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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스크랩]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 문무대왕 수중릉-대왕암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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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 문무대왕 수중릉-대왕암

 

 

해안에서 바라본 대왕암

  

동쪽 바다에서 바라본 대왕암

 

북쪽 바다에서 바라몬 대왕암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불룩 솟아있는 대왕암.

먼 발치에서 바라본 대왕암의 모습은 그저 거대한 암초 덩어리로 보이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네 개의 큰 암초덩어리가 외곽을 둘러싸고 있고 그 안쪽엔 바닷물이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중앙엔 거대한 돌이 물속에 잠겨있다. 십자모양으로 물길이 나있어 안으로는 바닷물이 늘 넘나들고 있다.

이곳이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文武大王)이 돌아가시자 능지탑에서 화장을 하고 뼛가루를 뿌렸다는 해중왕릉(海中王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대왕암(大王巖)이라고 부른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의 능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월1일 문무왕이 죽자..... 동해에 있는 거대한 바위 위에 장사를 지냈다."

동해에 떠있는 바위에서 장례를 치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바위는 '감은사 동쪽바다에 릉이 있다'고 삼국유사에 적혀 있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 바다에 인접해 있는 감은사지는 79년 발굴당시 '감은사'라고 글씨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감은사터임이 확실하게 밝혀진 곳이다. 현재 절터에는 두기의 3층석탑과 주춧돌만이 남아있다.

 

삼국유사는 "감은사는 처음 문무왕이 창건했으나 완공을 보지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이 완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무왕의 뜻을 이어받아 완공한 절, 그래서 절의 이름도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의 감은사다

 

삼국유사엔 이견대에 대한 기록도 있다.

"문무왕의 유언을 간직한곳이 대왕암이고 절은 감은사며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곳에 이견대가 있었다"

 

삼국사기엔 왕들이 이견대를 찾아와 바다를 바라봤다는 기록이 있다. 대왕암 가까이에 감은사와 함께 이견대가 있었던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대왕암 주변의 유적과 기록들은 이곳이 문무왕의 수중릉임을 말해주고 있다.

 

 

감은사지

 

이견대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릉

 

문무대왕릉, 감은사, 이견대의 위치(현재의 이견대는 조선시대의 역원자리이며, 신라시대의 이견대는 이견대(추정)이라고 표시된 지점, 즉 산 위쪽의 장소라는 학설이 일반적이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뤘지만 문무왕은 늘 불안했다. 백제를 멸망시킬 때 연합전선을 펼친 당나라가 이번에는 신라를 복속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왕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여

“내가 죽으면 시체를 동해에 묻어 주시오. 내 죽어서라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킬것이오.”

라는 유언을 내린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대왕암

북쪽에서 바라본 대왕암

동쪽에서 바라본 대왕암

 

동쪽 입수부

 

서쪽 출수부

 

 

 

대왕암은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봉길해수욕장 앞에 있다. 육지에서 약 220m 떨어져 있으며 풀 한포기가 자라지 않고 주변의 바위가 울퉁불퉁해서 걸어 다니기도 불편한 암초이다.

대왕암과 주변의 작은 바위들은 별개가 아닌 전체가 하나의 큰 바위로 되어 있다.

그 크기는 남북의 길이가 59m, 동서의 길이가 53.5m이고(부속 바위 포함) 면적은 약 1,828㎡(552평)이다.

대왕암의 가운데에는 수심 1.5m의 웅덩이가 파여 있어 항상 바닷물이 채워져 있고 바위의 동서남북 네 곳에는 바다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물길이 파여 있다.

 

대왕암의 내부 바위면에는 많은 풍화가 진행되었지만 내부 곳곳에는 인위적으로 돌을 깎은 흔적이 있다.

튀어나온 부분을 정으로 깎은 흔적이다. 아마 대왕암 안쪽을 동그랗게 다듬기위해 튀어나온 부분만 깎아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개석을 놓았는데, 사람이 죽으면 시신의 머리를 북쪽으로 놓듯이 남북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다

 

대왕암의 바위

 

문무대왕 수중릉의 암석은 토함산에서 동해로 내려오는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화강암과 같은 성격을 띤 암석과 동일하다

 

 

 

 

 

 

 

 

 

 

 

 

 

대왕암의 주변 수심은 약 15m 내외이고, 대왕암의 동쪽 입수구와 서쪽 출수구의 높이 차이는 출수구가 약 15㎝ 정도 낮다.

입수구는 대왕암의 동쪽, 즉 넓은 바다가 있는 쪽으로 해수면보다 약간 높아  바닷물이 항상 많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파도에 의해서 입수된다. 출수구는 그 반대로 서쪽, 즉 육지쪽이며 파도에 의해 동쪽으로 들어온 바닷물이 서쪽으로 빠져나오고 일부는 남쪽과 묵쪽의 물길로 빠져 나온다.

 

 

 

대왕암 내부의 개석

 

  

 

대왕암 내부 웅덩이에 있는 개석

 

 

대왕암의 가운데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웅덩이가 있고 웅덩이 가운데에는 큰 돌이 놓여 있다.

이 큰 돌이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주목을 한 부분이다.

마치 고인돌의 덮개돌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돌 아래에 어떤 구조물이 있는지 지금까지 발굴을 한번도 하지 않았기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중앙에 놓여있는 돌은 전체적으로 길쭉하면서도 둥그스름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한쪽부분이 약간 떠있긴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안정되게 바닥에 붙어있었다.

 

마치 거북이등처럼 생긴 이 돌(개석)의 크기는 남북의 길이 3.74m, 동서의 길이 2.46m, 높이 1.35m이고, 개석의 무게는 약 15톤 정도 내외이다.

무게가 엄청나고 대왕암 내부 남쪽에 개석의 크기와 비슷한 공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개석은 외부에서 가지고 온 돌이 아니고 대왕암 자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왕암은 이렇게 1300여년전 신라 사람들이  자연적인 조건을 최대한 살려 문무왕의 릉을 조성한 것이다.

안쪽 웅덩이를 고르게 다듬고 주변에 있던 거대한 돌을 중앙에 배치했으며 마지막으로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수로를 다듬었던 것이다.

 

몇년 전 KBS역사 스페셜에서 문화재청의 협조아래 대왕암 내부의 물을 퍼내고 조사를 한 일이 있었는데 중앙의 개석 아래에는 어떠한 구조물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 문무왕이전에는 왕의 시신을 화장해서 바다에 뿌린 예가 전혀 없었으나 문무왕 이후에 화장을 하여 바다에 뿌린 왕들이 있었음이 기록에 나타나 있다.

"以遺命 燒柩於<法流寺>南 散骨東海"</法流寺>

이 기록은 34대 효성왕의 장례에 대한 기록인데  왕의 유언에 따라 관을 법류사 남쪽에서 불에 태우고 유골을 동해에 뿌렸다고 한다.

"死後 依佛制燒火 散骨東海"

또 37대 선덕왕도 죽은 후에 불교의 법식대로 화장하여 동해에 뿌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무대왕을 비롯한 세분의 왕 모두 동해에 뿌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역시 호국룡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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