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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문화재답사

대마도를 찾아서 (4)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1. 2. 6.

서산사의 김성일시비를 찾아서

 

세이잔지라고

하는 서산사(西山寺)는

대일여래불을 모시는 대일사

(大日寺)라고 하는데  설립자가

1512년에 자기부인이 죽자 부인의

영령을 이 절 대일사에 옮기고 부인의

법명을 따서  대일사를  서산사로 개칭

하였다고 하며  2000년 부터 서산 선원

(西山禪院)으로 바꾸었다고 하는데 조선

통신사들이 묵어가는 절로서  일종의 영빈

이었으며 이 절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영욕이  서려있는 사찰로  유명한 곳입니다

 임진왜란 전에  풍신수길을  만나고 돌아온

 조선 통신사  김성일이  이 곳 서산사에서 

 간첩 중  현소와 술을 마시면서  지었다는 

 시비가 세워져 있는곳이기도 합니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간첩활동을 한 유명한 중 현소가

주지승으로 있었다는 곳으로 이 절 내부에는

 간첩활동을 하던 현소와 그의 제자 현방의

목상이 있다고 합니다  

 

 

 

법당 내부에는 고려불상이 있고 사명대사와

통신사가 묵었던 객관이기도 합니다

 

 현재 이 절은 대마도에서는 하나 밖에 없는

유스호스텔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을 정탐하기 위해

 조선통신사 부사로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의 풍신수길을 만나고 돌아왔는데

 

 

 

김성일은 1591년 3월 1일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의사가

없으며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므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쌓고 있던 축성공사를 중지하여야 

한다고 복명을 하였으나  

 

 

 

황희정승의 5대손인 황윤길은 대마도주로 부터 조총을

받아와 조정에 제출하여 신신무기의 생산과 무장을

건의하면서 일본은 조선을 침략해 올것이므로

축성공사를 더 완벽하게 하고 철저하게 대비를

 하여야 한다는 상반된 복명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동인이 득세를 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서인인 황윤길의 의견보다 동인인 김성일의 복명을

 채택하여서 받아들였으며

 

황윤길이 가지고 온 신식무기인 조총도 실용화 해

보지도 않고 묵살해 버리게 됩니다

 

 

 

오히려 황윤길의 전쟁준비를 해야 한다는 건의가

민심을 소란하게 만들었으며 나라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고 몰리게 되며

 

 임진왜란 때는 황윤길이 증거도 없이 전쟁이 일어나자

 도망을 갔다고 모함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1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황윤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고 합니다    

 

 

 

 김성일은 이퇴계선생의 수제자로 성리학의 대가

였다고 하며 호는 학봉(학봉)이고

자는 사순이라고 합니다

 

 

김성일선생은 서산사에서 간첩 활동을 하고 있던 중 현소와

 술을 마시면서 지었다는 시 한 수기 있는데

이 것을 기념하여 이 곳에다 그 후손들인

 안동의 의성김씨 문중에서2000년 11월에

시비를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일당잠개양방신(一當簪蓋兩邦臣) 

구역수수 의칙균(區域雖殊 義則均)

 

존조 웅용 환의족 ( 尊俎雄容歡意足) 

방인막문 주겸빈(傍人莫問主兼貧)

 

 

 

한마루에 의관을 갖춘 두 나라 신하,

구역은 달라도 의리와 법식은 고르다네

 

술자리에 조용한 용모 환영 뜻 만족하니

길손이여 주인과 손님을 묻지마오

 

 

 

과정은 어떠하였는지 잘 모르겠으나 어쨌던 간첩과 

화기애애하게 술을 마셨다는 것이 나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보니

 

간첩 활동을 한 현소에게 당한 것이 아닌가 ?

라는 생각이 됩니다

 

 

 

현소는 1588년 부터 조선에 드나들면서 한지에 조선

8도의 도로망 지도를 그려서 들키지 않을려고

 

 

 

스님들이 등에 지고 다니는 바랑의 맬방 끈을 지도를 그린

 한지로 꼬아서 만들어 조선의 8도 지도를 숨겨가지고

 일본으로 반출하였다는 간첩활동을 한 중입니다

 

 

 

토요토미히데요시는 현소가 전해준 조선 8도의 도로망

 지도를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출진하는 일본국

장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는데 

 

 

 

히데요시 군대가 1592년 4월 13일 부산포로 침입을 하여

 18일 만에 서울 까지 진격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현소라는 간첩 중이 가지고 간 조선 8도의

교통망이 있는 지도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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