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의 천년기념물 상림을 찾아서
함양의 상림은
최치원선생이 함양의
태수로 있을 때 위천수가
함양의 중심을 흐르고 있어 해
마다 홍수의 피해가 심하여 백성들이
애써 지어 놓은 농사를 망치게 되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이 곳에 둑을 쌓아 강물
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강변에는 제방을 쌓고
제방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숲을 조성 하였는데
이 숲을 대관림이라 하여 홍수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하며 지금까지도 그 숲이 잘 보전되어
오고 있으나 중간 부분이 파괴되어 상림과 하림
으로 나누어 졌으며 하림은 취락지역으로 변하
였으나 상림은 아직까지도 옛날의 숲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천연기념물 제 15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에서 보존해야 할 숲으로 선정
되기도 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입니다.
함양의 상림은 최치원 선생이 함양의 태수로 있을 때 위천수가 함양의
중심을 흐르고 있어 해마다 홍수의 피해가 심하여 백성들이 애써
지어 놓은 농사를 망치게 되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이 곳에 둑을 쌓아 강물의 물길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강변에는 제방을
쌓고 제방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숲을 조성 하였는데 이 숲을 대관림
이라 하여 홍수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함양에는 지금까지도 그 숲이 잘 보전되어 오고 있으나 중간 부분이 파괴
되어 상림과 하림으로 나누어 졌으며 하림은 취락지역으로 변하였으나
상림은 아직까지도 옛날의 숲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 15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에서 보존해야 할 숲으로 선정되기도 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 이라고 합니니다.
함양의 상림은 신라 진성여왕 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태수로 있으면서
조성한 숲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는데 규모는 면적이 21ha 이며
길이가 1.6km, 상림의 폭은 80~200m 라고 합니다
최치원이 이곳 천령군의 태수로 계시면서 조성 했다는 상림은 역사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의 하나로 상림은 함양읍 서쪽을 흐르고
있는 위천의 냇가에 자리 잡은 호안림으로
당시에는 지금의 위천수가 함양읍 중앙을 흐르고 있어 홍수의 피해가 극심하여
최치원 선생이 둑을 쌓아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강변에 둑을 쌓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지금까지 이어오는 숲을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이 숲을 대관림 이라고 이름 지어 잘 보호하였으므로 홍수의 피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나 그 후 중간부분이 훼손되어 지금과 같이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하림구간은 취락의 형성으로 훼손되어 몇 그루의 나무가 서 있어 그 흔적만
남아있고 옛날 그대로의 숲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상림만이 남아있습니다.
연리목은 두 그루의 서로 다른 나무가 한 몸이 되어 붙어서 자라는 나무로
연인들의 따뜻한 사랑을 맺어주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 앞에서 서로 손을 꼭 잡고 기도하면 부부간의 애정이 더욱 두터워
지고 남녀 간의 사랑이 이루어지며 소원 성취한다는 희귀목입니다.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몸통이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을 연리목이라 하고
가지가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을 연리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연리목은 수종이 서로 다른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의 몸통 전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상서로운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신라 내물왕 7년 시조묘의 나무와 고구려 양원왕 2년 서울의 배나무가
연리지가 된 기록과 고려사의 광종 24년, 성종 6년에 연리지의 출현을
기록했을 정도로 상서로운 나무라 전해지고 있는 나무입니다.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면 함화루 라고 하는 누각이 한 채 보이는데 이 누각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된 함화루 입니다
조선시대 함양읍성의 남문으로 이름은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는 뜻으로 망악루
라고 했으나 1932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함화루로 고쳤다고 합니다
원래 함양읍성에는 동쪽에 제운루, 서쪽에 청상루, 남쪽에 망악루 등 삼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남문이었던 이 함화루 만이 여기에 옮겨져 남아 있습니다
예로부터 함양은 좌 안동, 우 함양이라 일컬을 만큼 영남의 대표적 선비의
고장으로 오랜 역사 를 통하여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함양 상림 안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된 이은리석불은 1950년 이은리
냇가에서 출토된 것으로 인근 망가사의 유물로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은리 냇가에 방치된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는데 그 주변에 망가사라는 절이
있어 그 절의 유물로 보이며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얼굴모습이 무뚝뚝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가 느껴지는 이은리석불
이곳에 앉아 있는 모습이 조금은 외로워 보입니다
상림공원이 위치한 경남 함양군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품고 있는 고장으로
과거 벼슬아치들이 ‘울고 왔다 울고 간다’고 할 정도로
오지 중의 오지로 꼽혔던 곳이라고 합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애민정신이 깃든 상림에 흉상을 세워 선현들의
선비정신과 기백을 이어가고자 세운 역사인물공원입니다.
최치원 선생은 신라 최고의 문장가요 한문학의 비조이며 동방 18현중의 1인
으로 경주사량부에서 태어나 12세에 당나라유학에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했으며 관리로 종사하며 황제의 자금어대를 하사받았고
공의 문장은 중국에서도 명성이 드높았답니다
함양 상림에는 최치원 선생의 효심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선생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하였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홀로 상림 숲에 산책을 나갔다가 뱀을 보고 깜짝 놀라서
집으로 돌아와 아들에게 뱀을 보고 놀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최치원 선생은 상림 숲으로 달려가서 숲을 향해
지금부터 상림 숲에는 뱀이나 개미 같은 모든 해충은 일체 없어져라.
그리고 다시는 이 숲에 들지 말라고 주문을 외웠답니다
그 후로는 선생의 지극한 효성으로 인한 주문 때문인지 모든 해충이
사라지고 모여들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최치원 선생은 떠나면서 상림 숲에 뱀이나 개미가 나타나고 숲속에
설죽이 침범하면 내가 죽은 줄 알라 고 이야기 했답니다.
아직까지 뱀은 나타나지 않지만 가끔 개미가 보이고 숲속에는 설죽이
많이 나고 있어서 사람들은 이제는 그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들 합니다
현재 상림공원은 7ha에 달하는 연꽃단지가 조성되어 250종의 연꽃과
50종의 수생식물이 심어져 있다고 합니다.
최치원은 신라 헌강왕 원년(857년)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의 출생 설화에 의하면 아버지가 문창이라는 곳의 영으로 부임하면서
치원을 잉태한 지 넉 달 만에 금 돼지로부터 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 후 육 개월 만에 치원을 낳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차마 이 아기를 기를
수가 없어서 치원을 내다 버리기로 작정하고 아이를 보자기에 싸서
아무도 살지 않는 외딴 곳에다 갖다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밤만 되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서 젖을 먹여 키웠고 낮이
되면 오색 무지개가 찬연한 하늘에서 큰 학 한 마리가 날아와서
치원을 품고 있었으므로 짐승들의 침입을 막을 수가 있어
아무 탈 없이 자라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치원이 외딴 곳에서 책을 읽을 때 소리가 어찌나 낭랑했던지 중국의 황제
귀에까지 들려서 황제는 신라국에 학사를 보내어 시로써 대화를 나누었
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신동이라는 칭호를 받은 최치원은 12세 되는 해
당나라에 유학을 하여 명성을 떨쳤고 6년만인 18세 되던 해에는
중국에서 당당하게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였습니다.
중국에서 관리로 일하다가 황소가 난을 일으켰을 때는 황소의 난을 평정
하기 위해 관군 총지휘관 고변의 비서관이 되어 종사관의 자격으로
황소격문을 써서 더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황제라 칭했던 황소가 그 격문을 읽다가 충격적이고도 감동적이라서
놀란 나머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의자에 앉은 채로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는 얘기가 전하며 결국 황소가 반란의 명분을 찾지 못하고
궁지에 몰리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황소격문입니다.
그는 28세 되던 885년에 당나라 헌종 황제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하였는데
그는 기울어져가는 신라를 어찌할 수 없음을 느끼고 시골로 내려가 조용히
조그마한 고을에서 여생을 마치기로 작정하고 지원하여 전북 태인과 정읍,
충남의 서산을 거쳐 천령군(지금의 함양군)태수로 부임하였습니다.
그의 치적 중에서 상림은 함양을 대표하여 내세울 수 있는 곳으로 풍치가 아름
답고 지방민의 휴식처로 알맞은 곳이며 자신이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활엽수를
캐어다가 풍수해를 막기 위한 방제와 방풍림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최치원 선생이이 상림 숲의 조림을 마치고 숲속 어디엔가 나무 가지에
조림하던 금호미를 걸어두었다고 하는 전설도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최치원은 금으로 만든 호미로 단 하루 만에 숲을 조성한 후
금호미로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다고 하는데 숲속을 흐르는 실개천에
금호미 다리로 불리는 무지개다리가 있습니다
이 둑을 만들 때 공사가 엄청 빨리 끝났다고 하는데 밤에 한 인부가 우연히
최치원 선생이 금으로 만든 커다란 인형들을 움직여 둑을 조성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물론 전설이겠지만 실제로 1993년 상림 둑을 보수할 때
땅속에서 금부처와 금 인형들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최치원 선생이 손수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활엽수를 캐어다가 강변에 둑을 쌓고
물길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은 것이 지금의
상림이라고 하는데 년 간 250 만명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상림의 최치원공원에는 120대가 동시에 주차를 할 수 있는 넓은 주차공간을
확보하고 숲 속에 10,000㎡의 잔디밭이 있고 야외공연장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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