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주문화재답사

[스크랩] 이차돈 순교비는 누구의 소유가 될 것인가?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3. 5. 2.

<!-by_daum->

이차돈 순교비, 소유권은 누구?

 

 

 

 

이차돈순교비(앞면)

 

순교비의 뒷면

 

 

이차돈은 지증왕 7년(506년)에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할아버지는 흘해왕(訖解王)이다

법흥왕의 근신(近信)으로서 일찍부터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벼슬은 왕의 뒷바라지를 하는 내사사인(內史舍人)이었다. 이차돈은 527년 8월 5일, 22살의 젊은 나이로 육신을 버려 순교함으로써 신라땅에 찬란한 불교의 꽃을 피우게 된다.

삼국유사에는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이 날아가서 경주 동천동의 소금강산 정상에 떨어지고 목에서는 흰 젖이 솟아 났으며 꽃비가 내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신라에 처음 불교가 들어온 것은 미추왕때이며 이후 19대 눌지왕, 21대 소지왕 때도 계속 불교가 유입되었으나 정착되지 못하고 쫓겨남을 반복하다 마침내 23대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말미암아 공인이 된 것이다

 

이차돈이 순교한지  약 300년 뒤인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기념하고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해 이 비가 건립이 되었다.

이 비(碑)를 '이차돈공양당(異次頓供養幢)', 또는 '석당기(石幢記)'라고도 부른다.

 

'삼국유사'에는 이 비를 세운 해보다 1년 먼저, 남간사(南澗寺)의 스님인 일념(一念)이 이차돈을 기리는 모임을 만들어 승속(僧俗)의 많은 사람들과 뜻을 같이 하며 이차돈의 향기로운 무덤에 예를 올리는 결사문[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다고 한다.

이때 모임에서는 국통(國統)인 혜륭(惠隆) 등이 무덤을 새로 고치고 이차돈을 기념하는 비를 세웠다고 하였다. 이 비가 바로 지금 남아 있는 이차돈순교비로 생각된다. 모임에서 일을 추진한 지 1년만인 817년에 세웠음을 비문의 첫머리에서 알 수 있다.

 

 

 

 순교비의 뒷면

 

 

이차돈순교비는 높이 1.04m이며, 각 면의 너비가 29㎝이다

육각기둥모양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비는 육각형의 복련(覆蓮)으로 새긴 대좌 위에 세워져 있으며, 원래 는 위에 옥개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비(碑)의 제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이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는 흰 피가 솟아 오르는 장면이 좁은 석면(石面)에 간결하면서도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나머지 다섯 면(2-6면)에는 네모칸[井間]을 치서 한 면마다 7줄이 되고 한 줄에 25자가 되도록 칸을 마련하여 각 칸마다 글자 크기 3cm정도의 글씨를 써 새겼다.

그 내용은 법흥왕이 백성들을 위해 불법을 널리 펴고자 하는 마음과 이를 위해 이차돈이 순교한 사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이 이차돈의 숭고한 뜻을 간절히 기리며 이 비를 세우는 사정으로 이루어졌다

 

각 면에 새겨진 명문은 마멸이 심하여 절반 정도만 판독이 되나, 명문의 대강은 '삼국사기'나 '삼 국유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으며, 특히 명문 중의 “頸中白乳一丈(경중백유일장)”이라는 문장은 이들 기록과 합치되고 있다. 또한, 이 순교비석당기를 목판에 새긴 법첩(法帖)  2종 '흥린군신각금생서(興隣君新刻金生書)' ' 원화첩(元和帖)'이 전하고 있어 마멸된 부분을 더욱 보충할 수 있게 되었다.

 

순교비의 명문 중에는 건립연대라고 고증할만한 확실한 연호나 연도는 없으나 '삼국유사' 염촉멸신조(厭觸滅身條)의 기사에 의하여 건립연대를 당 헌종 원화(元和) 12년(헌덕왕 9년, 817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체는 해서이면서도 예서의 필의(筆意)가 담긴 특이한 예라고 한다.

 

 

이차돈순교비는 불교 공인을 기록한 현존 최고의 사료로 한국 불교계에 매우 귀중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제1면의 그림은 당대의 조각연구 및 복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일제강점기 발굴조사 보고서 등에 따르면, 이순교비는 1910년대 초 백률사 불전 맞은 편 산중, 또는 문전 가시나무 숲 에서 재발견되었으며 1914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된 이후 현재까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차돈 초상화

 

※ 흔히 '이차돈'을  성(姓)은 이(李)씨, 이름은 '차돈'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차돈의 이름은  '박염촉'으로 박(朴)씨이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이 남긴 기록, '원종(原宗)이 불교를 진흥시키고, 염촉(厭燭)이 몸을 희생하다' 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차돈의 성(姓)은 박(朴)이요, 자(字)는 염촉(厭燭)이다. 혹은 이차(異次)라 하고, 이처(異處)라고도 하니 우리말로 발음이 다를 뿐이요, 한문으로 번역하면 염(厭)으로 '싫다'는 뜻말이다. 촉(燭)은 돈(頓), 도(道), 도(覩), 독(獨) 등 다 글 쓰는 이의 편의에 따랐으니, 이는 뜻이 없는 어조사이다.

여기서 위의 글자만 한문 글자 염(厭)으로 번역하고, 아래 글자는 번역하지 않았으므로 염촉, 또는 염도 등으로 불렀다'고 되어있다.

각훈스님의 “해동고승전”에도 '이차돈'을 '박염촉'으로 기록한 것을 보면

이차돈의 성은 박(朴)씨가 틀림이 없으며 이름이 무엇인지는 기록된 것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당시 부르던 ‘이차돈’이라는 말을 한자로 기록했을 때 ‘염촉(厭燭)’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이차돈순교비의 원문

 

          元和十三秊戊戌八月十日佛(中缺)於(中缺)王失義不


          順從國隘民役斂□□民興隆佛法

國王寢膳]

塡臆仰天呼佛嗚
          呼奈何天下獨吾攀誰爲伴建釋遺法時有一子其名

猒髑仰眄


          君顏發憤忘食

匍匐徐言君曰蚊蛧

所計君有大意古人有言謀
          問

蒭蕘願垂弊邑

君即憤

告曰小兒非你所能猒敬答曰君之
          所恤是可佛法乎君即徐起然如曰小子如是豈非是乎若我
          天下佛敎流行

蠕動之類得昇人天

國豊民安可通三韓亦廣四
          海猒曰□列臣□□聞秘計□□□□北西之兵恒以四□□□
          □□予聞是己□□□□□□□□□□□□權道猒曰□□□
          君臣語諍而故謬□□吾頸臣民靡懈□敢違命君曰雖有茶□
          豈敢□於無□之命猒曰天下之□無□於□佛子之□無□□
          死□□雖死佛法流行□比小□□君□小忘大可□□□
          則惺然歎猒曰□是

布衣

□懷□□□□在民心□□王□□□
          □是□若如是者可謂

大士

乎王之□□□□必然□□衣□□
          於

路寢

佩劔之士備於四方□□□臣□□則□北面而□王乃
          問曰臣等於吾以爲信佛法欲建塔□故□纂賊諸臣□拜□□□
          曰臣等絕無如□逆意若有□□□□□盟王召□□□□□□
          無答王□告司□於猒子□□而□揮淚北面司則脫冠反縛其
          手致於官庭告

劍命級時頸中

白乳一丈當尒之時天雨名花
          地爲六躍人物譟慟動殖不安路中携哭井

停足揮淚送殯葬
          屍

北山廟西山彼法興王卽位大同十五乙未年

來逹今於唐

             永泰二年丙午二百五十三時有老

便旋

至於邑際觀望舊
          墳於中一墳忽出幼

老魄弔曰噫歟子也但看故人冢墓之丘
          邂逅欻逢如夢子魂魂對曰汝不聞乎在昔有王欲建佛法而不
          成立余是猒□□□王□□□□□□□□□□魂聞之□□□
          □□訣曰子與余□□□□□□□□□乎□□□□□□□□
          魂曰□敎之爲□□□□□□生□□到□□□□□□□□□
          與其□命□比□魂聞□法□歎曰□聞□□□□□□□□□
          爾□□□□□□□□國□□□□□□法主釋□□□□□□
          □□□□□□□□□□□□□□□□□□□□□□□□□

 

지금 추정할 수 있는 비문의 대강은 이렇다.

 

“818년(헌덕왕 10년) 8월 10일에 이차돈을 기리는 모임을 만들었다. 법흥왕은 백성들을 위해 불법을 일으키고자 하여 잘 때나 밥 먹을 때나 걱정이 많았다. 하늘을 우러러 부처를 부르며 천하에 누구와 더불어 불교를 일으켜 세우고 법을 남기리오하고 한탄하였다. 이때 이차돈이라는 사람이 있어 왕에게 나아가 자신에게 묻기를 청했다. 왕은 주저하였으나 이차돈이 재차 간청하자 불법을 펴고 싶은 마음을 말하였다. 이차돈이 자신이 고의로 잘못을 범한 것으로 꾸며 목을 치게 하면 신하와 백성들의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방책을 건의했다. 왕이 아무리 좋은 일을 위한다고 한들 어찌 감히 무고한 목숨을 상하겠느냐고 하자 이차돈은 자신이 비록 죽어도 불법이 유행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소중한 일이라고 우겼다. 왕은 이런 사람이라면 보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그 뜻을 따랐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불법을 일으키는 일에 대해 논의하다 결국 이차돈을 처형하게 되었다. 관리가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 가운데서 흰 우유가 한 길장이나 솟구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렸다. 눈물을 흘리며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북산에 안장하고 서산에 사당을 세웠다.” 

 

 

 

 

 1914년 백율사 부근서 뒹굴고 있던 이차돈순교비

 

 

최근(2014년 4월) 문화재청이 이차돈 순교비를 보물로 지정예고 한데 대해 불교계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차돈 순교비가 국보급 문화재라는데는 이견이 없지만, 보물로 지정이 되면 국가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백율사의 본사인 불국사를 비롯하여 불교계는 순교비가 처음 세워진 곳이 백률사라는 것이 정설이므로 소유권이 백율사 사찰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계는 일제시대 때 발굴조사 보고서 등 근대 기록을 근거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서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과연 이차돈순교비는 누구에게 그 소유권이 돌아갈까?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메모 :

 

</!-by_dau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