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각연사를 찾아서
보배산과 칠보산,
덕가산이 둘러싼 분지에
자리잡은 각연사는 법흥왕 때
유일화상이 창건했고 법주사 말사로
깨달을 각자에 연못 연자를 써 각연사
라고 하는데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비로전이 있는데 비로전의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신라 하대에 조성된 것으로 광배에는
불상의 머리 위쪽과 불상 양쪽으로 각각 3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안쪽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표현한 아름다운 비로자나불이며
각연사에서 숲 속의 좁은 길을 따라 약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2기의 석종형부도가 있고, 각연사
남동쪽으로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통일
대사 탑비가 있으며 30분정도 능선을 따라 올라
가면 암자 골 능선에 통일대사 부도가 있는데
팔각원당형 석조부도로 전체 부재는 완전
하다고 하며, 비로전의 비로자나불 광배
뒤편에 새겨진 국내 유일의 불감이
있다는데 볼 수가 없었답니다
보배산과 칠보산, 덕가산이 둘러싼 분지에 자리잡은 각연사는
법흥왕 때 유일화상이 창건했고 법주사 말사입니다
깨달을 각자에 연못 연자를 써 각연사라고 하는데 대웅전을 중심으로
비로전과 2기의 석종형 부도. 통일대사 탑비와 부도가 있습니다
각연사에는 보물 433호인 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하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인
비로전과 대웅전, 통일대사비, 부도, 석조귀부 등 많은 문화재가 있습니다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가 세웠다고 하나 각연사대웅전상량문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비로전 대들보에서 발견된
묵서에는 고려 혜종(943∼945)년간에 중수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로전의 석조 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 하대에 조성된 것으로 광배에는 불상의
머리 위쪽과 불상 양쪽으로 각각 3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비로자나불좌상 안쪽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표현한 아름다운 비로자나불입니다
각연사에서 숲 속의 좁은 길을 따라 약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2기의 석종형부도가 나란히 하고 서 있습니다
각연사 남동쪽으로 산길을 따라 15분 정도 들어가면 통일대사탑비가 있는데
통일대사는 고려 태조 때의 승려로, 속성은 김씨이고 신라말기에
당나라에 유학, 귀국한 후 각연사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다포식 5량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인데
상량문을 보면 융경 연간, 순치 연간, 강희 연간에 보수한 바 있지만
지금의 대웅전은 조선 영조 44년에 중건된 건물임을 알 수 있으며
최근에는 1979년에 보수하였다고 합니다
이 대웅전에는 주존불인 석가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 약사여래좌상과
통일대사소상이라고 구전되는 관음보살좌상을 보시고 있습니다.
각연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명찰로 거대한 규모였으나 당대의 유물은
석물 뿐이고 목조건물은 조선 후기의 대웅전과 비로전이 남아 있습니다.
이 대웅전에 들어갈려고 하는데 열려진 문 위에 한마리의 나비가 날아갈 생각을
않하고 있기에 기이하게 생각되어 잡아 본 나비 한 마리입니다
대웅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수미단 옆에 따로 모셔진 유일대사상으로
달마상이라고도 하나 표현된 것으로 봐서 달마상은 아닌 듯합니다.
각연사는 창건설화에 따르면 유일이 절을 짓고자 지금의 칠성면 쌍곡리
사동(절골)근처에 자리를 잡고 공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까마귀떼가 날아들어 자꾸 대패 밥과 나무부스러기를 물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까마귀들을 따라가 보니
현재의 각연사 자리 연못에 대패 밥 등이 떨어져 있어 연못 속을 들여다보니
연못 안에 석불이 하나 있고 그로부터 광채가 퍼져나왔다고 합니다.
이에 유일스님은 깨달은 바가 있어 연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이 절이 각연사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주지스님 얘기로는 지금의 바로전 자리가 바로 그 연못자리이고 그 돌부처가
바로 비로전 안에 모셔진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비로전 안의 석조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33호)은
신라 하대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세련된 기교는 나타나 있지 않
지만 단정한 아름다움을 지닌 석불입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가 모두 갖춰진 완전한 형태의 불상으로, 진리의 세계를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표현한 것입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 있는 육계는 펑퍼짐하여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주름이 간략하게 표현되었는데 다리부분의 주름이 형식화되었습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손모양은 어색한데
왼쪽에만 걸쳐 입은 옷과 함께 불상의 오른쪽을 더 허술한 것 같습니다
석조비로자나불상의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듯 가운데가 잘록하게
들어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물방울 모양이라고 합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광배를 보면 불상의 머리 위쪽과 불상 양쪽으로 각각 3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안쪽에서부터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졌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표현하였습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 전성기의 전형적인 불상처럼 긴장된 활력과 세련된
기교는 나타나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화려해진 모습을
보이는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으로 신라 말부터
크게 유행되기 시작한 비로자나불상의 하나라고 합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화려하고 복잡한 8각대좌 위에 당초무늬와 불꽃무늬와
7화불 이 현란하게 새겨진 광배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대좌나 광배와 잘 조화된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육계가 불분명한 머리와 계란형의 얼굴에 알맞게 묘사된 이목구비, 조용한 미소
등에서 단정한 선사의 얼굴을 엿볼 수 있으며, 결가부좌한 자세와 지권인을
한 손에서 이루어지는 삼각형구도의 체구는 우람하거나 격정적인 모습이
아닌 안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최성기의 전형적인 불상처럼 긴장된 활력과 세련된 기교는
줄었지만 일면 단아하면서 일면 화려해진 조각양식을 묘사하고 있어서
선적인 독특한 분위기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자세히 보았으나 비로자나불 광배
뒤편에 새겨진 국내 유일의 불감이 있다는데 볼 수가 없었습니다
비로전 앞마당 절 옆으로 난 숲길을 따라 15분 정도 산 속으로 들어가면
통일대사탑비(충북 유형문화재 제2호)가 있습니다.
통일대사는 고려 태조 때의 승려로, 속성은 김씨이고 신라말기
에 당나라에 유학, 귀국한 후 각연사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각연사의 석조귀부는 현재 비신과 이수는 결실되었고
귀부만 남아 있습니다.
각연사 석조귀부는 받침석과 한 돌로 조각되었으며
받침석의 평면 형태는 방형입니다.
각연사 석조귀부는 4개의 다리가 힘차고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고 발톱은 날카롭습니다
각연사 석조귀부는 등 면의 귀갑문은 좌우 대칭으로 표현되었는데
4각형과 6각형의 변형된 형태입니다.
각연사 석조귀부는 귀갑문 안에는 타원형이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목과 귀두는 따로 만들어 끼우도록 하였으나 지금은 유실되었습니다.
석조귀부는 목과 등이 연결되는 부분에는 연꽃무늬 모양을 조식하였으며
비좌는 장방형으로 화려한 구름무늬와 안상을 표현하였으며,
괴임을 조출하였습니다.
석조귀부는 힘차고 생동감 넘치는 신체와 귀갑문의 형태 및 귀갑문 안의
꽃무늬, 비좌의 구름무늬와 안상, 귀두를 따로 만들어 끼운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조성시기는 고려전기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석조귀부는 비신이 유실되어 비문의 내용을 알 수 없어 선사의 탑비인지
사적비인지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없으나, 귀부의 각부 조각기법이
우수한 수작으로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각연사 창건유래기에는 법흥왕 때에 어느 대사가 쌍곡리에 절을 지으려고 목수를
시켜 나무를 다듬고 있는데 까마귀 떼가 날아와서 나무조각을 물고 날아가길
자주하므로 이상하게 생각한 대사가 그 까마귀 떼를 따라가 보니
깊은 산골에 있는 연못 속에 나무조각을 떨어뜨려 연못을 살펴보니 그 속에 석불이 앉아있어
그곳에 절을 세우고 '각유불어연중'하였기 때문에 절이름을 각연사라 하였다."하고
고려 혜종(944-945)연간에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각연사의 통일대사탑비는 각연사에서 숲 속길을 따라 약 500m 올라가면
칠보산 중턱에 높이 470cm의 통일대사탑비가 있습니다.
이 탑비는 사각형의 대석 위에 보주를 입에 문 용머리에 거북 등을 한 높이 102cm의
귀부 위에 옆에는 안상을, 위에는 복련을 조각한 네모진 비좌가 있고
그 위에 너비 128cm, 두께 25cm, 높이 258cm의 비신을 세우고 다시 낮은 3단 받침을
깍고 주변에 앙련을 조각한 뒤 그 위에 네 마리 용이 트림을 한 폭 175cm,
두께 75cm, 높이 110cm의 용각리수를 얹었습니다.
비문은 마멸이 심하여 오늘날은 260자만 판독이 가능하나 본래는 1행 88자씩
46행, 약 3500여 자를 쓴 것 같으며 다행히 비문에서 통일대사의
제자인 석 총훈 등이 건립한 것은 알 수 있으나
각연사의 통일대사탑비의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는데 대체로 고려 광종
9년에서 11년 사이로 추정된다고 하며 유형문화재 제2호입니다.
비좌는 측면에 안상을 조식하였으며 윗면에 복련을 돌리고
받침을 조출하여 비신을 받치고 있습니다.
이수는 아래에 낮은 2단의 받침과 사분원의 몰딩이 비좌와 대응적이며 앙련도
같은 수법이고, 4면의 용틀임이 웅장한 정상에는 보주가 완전합니다.
비신도 화강암으로 각 면을 연마하여 비문을 새겼는데 표면은 마멸이 심하여
남아있는 명문은 적으나 뒷면은 전문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다.
주위의 돌담이나 지대의 축석으로 보아 원위치에서
도괴된 흔적이 없이 각부의 보존이 양호합니다.
화강암 한 돌로 된 귀부의 6각 귀갑문 안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으며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조각은 웅장합니다.
귀부의 두상과 비좌, 이수의 양식수법은 신라 하대로부터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건립연대는 고려 광종 9년(958) 8월부터 11년(960) 3월 사이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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