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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양산 통도사 극락암을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3. 2. 12.

 

 

양산 통도사 극락암을 찾아서

 

 

극락암은

통도사의 암자로

경봉스님이 주석하셨던

곳으로 고려 충혜왕5년에 창건

되었으며 1968년 경봉스님이 중수를

하였는데 암자로는 큰규모로 극락선원이

있어서 많은 수행승이 머물고 있으며 특히

경봉스님이 조실로 온 뒤로 많은 수행승들이

몰려들자 선원을 9동104칸으로 늘려 지었으며

1973년부터 매달 첫째주 일요일마다 정기법회를

열고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건물로는 주법당인

극락암. 연수당. 수보각. 조사각. 수세전. 영월

루. 삼소굴. 여시문 등이 있는데 삼소굴은 한국

현대불교의 대표적 고승 경봉스님이 50 여년간

머물다 입적한 곳으로 경봉스님은 시. 서. 화.

절에 선과 차까지 갖춰 오절로 불렸던 대선

께서 거처 하시던 곳으로 유명하며 입구

있는 연지는 극락영지로 영취산의 봉

리가 비친다고 하나 지금은 연꽃을

심어 여름철이면 연꽃이 홍교와

어울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극락암은 통도사의 암자로 경봉스님이 주석하셨던 곳으로 고려 충혜왕5년에

창건되었으며 1968년 경봉스님이 중수를 하였다고 합니다 

 

 

암자로는 큰규모로 극락선원이 있어서

많은 수행승이 머물고 있으며

 

 

특히 경봉스님이 조실로 온 뒤로 많은 수행승들이 몰려들자

선원을 9동104칸으로 늘려 지었다고 합니다

 

 

극락암은 1973년부터 매달 첫째주 일요일마다 정기법회를 열고 있는데

현존하는 건물로는 주법당인 극락암· 연수당· 정수보각· 조사각·

수세전·영월루· 삼소굴· 여시문 등이 있습니다

 

 

극락암의 삼소굴은 한국 현대불교의 대표적 고승 경봉스님이 50 여년간

머물다 입적한곳으로 스님은 시·서·화 삼절에 선과 차까지 갖춰

오절로 불렸던 대선사께서 거처 하시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극락암은 1332년(고려 충혜왕2)에 창건되었으며 창건 후 조선 후기

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1758년(조선 영조 34)에 철홍이

중창 하였다는 기록이 전할 뿐입니다.

 

 

정수보각이 과거에는 선원이었으나

지금은 요사체로 쓰고 있습니다.

 

 

정수보각이라는 요사체입니다 

 

  

이 암자에는 극락선원이 있어서 늘 많은 수행승이 머물고 있으며 특히

1953년 11월 경봉스님이 조실로 온 뒤부터 많은 수행승들이 몰려들자

1968년에 선원을 9동 104칸으로 늘려 지었다고 합니다.  

 

 

극락암의 현존하는 건물로는 주법당인 극락암과 연수당· 정수보각·

조사각. 수세전· 영월루· 삼소굴 등이 있습니다.

 

 

극락암 여여문(如如門)으로 들어갑니다

 

 

극락암 입구에 있는 여여문 현판 글씨는

경봉스님의 친필이라 전합니다

 

 

극락암 호국선원인데 과거에는 아래

정수보각이 선원이었습니다.

 

 

아미타 부처님을 주불로 모셔놓은 극락암 극락전입니다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수세전 입니다

 

 

극락암 수세전(壽世殿)입니다

 

 

일반적으로 삼성각 또는 칠성각으로 불리는 전각입니다.

 

 

조사각 현판이 보입니다

 

 

태극문양이 선명한 큰 징이 아마도 종을 대신하는 가 봅니다

 

 

극락암의 본전(本殿)이라고 하는 무량수각(無量壽閣)입니다

극락암이란 현판 안쪽에 無量壽閣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원광제 현판은 당대를 대표하는 서화가였던 석재의 글씨로

그가 휘호한 글씨 현판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삼소굴의 현판 글씨는 석재의 글씨로 당대를 대표하는 서화가였던

석재로 그가 휘호한 글씨 현판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삼소굴은 경봉이 1982년까지 거처하던 곳이고 조사각에는 석가모니불과

33조사, 보조국사 지눌, 보우 등의 영정을 모시고 있습니다.

 

 

경봉스님의 선필(禪筆)족자는 '끽반끽다인생(喫飯喫茶人生) 일상삼매

지소식(日常三昧之消息) 회덕마(會德磨) 차(茶)' 밥 먹고 차 마시는

살림살이가 일상 삼매의 소식이라 이 소식을 알겠는가!

 

 

경봉스님(1892∼1982)은 현대의 고승으로 광주김씨이며 속명은 용국.

호는 경봉, 시호는 원광이고 경남 밀양출신으로 아버지는 영규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 입니다.

 

 

경봉스님은 7세 대 밀양의 한학자 강달수에게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 에 어머니를 여의고 난 뒤 1907년 6월에 출가하여 양산

통도사 성해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1908년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9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청호를 계사로사미계를 받았습니다.

 

 

경봉스님은 1912년 4월 해담으로부터 비국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하루는 불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푼어치의 이익이

없다(終日數 他寶 自無半錢分)."라는 구절에서 큰 충격을 받고,

참선공부를 하기 위하여 내원사의 혜월을 찾아 법을 물었으나

마음 속의 의문을 해결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과의 선담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 하는 소소영영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하면서

정진을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화엄산림법회에서 법주 겸 설주를 맡아 철야로 불사하고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일물에 얽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 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 20 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82세부터는 매월 첫째 일요일에 극락암에서 정기법회를 열었으며

90세의 노령에도 시자의 부축을 받으며 법좌에 올라 설법하였 는데,

매회마다 1, 000여명 이상의 대중들이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가람수호에도 힘을 기울여 통도사의 삼성반월교와 장엄석등 18좌를

세웠고, 극락암 조사당의 탱화조성 및 추모봉행, 특별 정진처 인

아란야의 창건, 극락암 정법보각 신축 및 무량수각의

중창 등을 주관하였다.고 합니다

 

 

1982년 7월 17일에 미질을 보인 뒤 문도들을 모아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라 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습니다.

 

 

극락암 뒷편으로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대나무와

소나무 숲은 깊은 산속을 품은 듯 합니다

 

 

산정약수비(山精藥水碑)와 산정약수터 입니다

 

 

극락암 영월루(暎月樓)입니다

 

 

 절간 문턱이 다 닳도록 넘나든다드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경봉장학회를 설립하였으며, 18세 때부터 85세까지 67년 동안 일지를 남겼는데,

이 일지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 최근세사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영월루와 정법안장 이라는 현판 글씨가 나라히 있습니다

 

 

극락암 입구에 있는 연지는 극락영지로 영취산의 봉우리가 비친다고 하나

연꽃을 심어 연꽃이 홍교와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줍니다  

 

 

극락암 입구에 있는 극락영지는 영취산의 봉우리가 비치는 연못으로,

연못을 가로 지르는 무지개모양의 홍교가 놓여 있습니다.  

 

 

극락암 아래에는 아란야라는 수행 도량이 있는데 1969년 경봉스님이

세운 2층 건물로 이곳에 들어가면 3년은 참선에 몰두해야 합니다

 

 

이 산의 절경이 연지에 비추었다는데 ...

  

극락암 너머로 바라본 영축산과 뒷편의 대나무와 소나무숲이

극락암을 감싸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바라고 하여

괴로움와 번뇌만이 가득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세계이기에

깨달음의 영격으로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고통과 번뇌의 결박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사바세계이기에,

 

이곳 사람들은

해탈과 깨달음을 갈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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