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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문화재답사

대마도를 찾아서 (2)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1. 2. 2.

 

애국지사 최익현 순국비를 찾아서(2)

 

최익현선생은

한말 풍운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친 의사로

일제에 항거하다 대마도로

유배되어 돌아가신 애국지사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나가사키현

쓰시마에 있습니다.  섬에서 오래된

큰 항구로 이 섬의  수도라고 할 만한

이즈하라항의 수선사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1907년 그가 순국했을때 장례를

치른절로 1986년 한일양국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비를 세운것입니다 최익현은 대한제국

 위대한 유학자요 정치가였습니다. 한말의

려운 정세에도 소신을 굴하지 않고 애국

항일 운동을 일으켜  일본 관헌에 의해

대마도로 호송되어 왔으며.  여기에서

순국 하셨습니다 = 수선사

 

 

 

수선사 창건에는 백제의 비구니가 관여한 것으로

전해져 한국과는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선생이 순국한 후 대마도 유지들이 유체를 모시고

 충절을 되새겨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유서 깊은 곳에 순국비를 세워 최익현 선생의

애국애족의 뜻을 기리고자 한것입니다

 

 

 

찾을 수 없는 죽음의 흔적

최익현이 대마도에 끌려온 것은 1906년 8월28일.

 

 

 

그는 이즈하라 언덕 위의 당시 대마도 수비대

영내에 갇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7년 1월1일 숨을 거뒀다고 하는데 지금 그

 자리엔 자위대 경비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최익현선생 순국지비 건림위원회에서 유서 깊은 곳에

 순국비를 세워 선생의 애국애족의 뜻을 기리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져 있는 비석입니다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 건림을 위하여

한국측에는 황수영 박사님이 대표

위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문에 일해재단이 기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5공화국의 일해재단이 한말 열사의 위령비

건립에 힘을 보탰다는기록이 보입니다

 

 

 

비록 갇힌 몸이었지만 면암의 기개는 대단했다고

합니다 야만의 나라, 좁은 섬에 갇힌

신세가 기가 막혔다고 합니다

 

 

 그는 탄식하며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소중화의식이

묻어나는 그의 한시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자(箕子)오실 적에 도(道)도 함께 왔거늘

일본도 서양도 그 범위 안에 들거늘모르겠네,

조물주는 무슨 심사로 날더러

대마도를 보게 하는지

 

 

 

상스러운(?) 왜적의 소굴에 갇힌 조선 선비의

굴욕감 이라고나 할까요…?

 

 

 

일본 수비대장에게서 모욕을 당한 면암은 단식으로

자살을 시도하면서 임병찬에게 유소를

받아쓰게 했다고 합니다.

 

 

 

당황한 일본 군인들이 ‘음식은 고국에서 보낸 것으로 짓고,

일본 수비대는 경비책임만 있을 뿐’이라며 단식중단을 설득

했다고 합니다. 함께 갇힌 의병들도 울면서 단식중단을

 권하여 단식은 중단됐으나 74세의 노령에 심신이

 매우 손상되어 있었으므로 한 달 뒤 면암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고 합니다.

 

 

 

일본인들도 “아사가 아니라 병사라 할지라도 나라의 자주권

회복과 인민구제를 위해 몸을 던진 최익현의 진정한

가치는 달라질 게 없다고 찬사를 보낸다고 합니다

 

 

 

수선사는 656년에 백제의 비구니 법명스님이 창건

하셨다고 하는데 수선이란 글씨는 현종 4년에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 김학진이 일본을 다녀오는 길에

 들려 쓴 것이라고 하며 김학진 인아라는 낙관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당시 유림을 대표하던 면암 최익현은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하며

  극력 반대 한 말입니다.

 

 

 

이처럼 최익현은 대체로 개항·개화·개혁을 반대하고

 성리학적 지배체제를 유지시키려 한 위정척사파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면암 최익현은 흥선대원군·고종과도 맞선 대쪽 같은 선비입니다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면암은 승문원부정자·

지평·정언·이조정랑·신창현감·장령 등을 역임하고

 1870년에 동부승지를 지냈다고 합니다.

 

1873년에는 상소를 올려 만동묘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서원 철폐를

 단행하는 등의 정책을 비판함과 동시에 이제는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때 대원군과 고종 사이를 이간했다는 대신들의 공격을 받아

 3년간 제주도로 유배되기도 하였지만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오로지 백성을 위하는 신념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1876년 일본과 조선 사이에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면암은 도끼를 짊어진 채 광화문으로 달려가

 조약 체결을 결사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합니다.

 

일본과 화친을 주장하며  나라를 팔아 먹으려는 자들을 가려 내어 죽일 것을

 요구하며 만일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려면 자신이 들고 있는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라고 강변한 이른바‘도끼상소는 그의 죽음을 초월한

 강직성과 투철한 애국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면암은 을사늑약을 백성들에게 알림으로써 떨쳐 일어날 것을 촉구하는

 포고문을 팔도에 보내는 한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오랑캐를

 섬멸하고 그 종자를 없애고 소굴을 파헤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진위대를 출동시켜 의병을 해산조치하고 우두머리를

 체포하라는 조칙을 내렸는데 진위대가 순창을 포위해 오자

면암은 왜군과는 결사항전하겠지만 차마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면서 해산을 명하고 스스로

진위대에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군율위반으로 금고 3년형을 받고 대마도로 이송된 뒤에는 굶어죽더라도

 적국인 일본의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일본군 장교가 통역이 잘못되었다고 거듭 사과하고, 이어 다른

의병들이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자결할 필요가 없다고

 간청한 후에야 다시 식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74세의 고령인데다 옥고가 겹쳐 급속도로 쇠약해지더니

병으로 악화되어 결국 면암은 대마도로 들어간 지 4개월 만인

1907년 1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면암은 순국 직전에 남긴 마지막 상소에서, 자신의 나이가 74세이니

죽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처단하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환수하지 못하여 4천년의

 문명이 진흙 속에 빠지고 백성들이 물고기밥이 되는데

 이를 구원하지 못하니 이 점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일이라고 안타까워하였다고 합니다.

 

 면암의 유해는 1월4일 대마도를 떠나 그가 그토록 사랑한 조국으로

 돌아왔으며, 말년을 보낸 충청도 정산에 안장되었습니다.

 

 

문집으로 ‘면암집’이 있으며,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충국시(忠國詩)

백발을 휘날리며 밭이랑에 떨쳐 일어남은

초야에서 불타는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

난적을 치는 일은 사람마다 해야 할 일

고금이 다를 것인가 물어 무엇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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