 인근 7개 군현의 공물을 모두 이곳에 모았다가 바닷길을 통해

한양으로 올려 보냈다고 하는데

 

 

이 때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면서, 장승 앞에서도 재물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이로 미루어 이 장승들은 조창을 수호하는

역할과 함께 해운의 무사를 기원하는 대상물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장승은 조창이 폐지된 후에도 마을을

수호하고 역병을 퇴치하는 민간 장승의 역할을 해왔으며 국가적인 기원의

대상이 민간 차원의 신앙대상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고 하는데 공식명칭은 가산리석장승 으로 경남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 626-1 에 있으며 시도민속문화재 3 호로 지정되어있습니다

 

 

장승은 돌로 만든 석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있으며 장승의 기원은 고대의

성기숭배에서 나왔다거나 사찰토지의 표시로 나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장승이라 부르고 있는 조형물은 크게 법수계와 장승계로 나누는데

나무나 돌로 만든 기둥 모양의 몸통 위쪽에 신이나 장군의 얼굴을 새기고

몸통에는 역할을 나타내는 글을 써서 길가에 세우는 신상으로서

 

 

위협적인 수호신장이거나 진압신 또는 노신 등의 기능을 가진 민속 신앙의

대상인 주물이 장승이라는 생각에 의존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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