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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청도 운강고택과 만화정을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3. 4. 20.

 

청도 운강고택과 만화정을 찾아서

 

운강고택은

계획에도 없던 것을

옆길을 지나다가 운치가

좋아 보여서 들려 본 곳인데

잘 왔다는 생각이 든 곳이라서

한 번 올려 봅니다. 운강고택은

맑고 바른 길이라는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있는 고택으로 조선 영조 때

박숙이 낙향하여 은거하던 곳으로 현손

운강이 중건하였으며 김충현이 쓴 운강

고택이란 편액이 걸려 있으며 만화정은

운강 선생이 학문을 강의하시던 곳으로

만화정 에서 싹트게 된 근대화 교육은

신명학교를 설립하여 현대화교육으로

이어졌다고 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 만화정 에서 하루를 묵고

간 유명한 곳이라고 합니다

== 운강고택. 만화정 ==

 

운강고택은 조선후기의 주택으로 1726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중요민속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으로 입향조인

박숙이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여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은거하던 곳이었다고 전합니다.

 

초창기의 규모가 알 수 없으나 지금처럼 규모가 커진 것은 1824년

그의 현손(玄孫)인 운강 시묵(時默)이 중건하면서부터입니다.

 

 

그 뒤 1905년 운강의 증손인 순병(淳炳)이 다시 증수하였다고 하는데

운강도 후학양성에 크게 주력하였으며 1872년 강학소절목을 마련하고

교육기관으로서의 기틀을 세워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운강도 후학양성에 크게 주력하였으며 1872년에는 강학소절목을

마련하고 교육기관을 세워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주택 전체의 건물배열은 사당을 맨 안쪽에 두고 그 앞에 두 개의

튼입구자형 건물군을 결합시킨 형태라고 합니다.

 

주택 전체의 건물배열은 사당을 맨 안쪽에 두고 그 앞에 두 개의

튼 입구자형 건물을 결합시킨 형태라고 합니다.

 

주택으로는 보기 드물게 그 규모가 크며 대지도 1,700여 평이나 되어

넓은 안마당과 후원 사랑채 등 넓은 공간을 두었습니다.

 

만화정은 운강 선생이 철종 7년(1856)에 세워 공부를 하면서

후학들에게 학문을 강의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만화정 안방에는 찬방과 찬마루를 따로 두었고 대청에도

여름철을 위한 찬광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신지리 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만화정은 정자와 장서각과 숙식을

위한 부속채가 있는데 정자는 ㄱ자형 평면구조로서 온돌방과

마루. 누마루로 되어 있습니다.  

 

소요당 선생이 이곳에 서당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친 이래로 만화정의

유구한 역사 속에는, 숱한 우국지사의 충정과 학자의 열정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부산 동래읍성이 함락되고 10여일 만에 청도읍성도 무너지고

군수마저 달아나자 박씨 집안의 우국지사 열네 분이 만화정 앞

느티나무 숲에 모여 결사항전을 결의하였다고 합니다

 

14의사는1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어성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왜장을 안고 강물로 뛰어내려 순국한 분도 있다고 합니다.

 

서구의 열강들이 조선을 침략하던 위태로운 시절에 운강 선생은 젊은

인재들에게 학비와 숙식을 제공하며 사재를 털어서 교육을 시켰는데,

만화정의 정신은 근대적 장학제도의 근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운강 선생은 운창일록 13책, 14의사록 등 자주적 민족교육을 위한 저술을

남겼고 아들 박재형 선생도 해동속소학, 해동속고경중마방 등

38권의 귀중한 저서를 우리에게 남겼다고 합니다

 

만화정에서 싹이 튼 근대화교육은 훗날 신명학교를 설립하여

현대화교육으로도 계속 이어졌다고 합니다.

 

6.25전쟁 때는 운문들판을 가득 메운 20여만 명의 피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청도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우국충정과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던 선비 혼이 살아 숨 쉬는 이 만화정에서

하루를 묵고 간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화정에서 보이는 운문들판의 원래 이름이 만화평(萬花坪)이었는데

운강 선생은 만화의 花자가 和와 발음이 같은 점에 힌트를 얻어,

정자를 만화정(萬和亭)이라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내외의 구별이 엄격하던 그 당시에 여자들이 사랑채 앞을 피해서

드나들 수 있도록 뒷 사랑과 안 곳간이 연결된 곳을 터서

작은 문을 내었다고 합니다.  

 

 단순한 一자 모양의 구조에서 출발하여 재산이 불어나면 본채의 좌우와

앞에 건물을 덧붙여 ㅁ자형태가 되고 다시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사당채의 ㅁ자 3개가 모여 品자형 구조를 띠고 있다고 합니다 

 

 협문은 안채에서 사랑채 후원을 지나 대문에 이르는 통로로서

내외의 구별이 엄격하던 당시에 부녀자들이 사랑채

앞을 피하여 드나들도록 마련된 문이라고 합니다.  

 

 사랑채와 안채는 넓고 넉넉한 마당을 대칭적으로 가지고 있고,

두 개의 마당은 상호 별개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지만

세련된 동선처리로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운강 선생은 운창일록 13책, 14의사록 등 자주적 민족교육을 위한 저술을

남겼고 아들 박재형 선생도 해동속소학, 해동속고경중마방 등

38권의 귀중한 저서를 우리에게 남겼다고 합니다 

 

 이 집을 구성하고 있는 집채의 동수는 모두 9동이며 집채마다

ㅡ자집으로 영남의 전통적 취락에서는 드물다고 합니다

 

‘맑고(淸) 바른 길(道)이라는 좋은 이름을 가진 청도는, 산과 물

그리고 인심이 맑아서 ‘삼청의 고을’이라 불릴 정도로

주민들의 긍지와 자부심이 높은 지역입니다.

 

섶말을 대표하는 운강고택은, 소요당 선생이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여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던 그 옛터에, 1809년 선생의 11대손

박정주 선생이 살림집으로 가옥을 처음 신축하였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운강 박시묵 선생이 1824년(순조24)에 대규모로 증축하여

고택의 체계를 갖추었고, 1905년에 박순병 선생이 다시 개보수하여

지금에 이르렀고 현 소유자는 박정주 선생의 6대손이라고 합니다.

 

운강고택(중요민속문화재 106호)은 대지 1천770평에 9동의

건물을 거느린 80칸 규모의 사대부집입니다.

 

만화정(萬和亭)에 빽빽하게 걸려 있는 글씨들을 한점

한점 사진으로 담아 보았습니다

 

 

 

 

 

 

 

 

 

 

 

 

 

 

 

 

 

 

 

 

 

 

 

 

 

 

 

 

 

 

 

 

 

 

 

 

 

 

 

 

 

 

운강 선생의 후손으로 금천초등학교 출신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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