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령산 용암사를 찾아서
장령산 용암사는
법주사의 말사로 의신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절 이름은
경내에 용처럼 생긴 바위에서 유래
하였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파괴
되었다고 하며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
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중 용 바위에서
서라벌을 향해 통곡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현재 고려시대 양식의 석탑과 마애불상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에도 법통이 이어져왔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절은 명맥만을 유지해
오다가 최근에 대웅전과 천불전을 비롯한
요사채 3동을 중건하였고 현재에도 중건이
이어지고 있으며 대웅전 용마루 뒤쪽에
보이는 큰 바위에 마애불이 있고 비보
사상으로 쌓은 용암사 동.서 삼층
석탑은 같은 모양으로 이층 기단
위에 3층탑신을 올렸습니다
용암사는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 장령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입니다
신라 진흥왕 2년(541)경에 의신조사가 인도에 가서 불도를 닦고
신라에 돌아와서 이곳에 용암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며
13년 후에 속리산 법주사를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신라 천년사직의 무상함을
통탄하며 유랑하던 중 이곳에 머물러 지내다가 떠나자 후에
그를 추모하던 사람들이 그를 그리며 마애불을 조성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명맥만을 유지해 오던 절을 1986년에 무상이 대웅전과 산신각을
중창하고 현관이 요사채와 범종각을 신축하였다고 합니다
경내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용암사라고 불렀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이 바위를 없애버려 그 흔적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용암사를 알리는 현판입니다만 다른 사찰에 비해서
현판의 모습이 특이한 편액 입니다
삼층석탑 두기가 용화사 동북쪽에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데 두 탑은
전체적으로 같은 형태이지만 동탑에 비해 서탑은 약간 홀쭉한 편
이고 상륜부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보물 제1338호입니다
이 석탑은 일반적인 가람배치와 달리 대웅전의 앞이 아니라
사방이 한 눈에 조망되는 북쪽 낮은 봉우리에 있는데
가람배치의 전형에서 벗어나 9세기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용장사지
삼층석탑 처럼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확인된 산천비보사상으로 건립된 석탑 중
쌍 탑은 처음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합니다
석탑이 사방의 조망권이 확보된 위치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산천비보사상은 탑이나 건물을 건립해 산천의 쇠퇴한 기운을
북돋아 준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같은 모양의 두 석탑은 이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자연암반위에 이층기단으로 동탑은 4.3m 서탑은 4.1m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서탑은 2층과 3층 탑신의 몸돌이
결실되어 새로이 보완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양식과 석재의 결구 방법에서 간략화된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석탑 중 유일하게 쌍탑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합니다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탑은 보물 제 1338호로
이중 기단위에 탑 몸돌 부분을 올렸으며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 보주 등이 한 돌로 되어 있습니다
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탑은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하고 있어
별도의 기단이 없으나 이 동서탑은 이층 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이 올려져 있습니다
동탑은 높이가 4.3m로 서탑에 비해 조금 큰 편이나 형태와 모양은 같으며
상륜부의 노반, 복발, 보주가 모두 한 돌로 이루어진 탑입니다
바위에는 부처의 존명을 새겨져 있으며
작은 돌탑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 용마루 뒤쪽에 보이는 큰 바위에 붉은 색을
띄는 마애불이 있는데 마애불이 붉은 빛깔을 띠는 것은
암벽 자체의 색이 아니라 칠을 한 것이라고 합니다
용암사 뒷편 커다란 암벽에 감실안에 부조 마애불입상이 있는데
큰 바위 윗부분을 남기고 아래를 파서 불상을 조성했습니다
입술은 채색을 한 흔적이 뚜렷하며 높이는 약3m로 발을 좌우로
벌리고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 정면관의 여래입상입니다
지면에서 조금 위로 암벽의 중간에 상을 새겼기 때문에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목에서부터 이어지는 어깨가 굳세고 양발을
가볍게 벌려 발끝을 밖으로 향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옷차림은 우견 편단이나 오른 어깨를 살짝 덮고 있으며 발끝의 군의자락이
좌우로 날카롭게 뻗치고 있으며 배 아래로도 완만한 U자형 옷주름이
몸 앞에서 겹겹으로 늘어지고 있습니다
수인은 왼손을 내리뜨려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네 손가락을 가볍게 구부린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오른손은 가슴에서 엄지와 중지 외의 손가락을
쥐고 있는 시무외 여원인을 하고 있으나 손가락의 표현이 특이합니다
대좌는 연화문이 정교하고도 화려하며 광배는 주형 거신광이나 마멸이
심하고 머리에는 육계와 길게 내려 뻗은 코는 우뚝하고 다문 입술에
붉은 채색을 하고 귀가 어깨까지 닿고 목에는 삼도가 선명합니다
이 마애불은 세련된 신라의 조각이 점차 형식화해가던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가
신라 멸망을 통탄하며 유랑하던 중에
이곳에 머물다가 떠나자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그를 기리며
마애불을 조성하였다고 해서 마의태자상 이라고도 합니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서 누구든지 이 마애불 앞에서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급한 경사면을 4개의 단으로 조성하여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중심인 3번째에 대웅전이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관음보살. 지장보살의 좌상을 모시고 있으며
대웅전 가운데 불상은 목조아미타여래불(충북유형문화재 제193호)이며
왼편에는 지장보살 오른편에는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아미타여래불의 복장유물(1980년에 개봉)에 순치8년 신묘년에
만들어진 다라니경이 나와 불상은 조선 효종 2년(1651년)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출토된 명문에는 문경의 오정사
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수인은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고 왼손은 다리 위쪽에서 위를 향하고
있으며 각기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을 취하고 있으며
불의는 통견으로 양 어깨에서 아래로 길게 내려오며 오른손을
돌아 걸쳐 내려온 자락이 복부 쪽으로 들어간 형태입니다
후불탱화는 석가모니불과 보살 및 신중을 목각으로 제작하여 입체감은 있으나 상호 표현이 도식적이며 금박을 입혀 화려하지만 목각 본래의 멋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좌우측면에는 부처님의 일생을 표현한
팔상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선정에 들어가 갈등이 심하지만 수행이 자신과의 투쟁임을 알고
용맹정진하여 마침내 마군의 항복을 받고 대오 각성의
경지에 드신다는 내용인데 어찌 사찰의 대웅전
벽화로는 좀 야한 것 같습니다
대웅전 뒷편에 축대를 높이 쌓고
천불전을 지었는데
네째단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인 천불전이
있으며 뒤로는 마애불이 있고 왼쪽에 산신각이 있습니다
천불전에는 가운데 삼세불을 봉안하였으며 삼세불의
좌우 및 배면에 가득 소불을 배치하였습니다
대웅전의 북측에는 ㄱ자형 평면의 관음전이 있고, 남측에는
범종각이 있는데 범종각에는 범종만 달려 있습니다
용암사에는 일반 사찰에서는 보기드문 용황전이 있고
탱화로 용황이 모셔져 있습니다
용황전 뒷면에는 용황을 그린 탱화가 걸려 있고 전각 안에는 우물이 있는데
바닷가가 아닌 곳에 용황전을 설치하는 경우는 드문 일로 경주에 있는 원원사지에 용황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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