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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스크랩] 첨성대에서 볼 수 있는 선조들의 또다른 석축(石築)기술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3.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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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에서 볼 수 있는 선조들의 또다른 석축(石築)기술

 

 

 

 

돌다루기를 마치 흙다루듯 하였다는 신라인의 석축기술은 

불국사의 대석단을 쌓은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놀랍기만 하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렝이기법이나 동틀돌을 사용하여 오랜 세월동안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석단을 만들어 내었다.

 

첨성대는 신라 35대 경덕왕(742∼765년)때 만들어진 불국사보다 훨씬 빠른 27대 선덕여왕(632∼647년) 시절에 만들었다. 즉 불국사보다 무려 100여년 앞서 만들어진 석조 건축물이며, 지금부터는 약 1,500여년 전에 만들어졌으나 아직까지 한번도 무너지지 않고 건재하고 있다. 거기에는 우리 조상들의 또 다른 석조물 축조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첨성대는 일반적으로 선덕여왕(632~647년)대에 축조된 이후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은 위대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장활식 부산대 교수는  "13세기 몽골군 침입과 16세기 말 임진왜란

등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훼손 정도의 심각성을 감안할 때 두 번 이상 무너졌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17층 이하는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18층 이상이 주로 타격을 받은 것으로 평가됐다"고 주장한 바 있다

.

장교수의 주장처럼 두 번 이상 무너져 보수하였다고 해도 17단 이하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으니 17단 이하는 한번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전국에 돌로 쌓아졌던 수많은 성곽들이 무너져 내리고 사라졌지만 역시 돌로 쌓은 첨성대는 1,500년이 지났어도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우뚝 서 있음은 신라인들만의 탁월한 축조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첨성대는 직사각형 사각뿔 형태로 가공하여 다듬은 석재를 막힌 줄눈 형태로 쌓아 만든 조적식 석조물로서,

1단에서 12단까지는 내부에 크고 작은 뒷채움잡석과 흙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잡석으로 채워진 단의 맨 위 12단의 윗바닥에는 작은 자갈이 많이 깔려 있고. 그리고 그 위 13단부터는 빈 공간이며 첨성대를 구성하는 돌로만 쌓여 있다.

 

석축을 쌓아올린 형태를 보면 1단에서 17단까지는 윗단을 아랫단보다 조금씩 안쪽으로 들여쌓는 퇴물림 방식을 사용하여 곡면으로 나타내었고 그 이상은 거의 직선으로 쌓아올렸다

 

첨성대 그림과사진-퇴물림 형태

 

첨성대를 구성하는 돌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돌의 면은 기본적으로 아주 거칠게 정다듬되어 있다.  이것은 마찰계수를 높여서 쌓아 놓은 돌이 밖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돌의 표면을 거칠게 다듬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돌들을 한 단, 한 단씩 쌓아올렸다.

단은 위로 올라가면서 둘레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아랫단보다 조금씩 안쪽으로 들여서 쌓는데 이것을 퇴물림이라 한다. 퇴물림 방법은 쌓는 돌의 바깥면을 거의 수직에 가깝게 다듬어 쌓은 뒤 그 위에 올라가는 돌을 안쪽으로 퇴물려 쌓는 기법이다.

퇴물린 정도는 단 위치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가장 많은 부분은 130㎜까지나 된다.

첨성대에서 퇴물림은 1단에서 17단까지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으나  그 윗부분은 거의 수직으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1단∼17단까지의 쌓기 방법(퇴물림)      18단∼27단까지의 쌓기 방법(수직)

 

 

첨성대가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이 퇴물림에서 볼 수 있다

퇴물림하면서 윗 단의 석재가 퇴물린 바깥쪽으로 이탈되지 않도록 아랫단 석재의 윗 부분을 위로 살짝 들려올려 볼록하게 다듬어 놓았다. 즉 아래석재의 상단부분을 모접은 다음에 한번 더 꺾어 가공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윗단이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아랫단의 볼록한 부분(모접은 부분)이 막아주는 것이다.

 

 퇴물림한 부분에 있는 돌의 단면

 

 

누르는 힘에 의하여 축조된 돌이 바깥으로 빠져나가려는 것을 아랫돌의 모접은 부분이 막아준다

 

 

이렇게 다듬은 석재를 둥글게 쌓은 다음  가운데와 돌 사이의 빈틈에 잡석과 흙을 넣어 다지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윗단의 돌은 줄눈형태로 아랫단과 어긋나게 쌓은 뒤 그 사이에도 잡석과 흙을 넣어 다쳤다.

다져진 흙과 자갈은 쌓아놓은 첨성대의 바깥돌들이 옆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퇴물림에서 아랫돌의 모접은(둥글게 말아올린) 부분은 쌓아놓은 돌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리고 다져진 흙과 잡석은 돌이 옆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둘레에 돌을 쌓은 뒤 안에는 잡석과 흙으로 채우고 굳게 다졌다

 

잔자갈이 많이 깔려있는 12단 윗면

 

 

첨성대를 보면 13단부터 15단에는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있다.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간 뒤 내부의 사다리를 통하여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하므로  13단부터는 빈 공간으로 두어야하며 흙을 채워 넣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퇴물림이 없이 거의 직선으로 쌓아 올렸고 가운데 흙과 잡석을 채우지 못하는 13단 이상은 어떤 방법으로 축조를 하여 무너짐을 방지하였을까?

 

과수원에 가보면 나뭇가지들이 벌어지지 않게  서로 끈으로 묶어 두는 것을 볼 수 있다.

첨성대의 축조에서도 쌓아둔 돌들이 벌어지지 않게 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긴 돌을 중간 중간에 만들어 놓았다. 바로 방틀심석이라는 긴 장대석이다.

방틀심석은 첨성대의 한쪽면 바깥에서 반대편의 바깥까지 이어지는 길다란 돌로서 19단에 있는 방틀심석의 길이는 약 2m50cm 정도이다.

 

 

 

내부에서 본 방틀심석

 

19단에는 직사각형 단면 모양을 가진 방틀심석 두 개가 동서방향으로 원통형 평면을 관통하고 있다. 20단에는 관통하지는 않지만 같은 모양의 석재 두 개로 된 방틀심석이 19단에 있는 방틀심석 위에 남북방향으로 얹혀 있다.

21단에서 24단까지는 12단에서 18단까지의 방법과 같은 방법으로 다시 면석들을 쌓다가 25단에 다시 원통형 평면을 관통하는 방틀심석이 남북방향으로 걸려 있고 26단에는 이와 직교하여 동서방향으로 방틀심석이 설치되어 있다.

 

방틀심석 윗면에는 그 윗단의 돌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홈을 파고 그 홈 속에 윗단의 돌을 끼워 넣었다.

이렇게 홈에 윗단의 돌을 끼워넣음으로해서 윗단의 돌이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안으로 밀려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19단 북서쪽의 방틀심석

 

19단 남서쪽의 방틀심석

 

 

 

그러나 이 방틀심석을 놓는 방법은 첨성대의 아래부분처럼 아랫돌의 바깥부분을 모접고 빈 곳에 흙을 채우는 방법보다는 효율이 조금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흙으로 채운 아랫부분은 아직도 완전한 원형태를 그내로 유지하고 있는데 비해 윗부분은  완전한 원의 형태에서 약간 타원형으로 변형이 되어 있으며 서북쪽으로 약간 쏠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처음 축조시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발생한 변화인 것이다.

 

 

 

 

첨성대의 축조에 있어서

1. 퇴물림하는 아랫돌의 바깥부분을 모접는방법, 

2. 빈 공간을 흙과 잡석으로 채워넣어 다지는 방법,

3. 방틀심석의 홈파기를  이용한 방법, 

이 세가지의 축조 방법이 1,500여년 동안 첨성대가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유지하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을 보면 석조물이 쓰이는 곳곳에 알맞는 축조방법을 찾아내고 이를 잘 활용한 선조들의 창조적인 석축기술이 놀랍기만 하다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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