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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문화재답사

광개토태왕비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1. 7. 4.

광개토태왕비를 찾아서

 

고구려라는 나라의 이름이

장수왕때 부터 고려라고 바꾸어서

 멸망할 때까지 고려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만주에는 고려라는 지명이나 유적들이 많은데

 이것은 왕건이 세웠던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를 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관개토태왕비를 발견 당시에는

 비석만 서 있던 것을 1928년에 유천성이란 집안현

 지사가 보호비각을 세웠고 1982년에 다시 중국이

현재의 대형 비각을 세워서 보호하고 있는 비석

으로 중국에서도 가장 큰 3층 건물 높이로

광개토태왕의 아들 장수왕이 사후 2년

414년에 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 비석은  고구려 19대 광개토태왕의 능비로

414년에 광개토태왕의 맏아들 장수왕이

 광개토태왕 사후 2년에 세우셨습니다

 

 

 

 

광개토태왕비는 방추형의 자연석으로 만들었으며

 비석의 높이는 약 6.39m 배면의 너비는 1.46m

 1.35m 1.48m로 각면이 다른 크기와 문양

 무게는 약 37톤으로 추정되는 규모로

중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라고 합니다

 

 

 

 

정식 명칭은 광개토태왕비라고 불러야 하는데

 중국사람들은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의미의

 광개토 라는 말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고

그냥 호태왕비 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광개토태왕비에는 모두 1,775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에서 1,590자는 판독을 할 수 있으나

나머지는 변조. 훼손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비의 내용은

시조인 주몽의 건국과 광개토태왕의 즉위에서 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대외정복과 업적을 기리고

 릉 지기의 배정에서 부터 준칙사항 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비는 1,600년전 고구려인들이 직접 기록을 한 것

이라서 더더욱 가치가 크다고 하며 옥개석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로 석재는

회색의 응회암이라고 합니다

 

 

 

 

 이 응회암은 광개토태왕비가 있는 집안 부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화산구 부근에서만 발견되는

 석재로 백두산 천지 부근에서 옮겨온 것

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비석을 고정시켜주는 비대석은 가로가 3.35m

세로 2.7m의 직사각형 모양이지만 3개의

 면이 깨어져서 그 형체만 겨우 유지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비석은 1982년 중국에서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서 보호

관리되고 있는 비석입니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 사라졌던 광개토태왕비가

다시 발견된 것은 1877년 경으로 청나라가

 200여년간 요동지역을 사람의 출입을

금하는 봉금지역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안내판에는 영락이라는 고구려의 연호가 아닌 중국 한족의

 왕조 연호인 진 의희 를 사용하고 있으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태왕비에서 태왕릉 사이에

 민가를 400여호나 철거하는 과정에서

대형재단의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광개토태왕비를 발견한 이후 급속도로 훼손된 이유는

 중국이 흙과 청태를 제거하면서 비석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비석에 금이 가고 터지게 되었으며

 

일본이 임나본부설을 주장하기 위해 석회탁본을 하면서

 비석의 일부를 변조. 훼손한 것도 원이이라고 합니다  

 

 

 

 

임나본부설은

일본천황이 가야의 임나 지역에 일본부를 두고 고대 한국을 지배

했다는 일본측의 주장으로 신공왕후가 369년에 규슈에서

바다를 건너와 김해지역으로 상륙하여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고 주변의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임나본부설의 근거를 삼기 위해서 1883년 일본의

첩보장교 사까와 중위가 비문을 조작하여

석회탁본을 하였다고 합니다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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