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선교장을 찾아서
선교장은
효령대군 11세손으로
가선대부를 지낸 이내번이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300년을
이어온 집으로 이 집은 장(莊)자가 들어
가는 민간주택이라는데 특징이 있으며 서울
에도 이화장이나 혜화장 경교장 등이 있지만
무늬만 장급이지 실질적인 규모에 있어서는
선교장과 비교할 수 없고 명실상부한 장원의
격조를 지니고 있는 집은 선교장이라고 합니다
민간주택의 한계인 99칸을 뛰어 넘어 120칸이
넘는 웅장한 규모를 지니고 있으며 선교장은
배선 다리교 집장자를 써서 배다리집이라고
하며 150여년전 선교장 앞뜰이 경포호수
였을 때 호수위로 배를 엮어 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닌 집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 합니다
하늘이 족제비 무리를 통해 점지했다는 선교장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가옥으로
300여년 전에 지어진 안채를 시작으로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사랑채,
중사랑, 행랑채, 사당들이 지어졌고 큰 대문을 비롯한 12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대 정원을 연상케 하는 99칸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주택 이라고 합니다
처음 선교장을 지은이는 세종대왕의 둘째형인 효령대군의 11세손
이내번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데에는
기이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충주에 살던 이내번은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안동 권씨와 강릉으로
옮겨왔는데 처음에는 경포대 부근의 저동에 기반을 잡고 가산을
일으킨 이내번은 후대가 번성할 터전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내번이 하루는 집터를 찾고 있는데 어디선가 족제비가 한 마리씩
나타나더니 무리를 이루어 서북쪽으로 몰려 갔습니다
이를 신기하게 여겨 그 뒤를 쫓던 이내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울창한 숲 속에 들어가게 되었고, 숲 속의 경치가 아름다워
집터로 삼고 선교장을 지었다는 설화입니다
이 이야기의 전승으로 족제비는 선교장의 귀한 손님이 되었다고 하며
선교장 주인들은 족제비를 위해 뒷산에다 먹이를 주고 앞마당에
족제비가 나타날 때는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고 합니다
현재 선교장을 지키는 이는 이내번의 9대손인 이강백 씨인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져가는 선교장을 중흥시킨 장본인 입니다
집안 곳곳을 새롭게 단장하고 여행자들이 한옥체험을 하며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홍예헌, 초정, 초가 등 새로운 건물도 지었습니다
한옥이라면 으레 불편할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 겉모습은
옛 것을 유지한 채 실내에 부엌, 샤워실, 화장실을 모두 갖춰
내 집처럼 편안하도록 꾸몄습니다
아무리 역사가 깊고 전통이 있는 한옥이라도 사람들이 불편해 하면
한옥체험의 취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선교장을 찾는 여행자들은 한옥의 정취를 느끼면서 편안하게 쉬어
갈 수 있게 되었고 머무는 동안에는 지루할 겨를이 없습니다
선교장은 동별당과 안채가 하나의 주택을 이루며 사랑채인 열화당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또 다른 집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드나드는 문도 각기 달라서 두 구역 사이는 서별당이
중재를 한다고 하며 서별당은 서재로 활용하며
집안의 아이들을 교육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밖에서 보면 궁궐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긴 행랑이 늘어섰으며
안채는 마루가 낮고 마당이 좁은 반면에 사랑채인 열화당은
마루가 높고 마당이 널찍한 편입니다
추운 북쪽 지방의 폐쇄성과 따뜻한 남쪽 지방의 개방성이
복합된 독특한 아이템이라고 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열화당과 활래정으로 열화당은
이내번의 손자인 오은거사 이후가 지었다고 하는데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어찌 다시 벼슬을 구할 것인가.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에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를 쓸어버리리라”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열친척지정화(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에 기뻐하고)”란
구절에서 이름을 땄다고 합니다.
현재 열화당은 작은 도서관으로 꾸며져 체험객들이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선교장 앞에는 네모난 연못과 활래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연못과 정자는 이곳을 방문한 사람을 제일 먼저 반기고
가장 나중에 배웅을 한다는 곳입니다
옛날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이곳에서 연못에 연꽃이 가득할 때
주인은 지기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정을 나눴을 것입니다
강릉 선교장은 전통 한옥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유지된 집으로
안채, 동별당, 서별당, 열화당, 활래정 등 100여 칸이 넘는
우리나라 최대의 살림집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집 뒤로 수백 년 묵은 노송들이 우거진 숲을 이루고 긴 행랑 사이로
날아갈 듯 사뿐히 치켜 올린 추녀가 집의 역사를 말해 줍니다
활래정은 1815년 선교장이 만석꾼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여
지은 정자이며 건물의 용도는 연회용으로 여름에는
이곳을 숙소로서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누마루는 전면의 경포호수와 활래정의 연꽃을 보며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서 사용 되었고 가운데 찬방은 주안상을
장만 하거나 차를 준비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관동팔경 지나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서 그 아름다움을
칭송 하였고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
전통정자와 정원 조경의 표본이 되는 곳입니다
열화당은 1815년에 지어진 건물로서 선교장의 가세가
만석꾼에 달하면서 지어진 건물입니다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시인묵객들의 묵어가는 장소로서
인심이 후한 선교장에 많은 선비들이 몰려들자 사랑채를 짓고
많은 부속 건물들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열화당은 집안의 주인이 기거 하면서 손님을 맞이하고 중사랑과
행랑채에 잠시 묵어가는 선비들과 교분을 나누며 중앙의 정치,
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전국 각계의 두터운 인맥을 형성 하였습니다
건물의 구조를보면 ㄱ자로 꺽어진 3칸 구조는 우측방을 침실로
사용하여 미닫이를 닫으면 침실이 보이지 않는 구조입니다
건물앞의 테라스는 조선말기 러시아 공사관 직원들이 영동지방
산업조사 (조선 식민지 계략의 일환)를 왔을 때 선교장에서
장기간 머물다 갔는데 이후 러시아에서 구리판과 목수를
보내어 답례의 선물로 지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문화재적인 가치 보다도 역사이기 때문에 문화재청에서
철거 하지않고 있다고 합니다
건물의 중요한 특성으로서 외벽이 없고 둘레의 모든벽이 문으로 되어
있어서 전통건축의 사랑채와는 다른 건축 양식을 볼 수 있습니다
온돌방의 창호는 3중 겹문으로 되어 있어서 겨울철 난방에 따듯한 방안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고 대청마루와 누마루에도 2중창호로
외부는 여닫이문, 내부는 미닫이문을 설치하여 온도변화에도
실내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설계하였다고 합니다
건물의 기단을 높혀 아래의 부속 건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집안을
다스리는 선교장 주인의 권위와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하였다는데
선교장의 건물의 형태는 권위와 개방과 활달하고도 실용성를
강조한 선교장 주인들의 품성을 반영 했다고 합니다
하늘이 족제비 무리를 통해 점지했다는 선교장,
가문의 역사가 전란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그 맥을 잘
이어온 것은 중심을 잘 잡아준 근본적인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베풀고, 나누어 주고
淸新近古하며 (맑고 새로우면서도 옛것에 가깝고)
典雅不俗 (전아하되 속되지 말것)의 생활문화 가계정신과
巨兌界濫(큰것을 버리고 넘치는 것을 경계함)의
공생적 가치관을 정립하여
그 후손들이 그 가훈을 훌륭히 실천했다고 하는데
문화를 계승하는
문화를 나누는
문화를 공유하는
문화를 전파하는
문화를 창조하는
문화를 자원화하는
맥락으로 300년 역사를 지켜온 선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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