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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경주분황사를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2. 9. 5.

경주분황사를 찾아서  

 

분황사(芬皇寺)는

 향내날 분, 임금황, 절사를

 쓰고 있으며 분황사 연꽃(분다리),

 부처님(각 황)이란 세상의 괴로움과 번뇌에

 물들지 않은 분다리와 같은 부처님의 도량이란

  뜻으로 신라 27대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하였으며 조선 선조25년(1592)

임진왜란때 불에 타서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분황사(芬皇寺) 

 

칠처가람이란?

흥윤사(경주공고자리) 영흥사(경주시 탑동 수원지 동편) 황용사,

영묘사(오릉교북쪽 흥윤사터) 사천왕사(낭산남쪽 배반) 담엄사

(오릉주차장 자리) 분황사는 칠처가람중의 하나로 법등이

 계속 이어져오고 있는 사찰입니다  

 

  

 분황사를 창건하게 된 까닭은?

진평왕이 54년간 즉위하였으나 왕자가 없이세상을 뜨자 덕만공주가

27대 선덕여왕이 첫 여왕으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나라에서는 여왕이라고 얕보고 번갈아 가며

침략을 계속해 오게 됩니다

 

  

 선덕여왕은 부처님의 위력으로 나라를 지키고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을려고

절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고구려는 3금당이 모두 탑을 향하고 있는데

 분황사는 1탑 3금당에 품자형 가람배치라는

 신라문화권에서는 처음으로 독특한

가람배치를 하게 됩니다

 

     

 모전석탑이란?  

분황사는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은

 모전석탑을 중앙금당 앞에 두고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특색입니다   

 

  

탑은 탑파 또는 스투파라고도 하며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만들어진 것으로

 옛날에는 불상보다 탑을 더 숭배

하였다고 합니다

 

  

탑은 목탑, 전탑, 석탑 등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모전석탑이란 돌을 벽돌모양

으로 다듬어서 쌓은탑입니다

 

 

 분황사의 모전석탑은 안산암으로 동해안에

있는 대본 대왕암,의견대 부근의

돌을 정성드려 옮겨와서

쌓은 탑이라고 합니다

 

 

 

 이 모전석탑은 처음에는 9층이었다고합니다만

지금은 3층만 남아서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은 탑으로

높이가 9.3m의 모전석탑입니다

 

 

 

분화사 창건당시에 만들어진 석탑이 임진왜란때

 반파된 것을 조선시대 때 이 절의 스님이

수리할려고 하다가 오히려 더욱 파손시켜

1915년에 다시 수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는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동남쪽에 쌓여있는 탑재들의

 량으로 짐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산암으로 만든 벽돌 모양의 탑대들을 쌓아둔

 모습입니다 이 많은 탑재들을 모전석탑위에

올린다면 7층이나 9층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추정입니다

 

 

 

지금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탑으로

 

 이러한 탑을 모전석탑이라고 하며

 선덕여왕 3년(634)에 세워진 9층탑

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현재는 3층만 남아 있습니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탑신은

윗쪽이 아랫쪽 보다 약간 좁습니다

 

 그리고 1층의 네면에는 입구가 열려 있는

 감실을 만들어 놓았는데 입구 양쪽에는

인왕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이 인왕상은 반라(半裸)이며 옷 무늬가

 모두 다르고 불법을 수호하는 답게

막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전석탑에서 탑의 1층 네면에 감실을

 만든 것은 목탑의 뜻을 살린

것이라고 합니다

 

 

 

불탑은 대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

지는데 분황사 모전석탑은 현재 탑의

정상에 앙화만 얹혀 있습니다

 

 

 

창건 당시에는 감실 안에 불상을 안치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 남쪽에 있는 석조여래상은

탑 건립 당시의 것이 아니고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분화사 석탑에는 기단의 네 모퉁이에 돌사자가

놓여 있는데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 

 

불교에서는 사자를 성스러운 동물로 생각하여

불전이나  불탑,불상을 수호하고

장엄하는 역할을 합니다 

 

 

  

 석탑의 기단에 놓여 있는 동쪽의 두 마리는

물개의 형상과 비슷한 모양입니다

 

 

 

서쪽의 사자는 앞발을 세우고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입니다  

 

 

   

 

 이 사자상은 호탑의 의미로 네마리가 안치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 사자상은

앞다리가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기단부는 자연석으로 쌓고 그 위에 긴 돌의

 아랫부분을 다듬어 고르게 맞추어 놓았는데

 

 이렇한 공사 방법을 그랭이 공법이라고

합니다 한 변이 약 1.3m 높이는

1.06m의 크기가 다른 막돌입니다

 

 

 

화쟁국사비는 고려 숙종 6년(1101) 8월에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겨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웠으나 비신은 없어지고

비신을 받쳤던 비대만 절 근처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추사 김정희가 비신이 없어지고 비대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 비 대좌 뒷쪽에 차화쟁국사

지비적(此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석정(石井)은 삼용변어정(三龍變魚井) 또는

 호국변어정(護國變魚井)이라고도 하는데

 

 우물의 겉모양은 팔각으로깨달음에 이른는

 8가지 바른길인 팔정도를 상징하며

 

내부는 원형은 원불의 진리를 상징한다고 하며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제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보면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술법을 써서 신라의 호국용 3마리를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대나무 통에

넣어 가지고 가는 것을

 

호국용의 아내 3명이 원성왕에게 알리자 원성왕은

 즉시 뒤쫓아가 하양관에서 되찾아 와 동지

청지(동천사의 샘)와 분황사 우물에

다시 넣어주었다고 합니다  

 

  

 

 원효대사는 경산 압량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가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져서

 품속으로 들어 오는 태몽을 꾸고 

아기를 가졌다고 하며

 

길을 가다가 밤나무 밑에서 갑자기 해산을

하게 되어 남편의 옷을 밤나무에 걸어두고

 누워있었다고 하는데 이 나무 이름을

사라수(옷이 날리는 모양)라고

하였답니다

 

 

 

 보광전은 분황사 창건당시의 중금당이고 경덕왕 때

 약사여래상을 모셨을 것으로 추정되나 금당

 자리의 서쪽에 칭쳐 서향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주심포맛배지붕의

작은규모입니다

 

 

 

 보광전에는 현재 약사여래입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가 3.45m입니다

 

 

 

머리에는 낮은 나발과 도금한 계주가 있으며

 얼굴은 둥글고 풍만한데

 

눈 코 입이 작고 목에 삼도가 없으며  두손을

 수평으로 뻗고 왼손에는 약합을 들어

약사여래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약사여래상이 있고 그 좌우에는

 보관에 태양을 그린 일광 보살상과

 달을 그린 월광 보살상이

 협시하여 서 있습니다

 

이 탱화의 화기에 1901년에

제작한 기록이 있습니다

 

 

 

 대한 광무 6년 임인 8월 봉안간 명활산 분황사

(大韓光武六年壬寅八月奉安干明活山盆皇寺)

라고 쓰여진 화기가 있습니다

 

 

 

분황사천수대비맹아득안 (盆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

경덕왕 대에 한기리에 사는 여인인 희명에게

아이가 태어나서 다섯살이 되자 갑자기

 눈이 멀어서 그의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에 가서

 

 왼쪽 전각 북쪽에 그려진 천수대비 앞에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노래입니다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합장하여

천수관음전에 비옵나이다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 중에서 손 하나를 놓아

 눈 하나를 덜어내어 두 눈 다 먼 나에게

 하나쯤은 슬거머니 주셔서 꽂아 주소서

 

아아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천수대비야 말로

자비심이 큰 부처가 될 것입니다

  

 

 

 죽마타고 파피리 불며 항간에서 놀던 벗

하루 아침에 푸른 두눈 잃어 버렸네

 

대사의 비로우신 보살핌이 없었던들

버들 꽃 피는 좋은 봄을 언제나

헛되이 보낼 것을 ,

 

 

 

 쓸 대 없다는 말을 한다고 하는데 이 말은

 

 원효가 아들 설총에게 빗자루를 주면서 네 마음을 쓸듯이

마당을 깨끗이 쓸어라고 하셨는데 설총이 마당을

쓸려고 나와보니 누군가 마당을 다 쓸어 놓아

 대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쓸대가 없다- 쓸 대 없는 소리를 한다 

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사찰에서 법회가 열릴때 당이라는 깃발이나 괘불을

다는 기둥을당간이라고 하는데 이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서 양쪽에 세우는

기둥을 당간지주 라고 합니다 

 

 

 

 

 당간지주에는 3개의 간공이 있으며 두 간주 사이에는

 거북을 조각한 간대가 있습니다 목은 움추린

모습으로 등에는 구갑무니가 없습니다

 

 

 

   

 1965년 12월 분화사 북쪽 담장에서 30m 가량 떨어진

 북쪽 우물 속에서 목 없는 불상등 폐불이 13구

보살입상 1구, 불두 5점 광배 1점을 찾아서

경박물관 노천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1975년에는 동국대박물관에서 보광전(법당)을 중심으로

발굴하였으며 1990년에는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연차적 발굴계획에 따라 가람배치를 밝히기

위해서 지금도 발굴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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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 스님과 분황사 이야기

 

신라 문무왕 때 광덕과 엄장이란 두 스님이 있었습니다.

이 스님들은 네 것 내 것을 가리지 않을 만큼 몹시 절친한 사이여서

공부하면서도 서로 알려주고 도우면서 성불을 향해 정진했습니다.

 

『자네가 먼저 극락에 가게 되면 반드시 알리고 가야 하네.』

『물론이지 이 사람아. 자네도 마찬가질세.』

두 스님은 밤낮으로 만나기만 하면 이렇게 약속하면서

사이좋게 공부를 겨뤘습니다.

 

분황사 서리에 숨어 신 삼는 것을 업으로 살고 있던 광덕 스님은

부인을 거느렸는데 그의 처는 분황사 노비였습니다.

엄장 스님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숲의 나무를 벤 후 밭을 일궈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엄장 스님은 저녁공양과 예불을 마친 뒤 집 주위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석양에 물든 하늘빛은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초여름 저녁 미풍에 날리는

송화가루는 싱그러움을 더했습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한 줄기 밝은 빛이 땅까지 비추더니

광덕 스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

엄장 스님은 얼른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구름 속에선 신비스런 하늘의 음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튿날 엄장 스님이 광덕 스님이 살고 있는 서리로 가보니

과연 광덕 스님은 열반에 들어 있었습니다.

 

『언제 가셨습니까?』

『어제 저녁 석양 무렵에 가셨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광덕 스님의 우정 어린 마지막 인사를 들은 엄장은 그 부인과 함께

유해를 거두어 다비식을 치뤘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엄장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스님,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셔야지요.』

 

『네. 그런데 부인 혼자 두고 가려니 왠지 마음이 안되어서 발길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혼자 지내실 수 있겠습니까?』

『염려마옵시고 어서 돌아가십시오.

혼자인들 어떻고 반쪽이면 어떻습니까?』

 

엄장은 일어설 생각을 않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부인, 부인께서도 알다시피 광덕과 저는 서로 가릴 것 없는

절친한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이제 그가 먼저 서쪽으로 갔으니 그와 살았듯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광덕 스님 섬기듯 성심껏 시봉하겠습니다.』

 

광덕의 처가 거리낌 없이 선뜻 답하자 엄장 스님은 약간 의외이긴 했으나

쉽게 뜻을 이루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날 밤, 밤이 깊어 두 사람은 각각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엄장이 그 부인 곁으로 다가가 잠자리를 함께 하려 하자

부인은 놀라는 기색으로 말했습니다.

 

『스님이 서방극락을 구함은 연목구어와 같지요? 

마치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엄장은 의아했습니다.

 

초저녁, 선뜻 함께 살기를 응낙하던 부인의 모습이

마치 고승의 준엄한 자태로 바쳐왔기 때문입니다.

 

엄장은 문득 부끄러운 생각이 일었으나

마음을 굳게 다잡고 다시 물었습니다.

 

『광덕도 이미 수년간 그렇게 살았는데

나라고 안 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오?』

 

『남편은 10여 년이나 저와 동거했으나

하루 저녁도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밤마다 단정히 앉아 한결 같이 아미타불 명호를 부르거나

16관(아미타경에 설해진 대로 태양과 물 등 16가지 일을

명상하는 관법)을 하며 정진했습니다.

 

또 밝은 달빛이 창에 비쳐들 때면 그 빛을 타고 가부좌를 틀었으니

어찌 미혹을 깨고 서방극락에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엄장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일 뿐이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부인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대개 천 리를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으로써 알 수 있는데,

지금 스님의 생각이 동쪽에 있으니

서방은 미처 알 수가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엄장은 부끄러워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부인에게 큰절을 올렸습니다.

 

『아니, 스님 왜 이러십니까?』

 

『몰라 뵈옵고 무례했던 점 널리 용서하옵소서.』

엄장은 부인에게 크게 사죄한 후 날이 새자마자 분황사로 달려가

원효 스님에게 간밤의 이야기를 사실대로 고한 후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원효 스님은 징관법(징을 치면서 산란한 생각을 없애며

선정에 들게 하는 특수 관법으로 추측되고 있다)을 일러줬습니다.

엄장은 그 길로 남악 암자로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자신의 공부가 헛되었음을 절감하면서

그는 다시 시작하는 자세로 공부에 임했습니다.

 

엄장 스님은 오직 한마음으로 관(觀)을 닦았습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초여름 해질 무렵,

 엄장 역시 광덕 스님처럼 극락왕생했습니다.

 

광덕 스님의 부인은 비록 분황사 노비였지만

사실은 관음의 19응신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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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수관음이 희명의 아이 눈을 뜨게 해 준 이야기

 

분황사에는 광덕과 엄장 스님을 깨우친 관음응신 이야기 외에

희명의 아이가 눈을 뜨게 한 천수관음의 영험담도 오래도록 전래되고 있습니다.

 

신라 35대 경덕왕 때 한기리에 사는 희명이란 여인의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지 5년 만에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천지를 모르고 뛰어놀던 아이가 갑자기 시력을 잃다니

 내가 전생에 무슨 큰 죄를 지어 이렇게 업보를 받게 되는가?

 

희명은 천지가 무너지는 억장을 가슴에 안고 분황사 좌전 북쪽에 있는

천수관음 앞에서 향가를 부르며 지극정성으로 빌고 또 빌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합장하여

 

천수관음 전에 간절히 비옵니다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 중에서

 

손 하나를 놓아 눈 하나를 덜어내어

 


두 눈 다 먼 나에게 하나쯤은

 

슬그머니 주셔서 꽂아 주소서

 


아 아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천수대비는 자비심 큰 부처가 될 것입니다



천수천안을 가지고 계신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병을 낫게 해 준다고 합니다

 

특히 솔거가 그린 관세음보살이 있는 분황사에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믿고 었습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 희명의 애타는 심정을 굽어 살피셨는가?

희명의 눈이 씻은 듯이 낳았습니다

 

희명의 아이가 눈을 뜨자 그 후 분황사 인근 백성들은

이곳을 찾아 행복을 빌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서 찬미하는 글은?  

 

죽마타고 파 피리 불며 놀던 벗  

하루아침에 푸른 두 눈 잃어버렸네


대사의 자비로우신 보살핌이 없었던 들  

버들 꽃 피는 좋은 봄을  

언제나 헛되이 보낼 것을

 


이 소문이 퍼지자 분황사는 다시 한 번 희망을 주는 절로

온 신라인들의 가슴 깊숙이 새겨졌다고 하는 설화입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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