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불암의 발견과 ‘황법련화공덕비’
칠불암 마애조상군
칠불암은 경주 동남산 끝머리 봉화골에 있는 칠불암 마애조상군을 말한다
이곳에는 통일신라기인 8세기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7구의 불상이 마애불로 남아 있다
뒤편 큰바위면에 본존불과 양 협시불, 앞쪽 바위에 돌아가며 네개의 불상, 해서 모두 일곱분의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과 사방불(四方佛)의 장대한 규모 그리고 이 곳에서 출토된 경석편(經石片),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된 막새기와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음으로 미루어 볼 때 국가적 차원에서 세운 거대한 가람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 칠불암의 경내 건물로는 요사채를 겸한 암자 1채와 삼성각(三聖閣)이 있을 뿐이다.
칠불암 불상군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 200호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9월 2일 '국보 제312호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으로 명칭을 바꾸어 승격,변경 되었다
황법련화공덕비(黃法蓮花公德碑)
그런데 칠불암 마당 한구석에는 ‘황법련화공덕비(黃法蓮花公德碑)’이라고 쓰인 작은 비가 초라하게 서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앞을 자주 지나건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이 비석의 주인공 황법연화(黃法蓮花)란 누구이며 여기에 얽힌 이야기는 무엇일까?
칠불암 아래 남산리에 ‘황(黃) 씨’라는 성을 가진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1930년대의 어느 봄날, 황할머니는 산나물을 캐기 위하여 이곳 봉화골을 찾아 들었다.
한참동안 산나물을 찾아 헤메다가 흐르는 땀을 훔치며 잠시 쉬기 위하여 산 능선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그 때 잡목과 칡넝쿨에 가려진 숲속의 큰 바위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불상의 머리를 발견하였다
수풀을 헤치고 좀 더 가까이에 다가갔을 때 한 분이 아닌 일곱 분의 부처님을 접견할 수 있었다. 황할머니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제자리에 엎드려 108배를 하고는 황급히 동네로 내려와 집안 식구들에게 전하였다
이튿날 황할머니는 자기 아들을 데리고 낫이랑 연장을 갖고 다시 올라갔다. 불상근처를 제초하고 주변의 잡목을 제거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그런 후 아들과 함께 바로 옆에 작고 초라한 암자를 짓어 살면서, 석불을 닦고 손질하며 정성을 다하여 칠불상을 모셨다. 그리고 법화연이라는 법명도 가지게 되었다
관계 관청에도 이 사실을 알려 그 때부터 일곱분의 부처가 있다고 하여 ‘칠불암’이라 불리어졌으며 일제에 의해 주변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졌다
그후 관리하던 황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들 김만춘이 관리하다가 1973년 작고하고 지금은 비구니스님 두분이 불도를 닦으며 암자를 관리해오고 있다.
황할머니는 죽어서도 멀리가지 못하고 이 근처 서남쪽 산기슭에 묻혀, 항상 칠불암을 내려다보고 계신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님이 사시던 집은 아랫마을 염불사지 곁에 있는데 손자 김덕봉씨가 살다가 몇년전에 세상을 뜨고, 현재 그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칠불암의 외국인 비구니스님이 그린 기와그림
우연히 민간인의 눈에 띠어 수풀 밖으로 나온게 된 칠불암마애조상군은 불심의 도량으로, 등산객의 휴식터로, 문화재의 보고로 남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몇년 전 석축 보수공사 때에는 일제 때 만든 칠불암 문화재 표지석이 나와 마당 한쪽에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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