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팔도문화재답사

고흥 능가사를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2. 2. 4.

 

고흥 능가사를 찾아서

 

고흥의 능가사는

고흥반도의 팔영산 북쪽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 고흥을

대표하는 사찰로 이 능가사는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며 팔영산 4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사찰로 호남 4대사찰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으나 정유재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보현사라 불렸는데 조선인조 때 이 보현사를

중창하면서 능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며

능가사의 대웅전은 전남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곧 국보로 승격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며

범종은 조선 숙종 때 주조된 범종으로 일본헌병

이 종을 헌병대로 옮겨 타종했는데 종이 울리지

않아 할 수 없이 능가사로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있는 종이며, 사천왕의 배치는 동방지국천왕을

기준하여 시계 방향으로 동남 서북의 배치가

일반적인데 반하여 능가사의 사천왕은 반

시계 방향으로 동남서북으로 배치가

되어있는데 이와 같은 배치방법은

종래의 배치방법과 다르게 나타

나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전남 고흥의 능가사는 고흥반도의 팔영산 북쪽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

신라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지만,

기록이 없어 창건에 대한 확실한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한때는 이 팔영산 부근에 4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사찰로 호남 4

사찰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고 하나 정유재란 때 화재로 소실되어

거찰의 면모를 잃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곳 능가사는 당시까지는 보현사라 불렸는데 조선 인조 때

이 보현사를 중창하면서 능가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능가사의 대웅전은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곧 국보로 승격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이 대웅전은 능가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불전으로 정면 5,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신라 눌지왕 때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된 능가사는

임진왜란 때 폐사지가 되었다가 1644(인조 22) 정현대사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중창·중건되었다고 합니다

 

 

이 능가사에 있는 범종은 높이 1m, 무게 약 900kg의 범종으로 조선

숙종 24(1698)에 주조된 범종으로, 일제시대에 일본 헌병이

이 종을 헌병대로 옮겨 타종했는데 종이 울리지 않아 할 수

없이 능가사로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있는 종입니다.

   

  

이 종은 상대에 범자문을 돌렸으며 4면의 장방형 유곽 안에 9개의

유두가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고 옆에는 천의를 걸친 보살입상이

부조되었고 문짝 모양의 장식 안에는 주상 전하수만세 라는

문구가 있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 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숙종 24(1698)으로 능가사가

창건된 지 54년 후에 조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종의 종신 중앙에는 주역에 나타나는 전양인 건에서 전음인 곤에

이르기 까지 팔괘를 양각으로 둘러 놓았는데 이러한 형태는 조선

범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범종이라고 합니

 

 

 

능가사의 사천왕문 안에는 모두 4구의 사천왕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19958월초. 천왕문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상량문이 발견

되었는데. 초창연대는 1666(현종 7)이며 중창은 1824(순조 24),

3창은 일제 강점기인 1931년으로 모두 세 번에 걸쳐 보수

중창하였음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는 것은 1690(숙종 16)에 세운 능가사 사적비에

천왕문과 사천왕상에 대한 시주자 명단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비문에

天王門 化主 是閑 別座 懷益 王像(天王像) 化主 天日 沖印

(천왕문 화주 시한 별좌 회익 왕상(천왕상) 화주 천일 충인)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적비의 기록대로라면 천왕문의 상량문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최초 초창연대가 1666(현종 7)이므로 천왕문 건립과 사천왕상

조성이 동시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사천왕상의 배치는 우측 입구 쪽을 보면 동방지국천왕이 배치되었고

지국천왕 옆 대웅전쪽에 남방증장천왕이 이어지고 있는데 배치

내용을 보면 동방지국천왕이 북쪽이고 남방증장천왕이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사천왕의 배치는 동방지국천왕을 기준하여 시계방향으로 동남서북의

배치가 일반적인데 반하여 능가사의 사천왕은 반시계 방향으로

동남서북으로 배치가 되어있는데 종래의 배치방법과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동방지국천왕은 머리 위에 쓴 보관이 화려한 연화문이 그려진 원통형의

관을 쓰고 있고 얼굴은 험상궂은 표정이며 손에는 비파를 들고 있으며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이나 엉거주춤한 모습입니다.

 

 

 

남방증장천왕 역시 지국천과 동일한 수법이지만

손에 칼을 쥐고 있는 지물만 다릅니다  

 

 

좌측 입구에 북방다문천왕과 대웅전 방향의 서방광목천왕은 손에 들고 있는

지물이 북방다문천왕은 긴 창을 들고 있고 서방광목천왕은 오른손에 뱀을

움켜쥐고 있으며 발아래에는 서방광목천왕만이 두 악귀를 밟고 있는

형상이고 3구은 발을 떠받들고 있는 생령좌가 하나씩 있습니다    

 

 

 

 

 

 

 

 

현판에는 응진당이라고 씌여져 있는데 보편적으로 은진전이라는

당호를 많이 쓰고 있는데 반하여 특이합니다   

 

 

응진당을 향하여 좌측으로는 요사체 같은 모습의 건축물에는

첨성각이라는 특이한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경주 첨성대의

의미와 상통하는 읨가 깃들어 있는 건물인지요?  

 

 

고흥 능가사에는 조선시대 후기의 승려로 사제지간인 추계당과

사영당 부도가 경내에 같이 서 있습니다

 

 

추계당 부도는 석종형 부도이고 기단부는 방형의 하대석 

 위로 8각의 복련을 새겨 놓았습니다  

 

탑신부는 상대와 하대로 구분하는데 하대에는 돌아가면서

물고기와 게 등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북쪽인 두개의 유곽 사이에 방형의 위패형(61×17cm)을 새기고

그 안에 秋溪堂(추계당자경 9cm)이라는 당호를 새겼습니다.

 

 

사영당 부도는 석종형과 8각원당형의 양식에서 벗어난 이형 부도로

방형의 하대석을 앉히고 귀퉁이에 각기 4방을 향하고 있는 용두를

조각하였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역동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양쪽 눈을 크게 부각시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명력을 불어 넣었으며

턱밑으로 역린이 선명하며 목 뒤로는 굵은 비늘을 새겼고 그위로는

2엽씩 8엽의 연화문이 있고 복련 위로는 8각의 중석이 있습니다

 

 

이 사적비는 능가사 대웅전 뒷편 100m 떨어진 숲속에 있는데 방형에

가까운 거북머리는 용머리화 되었으나 목이 짧아 웅크린 모습이며

입안에 여의주를 머금었는데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북 전면에는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양편에 8괘를 시문하였고

귀갑은 하단에 6각문을, 상단에는 파상문을 조각하였습니다.

 

 

비좌는 하단으로 연주문을 돌리고 그 위로는 귀부 전체의 균열을

막기 위해 철제 띠로 단단하게 묶어 놓았습니다.

 

 

 

 

비신의 제액은 전서로 흥양팔영산능가사사적비

(興陽八影山楞伽寺事蹟碑)라 새겼고

 

찬자는 통정대부 부제학지제겸 경연참찬춘추관 수찬관 오수채이며,

전서는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조명교가 썼다고 합니다,

 

 

비신 전면말미에 숭정기원후재경오라는 명문이 있어 건립연대가

숙종 16(1690)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현대사는 임진왜란 후 화엄사 중창자인 벽암각성의 제자로

취미 수초, 백암 처능 등과 함께 활동했던 승려입니다. 

 

 

 

비 머리는 장방형으로 하단에는 위로 향한 연꽃무늬와 운용문을

조각하였으며 상단은 두 마리의 용이 중앙에 여의주를 향해

 서로 안쪽을보게 하였습니다.

 

 

네 귀퉁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오른편(향좌) 측면으로는 귀면상을 조각하여

장식을 더하고 있으며 이 사적비에 의하면 벽천 정현대사가 능가사를 창건

하였으며, 이미 그 이전에 이터에 보현사가 있었고 주변에 서불암, 만경암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수 대야에 비친 여덟 봉우리를 찾아 먼 길을 달려온 위왕!

 

팔영산의 여덟 봉우리 - 유영봉, 성주봉, 생황봉, 사자봉,

오로봉, 두류봉, 칠성봉, 적취봉.

 

 

옛날 중국의 위왕이 세수를 하다가 대야에 비친 여덟 봉우리에 감탄하여

신하들에게 찾게 였으나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어 우리나라까지

 오게 되었는데, 왕이 몸소 이 산을 찾아와 제를 올리고

팔영산이라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입니다.

 

 

▣  답사가 아닌 여행길이라서 디카 하나만 들고 떠났다가

들려본 능가사에서 사진에 담을 것은 많은데 밧데리가

소진되어 폰카로 찍은 사진이라서 사진이 여러모로

부실한 면이 많아서 죄송합니다 

 

'팔도문화재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취산 흥국사를 찾아서  (0) 2012.03.28
도동서원을 다시 찾아서  (0) 2012.03.21
금전산 금둔사를 찾아서   (0) 2012.02.02
원주 역사박물관을 찾아서  (0) 2011.12.28
영주 성혈사를 찾아서   (0) 2011.12.1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