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화랑 죽죽비(竹竹碑)와 연호사(烟湖寺), 함벽루(涵碧樓)
합천 읍내의 동남쪽 황강변의 낮으막한 취적산에는 신라와 백제의 대접전지인 대야산성(大耶山城)과 신라화랑 죽죽(竹竹)의 비(碑), 신라군의 영혼을 모신 연호사(烟湖寺), 고려초의 누각 함벽루(涵碧樓)가 함께 모여 있다
신라충신 죽죽비 (新羅忠臣 竹竹碑)
대야성(大耶城)은 황강변의 북쪽 취적산에 있는 신라토성으로 산의 정상부근에 흙과 돌을 이용해 쌓은 성이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때 백제와의 접경지대인 신라 서부의 군사 요충지로서 삼국간의 항쟁이 격화되던 7세기에는 신라의 대백제방어에서 최전선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신라 진흥왕 25년(565년)에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았다 한다. 성벽의 길이는 약 300m 정도인데 대부분 훼손되어 원형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부분적으로 건물터와 적을 막기 위해 세운 울타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대야성이 있는 이 취적산 동쪽 기슭의 작은 비각 안에 신라충신 죽죽(竹竹)의 비가 있다.
죽죽(竹竹 ?∼642)은 대야주(지금의 합천) 사람으로 , 대야성이 백제군에 함락될 때 대나무와 같은 절개로 끝까지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다 전사한 신라의 화랑이다.
이 비는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둔 비이다. 비는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단순한 형태로 ‘신라충신 죽죽지비(新羅忠臣 竹竹之碑)’라는 현판이 걸린 비각 안에 서 있다.
선덕여왕 11년(642), 대야성이 백제장수 윤충에게 포위됐고 전의를 잃은 김품석은 부하 죽죽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죽죽은 남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백제군과 싸웠으나 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나를 죽죽(竹竹)이라 이름을 지은 것은 추울 때도 시들지 않고, 꺾이더라도 굽히지 말라 함이다. 어찌 죽음을 겁내 항복하리오”라고 말하고 전사했다고 한다.
대야성이 비록 함락되기는 하였지만 나라를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던 그의 충성은 신라인들에게 계승되어 결국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승화되었다
죽죽의 이런 충절과 용맹을 들은 선덕여왕은 그에게 급찬의 관등을 내리고 가족을 왕도(경주)에 살게 했다.
신라충신 화랑 죽죽의 비
높이 1.4m, 폭 54㎝의 화강암 비석은 1644년(인조 22년) 합천군수 조희인에 위해 건립됐고 비문은 한사 강대수가 지었다.
비각(碑閣)의 현판에는 ‘新羅忠臣竹竹之碑(신라충신죽죽지비)’라 적혀 있는데, 이 비각은 1935년에 이준호(李駿浩) 등이 중수하였다. 그리고 1970년에 합천청년회의소에서 석축과 비각의 하단 왼쪽에 찬양단비(讚揚短碑)를 세웠다.
죽죽장군의 추모제
<사진출처:나대자연농원향기 http://cafe.daum.net/a6299842>
<대야성전투>
640년 무왕(武王)에 이어 왕위에 즉위한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은 국내정치의 안정을 도모한 다음 신라에 대하여 적극 공세를 취하였다. 그는 642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쪽 변방 40여 성을 빼앗았으며, 8월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대당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화성시 남양만)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며, 장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군사 1만으로 대야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때 대야성 성주 김품석(金品釋)에게 아내를 뺏긴 품석의 부하 검일(黔日)이 개인적인 앙심을 품고 이전에 백제로 도망간 모척(毛尺)과 내통하여 성 안의 식량창고에 불을 질렀다.
이로 인하여 대야성은 큰 혼란에 빠졌고, 품석의 보좌관인 아찬(阿飡) 서천(西川)이 백제군에 항복하였다. 김품석도 서천의 권유를 받아 항복하려 하였으나 백제군이 신라 군사를 모조리 죽이는 것을 보고 그의 가족과 함께 자결하였다.
이 싸움에서 죽죽(竹竹)과 용석(龍石)은 백제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백제군은 김품석의 목을 사비성으로 보내고, 사로잡은 성민 1천여 명을 서쪽지방으로 보냈다. 백제장군 윤충은 대야성싸움의 공로로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하사받았다.
대야성이 있는 취적산
신라는 대야성전투의 패배로 낙동강 동쪽으로 후퇴하여 압량(押梁:경산)에 진을 치고 김유신(金庾信)을 군주에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며, 이때부터 김유신장군이 백제와의 군사작전을 본격적으로 지휘하였다.
사위 품석과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의 머리를 잘라 부여로 가져갔다는 그 참혹한 소식은 김춘추에게 크나큰 한을 안겨주었다.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사람이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춘추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은 시작된다. 적지 고구려로 향하고 바다 건너 일본을 오갔던 외교적 노력은 실패했지만, 당 태종을 만나 20만 구원군을 약속받는데 성공했다. 동분서주하기 6년만인 진덕여왕 2년(648)의 일이다.
648년 4월 김유신은 옥문곡(玉門谷)전투에서 크게 이겨 군사 1천 명을 베고 의직(義直) 등 백제 장군 8명을 사로잡았다. 이에 김유신은 사로잡은 백제 장군 8명과 품석 부부의 시신과의 교환을 제의했다.
백제에서는 품석 부부의 뼈를 파내어 관에 넣어 보냈고, 유신은 8명의 백제 장수를 보내주었다.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인한 신라의 위기상황과, 이를 타개하는 과정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은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부각되고 654년 3월에는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뒤 김춘추는 대야성싸움에서 반역행위를 한 모척(毛尺)과 검일(黔日)을 붙잡아 처형하였다. 검일과 함께 대야성 함락에 일조를 했던 모척은 참수형(斬首刑)에 처했지만, 주모자 검일은 더 참혹한 거열형(車裂刑)을 집행했다. 사지(四肢)를 네 수레에 각각 매달고 말을 달리게 하여 사지를 찢는 가장 잔혹한 형벌이 거열형이다. 검일에게는 형을 집행하기에 앞서 죄목을 하나하나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 질러 없앰으로서 온 성안에 식량이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요, 품석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며,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이다.”
마침내 검일의 사지를 찢어 강물에 던졌다.
연호사(烟湖寺)
죽죽비(竹竹碑)를 지나서 모롱이를 돌면 취적산에서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남쪽 석벽 위에 지어진 연호사라는 작은 절을 만난다
최근에 만들어져 아직 편액도 없는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 산기슭에 비석군이 자리잡아 있고 조금 더 지나 계단을 내려가면 함벽루와 연호사가 이웃하여 있다
연호사 뒤로는 대야성이 있는 취적산(황우산이라고도 함)이 솟아 있고, 앞으로는 황강이 흐르는데 합천 8경 중 제5경으로 절벽을 등지고 푸른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연호사는 삼국시대 신라의 변방으로 군사 요충지였던 취적산 대야성전투에서 사망한 김품석과 처자, 그리고 신라 장병 2,000여 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643년 와우 선사가 절을 세운 것이라고 전해오나 이후 연호사의 내력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 극락전, 삼성각, 범종각, 요사채의 전각이 있다
연호사는 좁은 터에 가람이 들어 서 있다. 가람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황강이 흐르고 있어 더 이상 터를 넓히기는 힘들어 보인다.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황강에서 축대를 쌓아 터를 잡고 극락전이 강을 바라보고 세워져 있으며, 극락전 왼쪽으로 함벽루를 바라보며 요사채가 들어서 있다.
요사채 위에는 아담한 범종각이 있는데, 범종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극락전 마루를 지나거나 요사채 안으로 난 길을 통해 갈 수 있다.
범종각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작은 터가 나오는데, 연호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
극락전은 ‘ㄱ’자 모양으로, 정면 3칸을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양쪽 1칸씩은 종무실과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3칸에 만들어진 법당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불단을 조성하고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삼존불은 주존불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관세음보살 왼쪽으로 지장보살입상이, 대세지보살 오른쪽으로 신장상을 함께 봉안하고 있다.
아미타 부처님은 턱이 짧고 삼도가 없으며 법의는 양 어깨를 덮고 가부좌를 하고 있다.
아미타불은 1,300년 전에 건립된 합천 궁소면의 옛 성덕사의 불상으로,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성덕사가 파괴될 때 한 스님이 연호사로 도망오면서 업고 온 불상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삼존불 뒤로는 후불탱을 봉안하고 좌우에 지장탱과 신장탱을 봉안하였다.
극락전은 다듬돌로 2m 정도 높이로 기단을 쌓은 다음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정면에만 원주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극락전의 전체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올렸다.
극락전의 오른쪽 앞면에 정면 3칸, 측면 1칸, 왼쪽에 정면 1칸, 측면 1칸에는 누각식의 마루를 만들었는데, 이는 아름다운 비경을 자랑하는 황강을 조망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연호사 옆의 함벽루에는 이채(李采)가 지은 기문(記文)이 걸려있는데 연호사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누각 서쪽 바위 모퉁이에 난야(蘭若)의 옛 터가 있으니 세상에 전하길 연호사라고 한다. 다시 남은 재목(材木-함벽루를 짓고 남은 재목)과 힘으로 아울러 창건하니 옛터가 기울고 좁아서 돌을 파고 땅을 넓혀 함벽루 곁으로 약간 옯겼다'
이것을 보아 폐사가 된 연호사는 함벽루가 창건될 때 같이 재창건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 지은 연호사의 잎주문. 아직 편액도 달려있지 않다
주차장 옆 연호사의 요사체
요사체 천장에 그려진 그림
연호사의 아미타불과 성덕사(현재 일붕사)
연호사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
옛날 합천의 궁소면에 속했던 지금의 의령군 궁류면에는 성덕사라는 절이 있었다(현재 그 절터에 일붕스님이 세운 일붕사가 있다) 이 절은 약 1330년 전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때 최고의 격전지로 당시 봉황대 영역 안에서 전사한 수많은 신라군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건립된 절이었다고 한다. 태종 무열왕의 3왕자가 있었던 궁소 봉황대의 사찰에 비로자나불을 안치시켜 호국 일념으로 선왕의 덕을 기렸고, 성덕대왕이 봉황대의 산세가 빼어남과 선당의 얼이 베인 이 곳을 천추만대에 기념하자는 뜻에서 자신의 왕호를 내려 성덕사라는 귀족적 사찰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덕사는 조선시대 성종 25년 국령으로 불사 33개소를 회합하게되고, 그 영향을 받아 승려를 학대하며 사찰을 파괴하게 되자, 봉황대 성덕사는 어쩔 수 없이 궁류면 운계리 팔사곡 자사산으로 숨어들어 정수암으로 그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 후 누군가 다시 절에 들어와 암자를 파괴하려 했는데, 미륵불상 한 분이 도저히 넘어가지 않고 머리 부분만 떨어진 것을 보고 주지스님이 범상치 않은 일이라며 그 불상을 업고 합천군 연호사로 도망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연호사의 아미타불이 그때 가지고 온 불상이라는 것이다. |
함벽루(涵碧樓)-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59호
연호사에서 내랴다 본 함벽루
함벽루와 연호사
함벽루 뒷편 바위에 새겨놓은 송시열의 글씨 '함벽류'
연호사 왼쪽 아래에는 푸름이 젖어드는 곳이라는 하여 이름지어진 함벽루(涵碧樓)라는 누각이 있다. 함벽루는 고려 충숙왕 8년에 합주 지주사(陜州 知州事) 김군(金君)이 처음 창건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된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아정유고 제3권 기(記) 가야산기(伽耶山記) 에 '함벽루를 지은 사람은 여러 대(代)에 걸쳐 훈신(勳臣)이었던 상락군(上洛君)의 맏아들 김후(金候)였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의 안산군(安山君) 안진(安震)은 기문(記文)에서 '내가 객사를 돌아보며, 저 누(樓)는 어느 때에 지었는가 물어보니 그 곳에 있는 사람이 지금 태수가 신축한 것이다.....누를 함벽이라 한 이는 누구인가 하니 태수 자신이 이름 지은 것이다. 그럼 태수는 누구인가 어러 대로 공신가문인 상락공의 아들 김군(金君)이다'라고 적었다.
학촌(鶴村) 안진(安震 1617-1685)은 함벽루를 보고 '한 채의 누각이 처마와 기둥이 날며 춤추고, 단청의 그림이 눈부시고 빛나서 봉황새가 반쯤 공중으로 날아가는 듯 하다'라고 누각의 아름다움을 찬(讚)했고 춘산(春山) 김홍근(金弘根)은 처마물이 바로 강물에 떨어지는 광경을 '날아가는듯한 누선(樓船)이 포구에 정박한 것과 같다' 며 강과 누각의 기묘한 배치를 절찬하였다 산을 뒤로하고 누각에 앉으면 유유히 흐르는 황강을 보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으며, 비 오는 날에는 누각 처마에서 황강으로 바로 떨어지는 낙숫물을 보는 재미도 맛볼 수 있다. 지금은 처마 밑으로 황강변으로 산책길을 조성하면서 자연과 아우러진 그 아름다운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다.
함벽루에 결려있는 많은 기문(記文)과 시판(詩板)
함벽루는 옛 핏빛의 역사와는 다르게 오래전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이용되었는데, 이황, 조식, 송시열 같은 조선시대 당대 최고 이름난 선비들의 글이 누각 내부 현판에 걸려 있고, 뒤편 암벽에는 ‘함벽루’라 새긴 송시열의 글씨가 있다.
기문은 6편으로 안진(安震). 강희맹(姜稀孟). 송시열(宋時烈). 조지항(趙持恒). 이채(李采). 이상학(李相學)의 기문이 있으며, 시판(詩板)은 정이오(鄭以吾), 이황(李滉), 조식(曺植), 조준(趙俊), 최익현(崔益鉉) 등 많은 사람들의 찬시가 걸려 있다.
송시열의 기문
이두순의 기문
최익현의 시판
이대형의 시판
남명 조식선생의 찬시
喪非南郭子(상비남곽자) 남곽자 처럼 무아지경에 이르지는 못해도 江水渺無知(강수묘무지) 흐르는 강물은 아득하여 끝을 모르겠네 欲學浮雲事(욕학부운사) 뜬구름같은 삶을 배우고자 하여도 高風猶破之(고풍유파지) 가을바람 불어와서 흩어바리는구나
남명 조식선생의 시판
함벽루는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59호로 지정되었다.
비석군
합천군수 이증영 유허비
연호사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똑 산비탈에 비석군이 있는데 이중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67호로 지정된 이증영 유허비가 있다.
비석은 조선 명종 14년(1559년)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남명 조식(1501~1572년) 선생이 지었고, 글씨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던 고산 황기로 (1521~1567년)가 썼다고 한다.
그런데 안내판에는 이증영 유허비(李增榮 遺墟碑)가 아닌 유애비(遺愛碑)로 되어 있다. 유허비는 ‘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고 유애(遺愛)는 ‘고인이 생전에 아끼던 물건’이라는 뜻으로 엄연히 다른 말로서, 유애비라고 하면 .'생전에 아끼던 비석'이라는 뜻이 되지 않을까? 안내문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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