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 최고의 종가 벽송사를 찾아서
함양 벽송사는
조선 중종(1520년)때
벽송 지엄선사에 의해 창건
되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로
조선시대 불교의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
들이 벽송사에서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선교 겸수한
대 종장들을 109분이나 배출하여 백팔조사 행화
도량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사찰로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을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부용이 활짝 핀것과 같은 부용만개와 푸른학이 알
을 품고 있다는 뜻의 청학포란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으며 3층석탑과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있는 목
장승에 기원하면 사랑이 깊어지고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과 소원이 이루어지며 미인송에 기원
하면 미인이 된다고 하는데 벽송사 선방에서 도
인이 많이 나와서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
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 하며 한국전쟁
때 완전 소실되는 슬픈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으나 벽송사는 60년대 구한원응대
사의 원력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대한
불교 조계종 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입니다
함양 벽송사는 조선 중종(1520년)때 벽송 지엄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입니다
함양 벽송사는 조선시대 불교의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 교화
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선교 겸수한 대 종장들을
109분이나 배출하여 백팔조사 행화도량 이라고 하는 사찰입니다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을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부용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와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의
청학 포란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함양 벽송사는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있는 목장승에 기원하면 사랑이 깊어
지고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과 소원이 이루어지며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고 하는 사찰입니다
벽송사는 부용만개와 청학포란형 사찰이라 선방에서 도인이 많이 나와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 합니다
벽송사는 한국전쟁 때 완전 소실되는 슬픈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으나
60년대 구한원응대사의 원력에 의해 중건되었습니다
주차장에서 조금 올라오면 갈림길이 있는데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벽송사이고 좌측으로 가게 되면 서암정사가 있습니다
삼거리에 서 있는ㄴ 안내판으로 지리산 둘레길 안내판인데 국립공원 탐방로 연결 안내도 입니다
벽송사는 간화선의 제일 조정으로서의 역사를 간직한 한국선불교의 근본
도량이 되는 것으로 벽송 대사의 뒤를 이어 벽송 산문의 제2대
조사에 오른 분이 부영 영관선사 입니다.
부용선사는 도가 높고 학문이 깊어 배우러 오는 승속제자가 문전성시를 이루
었는데, 특히 영호남 일대에 부용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선비가 수 없이 많아
“전단향나무를 옮겨 심으니 다른 나무들도 향기가 난다”
라고 하는 말이 널리 유행하였다고 합니다
벽송사는 부용영관 문하에 수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 서산대사라 불리는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입니다.
벽송사의 가람배치는 전면에는 산문과 종루가 있고, 보광전의 좌우에는
방장선원과 간월루가 있으며, 뒤편에는 산신각이 있습니다.
서산대사는 깨달음을 얻은 뒤 벽송 산문의 제3대조사가 되어 지리산 일대에서
행화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군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전력을 다 하게 됩니다.
한국 선문의 거장 청허휴정이 벽송 조정의 제3대조사로 서산대사 문하에
사명대사와 청매조사도 이곳에서 득도하여 크게 불법을 떨치게 됩니다.
부용영관의 다른 한 사람의 수법제자인 부휴선수선사도 벽송사에서 도를
깨닫고 벽송 산문의 조사가 되어 오랫동안 지리산에서 행화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불교 출가스님의 모두가 서산문파와 부휴문파에 속하는데
서산과 부휴 양대조사가 모두 벽송사 출신이라는 사실은 벽송사가
조선불교의 종가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벽송사는 1704년(숙종30년)에 환성지안대사가 벽송사에 주석하며 도량을 중수하였는데
불당, 법당, 선당, 강당, 요사 등 30 여동의 전각이 있었으며, 상주하는 스님이
300 여명에 이르렀고, 부속 암자는 10 여개가 넘었다고 전한다고 합니다.
벽송사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로 조선
시대 불교의 선맥에서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청허휴정,
부휴선수, 송운유정, 청매인오, 환성지안, 호암체정, 회암정혜, 경암용윤,
서룡상민 등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벽송사는 선교 겸수한 대 종장들을 109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
(百八祖師 行化道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千峰萬壑)을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연꽃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芙蓉滿開) 혹은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의 청학포란(靑鶴抱卵)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운거천상(구름 위 하늘 세계) 별유천지(인간 세상 밖에 따로 있는), 부용정토
(연꽃이 활짝 핀 극락정토에) 조인만대(조사의 깨달음을 만대에 이어지리)
라는 만고에 수려한 풍광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선사는 태고보우, 벽계정심 선사로부터 내려오는
심인을 전해 받아 조계정문의 정통조사가 되었습니다.
벽송선사는 무자화두에 의해 무명을 타파하고 선요에 의해 지혜의
병을 떨쳐버렸으니, 간화선 수행법에 의해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은 조선의 첫 번째 조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벽송사 입구에는 옹녀와 변강쇠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장승이 둘 있는데
보통 사찰의 입구엔 일주문이 있지만 벽송사엔 오래된 장승이 있습니다
벽송사의 입구에는 잡귀의 출입을 금하는 기능과 함께 불법을 지키는 신장상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는 장승 2기가 모두 몸통이 절반가량 땅 속에
묻혀 있어 드러난 높이가 2m 내외이고, 그나마 한쪽 장승은
윗부분이 불에 타 파손이 심한 편입니다.
우측의 장승은 대머리에 크고 둥근 눈이 돌출되었으며 코 주위에 깊은 선을 둘러
뭉툭한 코가 더 두드러져 보이며, 꽉 다문 입 주위와 턱 아래에는 톱니 모양의
수염이 있고 몸통에는 호법대신(護法大神)이라는 불법을 지키는 신
이라는 뜻의 글귀를 새겨 놓았습니다
좌측의 장승은 머리의 일부가 불에 타버리고 눈 한쪽과 코의 가운데 부분이 파손
되었는데 남아 있는 눈은 크고 둥글며, 입은 다물고 있으며, 짧은 수염이 있고
몸통에는 금호장군(禁護將軍)이라는 경내에 잡귀의 출입을
통제하는 장군 이라는 뜻의 글귀를 새겨 놓았습니다.
약 70년 전에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목장승으로서는 시대가 오래된 작품으로
눈·코·입이 과장되게 표현되었으나 순박하고 친근함을 느끼게 합니다
방화되어 완전 소실되는 슬픈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으나 60년대 이후
구한원응 대사의 원력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옛날 선종의 최고 조정에 벽송선원을 낙성하여 을유년(2005년) 하안거에
개원하여 수선정진할 수 있는 선찰종가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벽송사에는 신라 양식을 계승한 3층 석탑(보물 제 474호)과 경남 유형문화재인
벽송선사 진영. 경암집 책판. 묘법연화경 책판과 경남 민속자료 제2호인
목장승의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고 합니다.
벽송사 목장승은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깃들어 연인들이 많이 찾고 있으며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서 있는 도인송과 미인송의 전설이 유명합니다.
원통전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앞 중앙 기둥 앞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기둥 위로는 보주가 얹혀져 있는데 그 주위를 돌 염주가 감싸고 있습니다.
벽송사의 원통전입니다
원통전 안에는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습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탑은 이중 기단 위에 세워진 평면 사각형의 3층 석탑으로,
지면 위에 장대석으로 탑구를 설정하고 지대석 위에 2단의 기단부를 두었습니다.
보이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과 복발 만 남아있습니다
벽송사의 창건연대가 1520년인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신라양식
탑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벽송사 3층 석탑은 2단으로 된 기단의 아래층 기단에 가운데 돌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얕게 조각하였는데,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의
사이에 높직하게 딴 돌을 끼워놓았습니다.
탑신부의 몸돌은 각 층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으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층과 2층은 2단이고 3층은 3단입니다.
이 석탑은 조형예술이 발달한 신라석탑의 기본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으며
짜임새도 정돈되어 있는 작품으로, 조선 전기에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석으로 구성되었으며,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이 있고 그 위에 자그마한 보주가 얹혀있습니다.
이 삼층석탑 앞에는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서 있는 도인송(道人松)
미인송(美人松)의 전설로 유명한 소나무 두그루 입니다
건강을 이루고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며,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목장승에 기원하면 애정이 돈독해지고,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며,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미인송이 부러질 위기에 처해지자 받침대를 세워놓았습니다
도인송과 미인송에서 뿜어내는 자연 암반수인가
갈증나는 목을 적셔주는 물맛이 일품입니다.
이 법당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간월루(看月樓)와 종무소가 있고,
축대 아래로는 청허당과 안국당이 있으며 뒤쪽으로는
원통전과 산신각이 있습니다
간월루 종무소 청허당 안국당 원통전 산신각
예로부터 수행처로 널리 알려진 곳이지만 여러 번의 화재로 사적기가 없어 창건
연대 및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신라 말고려 초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520년(중종 15)에 벽송지엄(碧松智嚴) 선사가 중창하여 벽송사라 하였으며,
6·25 때 소실된 뒤 곧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장승각 옆에 있는 큰 건물에는 지리산벽송사(智異山碧松寺)라고 쓴 커다란
현액이 걸려 있는데 일주문에 걸려있어야 할 현판이
이 사찰에서는법당에 걸려 있습니다.
이 절에 전래되는 설화로는 승려 서룡(瑞龍)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년에 이 절에 머물렀던 서룡은 1890년(고종 27) 12월 27일에 문도를 불러서
입적할 것을 고하였으나, 제자들은 그믐의 바쁜 일이 끝나거든
입적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정월 초이튿날 다시 입적하려고 하자 제자들은 불공하러 오는 신도들이 많다는
이유로 다시 며칠을 미루도록 하였는데 4일에는 이제 가도 되겠느냐? 고
물으니 더 이상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벽송사 청암당 입니다
이에 제자들을 불러 불법을 닦을 때
생사를 해탈하려면 먼저 생사가 없는 이치를 알아야 하고(知無生死),
둘째 생사가 없는 이치를 증득하여야 하며(證無生死),
셋째 생사가 없는 것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用無生死).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벽송사는 보물 제474호 벽송사 3층석탑을 비롯해 시도민속자료 제2호
벽송사 목장승, 사찰 상층부에 자리 잡은 미인송과 도인송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주법당인 벽암선원, 주련
靈光獨露逈脫根塵(영광독로형탈근진)
신령스런 빛 홀로 드러나 근진을 멀리 털어내고
體露眞相不拘文字(체로진상불구문자)
본체가 드러난 참모습은 문자에 구애받지 않네
眞性無染本自圓成(진성무염본자원성)
참된 성품 물들지 않아 절로 원만하게 이루어지며
但離妄緣卽如如佛(단리망연즉여여불)
망령된 연을 여의면 그대로 여여한 부처라네
高嶽峨嶺智人居處(고악아령지인거처)
높고 험준한 산은 지혜로운 이의 거처요
碧松深谷行者所棲(벽송심곡행자소서)
푸른 소나무 우거진 깊은 골은 수행자가 머무를 처소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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