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주문화재답사

사적 제1호 포석정을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0. 9. 21.

사적 제1호 포석정을 찾아서

 

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별궁으로

연회를 베풀든 곳이고,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키우던 곳이요, 나라의 안녕을 기원

하던 사당이 있었던 곳으로 사적 제1호로

 지정된 곳입니다 포석정은 모양이 전복모양과

 닮았다고 해서 전복포(鮑)자를 써 포석정이라고

 합니다만 중국의 유상곡수연을 본 따 만들었다고

 하며 경애왕 4년(927) 11월에 이 곳에서 연회를

베풀다가 후 백제 견훤의 기습으로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최근에 와서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었다는

학설로 역사의 재조명이 필요한 곳

이라고 합니다 포석정.경애왕  

 

 

  

 국보 1호는 남대문, 보물 1호는 동대문 인데

포석정이 왜 사적 제1호로 지정이 되었을까?

누구나 한번쯤은 의문을 가진답니다

 

 

 

 사적 제1호로 지정된 포석정 입구입니다

 

 

  

 

 이 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이 해설을 듣지 않고

옛날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배운 지식 만으로

혼자서 포석정을 둘러 보고는 실망하는

눈빛으로 돌아서는 허탈한 모습입니다   

 

 

  

 

 건물도 없는 곳에, 돌로 다듬은 작은 수로가,

 그것도 매말라서 물길만 남은 것이

 크기도 작고,

 

 

 

역사적으로도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임금이 풍류나 즐기며 술판을 벌렸다는

좋은 내용을 가진 곳도 아닌 것을

왜 사적 제1호로 지정했을까? 

 

   

 

 일본강점기때 일본 사람들이 신라천년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일부러 깎아 내려 신라의 멸망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이보다는 너비가 30cm에 깊이가 20cm 총길이가

22m의 작은 석조 속에서 굽이치는 굴곡 마다

회오리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느리게 굽어도는

 물 흐름의 깊은 과학적 원리를 신라시대의

 우리 조상들의 과학적 창의성을 높이

평가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전체 모양이 전복의 겉모양과 같다고 하여

 전복포(鮑)자를 써서 포석정

(鮑石亭)이라고 하며

 

 크기는 긴지름이 6.5m 짧은 지름이 4.7m 수로의

깊이가 20cm 너비가 30cm 수로의 전체

길이가 22m 에 모두 63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중국의 명필이요 대문장가인 왕희지는 친구들을 불러 놓고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 한 수를 지어서 읊어야 하며

 

시를 다 짓지 못하면 벌로 술3잔을 마셔야 하는

 잔치인 유상곡수연을 즐겨 하였다고 합니다

 

 

 

 포석정은 중국의 유상곡수연을 본 따서 만들었다고 하며

유상곡수연을 하던 장소가 중국과 일본에도 있었다고

 하나 오늘날까지 그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이 곳 뿐이라고 합니다

 

 

 

술 잔의 크기나 술의 양에 따라서 속도가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물이 굽이쳐 돌면서 흐르므로 술잔이

한바퀴를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 약 10분 정도

 걸렸다고하니 이정도 시간이라면 시 한수는

쓸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포석의 홈도 처음에는 평형을 유지하였으나

 입수부쪽은 느티남의 뿌리가 뻗어가면서

튀어 올라오게 되었고

 

 

출수구 쪽은 흐르는 물에 흙이 깎여서

점점 낮아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돌거북의 입을 통해서 물이 흘러 들어가도록

 조성되어 있었으나 이 거북의 돌을 조선 말엽에

 경주부윤이 옮겨가서 자기 조상 무덤의

비석대좌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행방을

알 길이 없다고 합니다

 

 

 

이 곳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배성못 자리가

 있는데 그 못이 포석정의 수원지라고 하며 북쪽

개울을 건너 대나무 밭 속에 있는 마을이

성남의 이궁터라고 합니다

 

 

 

포석정이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하게

 남아 있는 기록은 없으나  

 

 

삼국유사 권2 처용랑 망해사조에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 했을 때 남산신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헌강왕 때는 벌써 포석정이

있었다는 것이므로   9세기 중엽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석물인데

이 석물은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것으로

포석정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며

 

 

그 밑에는 몇 십년 전 까지만 해도 이 곳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었던

 것을 덮어 놓았다고 합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만지고

위에 앉고 하는 동안 매끌 매끌하게

다듬어지고 있습니다

 

 

 

 

포석정 동편 남산쪽 정원으로 가는 다리입니다

 이 다리를 지나면 계욕장소를

수가 있답니다

 

포석정의 곡선미는 안압지에서도 볼 수 있는데

포석정에서는 안압지처럼 강한 기백을 느낄 수는

 없으나 흐르는 가락의 아름다움과 돌을 다루는

정교한 솜씨로 보아 조각기술이 무르익어

가던 시대인 9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화랑세기에는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행사에 앞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계욕

장소로 보여지는 웅덩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로 수로와 욕조 둘레를

인위적으로 깎은 흔적이 보이는 곳입니다 

 

 

 

 헌강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고 하며

 

그 춤을 헌강왕이 다시 신하들 앞에서 덩실 덩실

 추어 보였다고 하여 남산신의 이름을 따서

 어무상심무(御舞祥審舞)라고 하며

고려말까지도 이 춤이 

전해왔다고 합니다  

 

 

 

 경애왕은 견훤이 영천까지 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한 위급한 상황인데도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며

술판을 벌리다가

 

후백제 견훤의 기습을 당하여 이궁으로 달아났다가

잡혀와서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자결을 하고

 견훤은 김부를 왕으로 세우고 왕족과

기술자, 병기와 금은 보화들을

빼았아 갔다고 합니다 

 

    

 

 포석정이 왕들의 놀이터였다고 하지만 경애왕이

 음력11월이면 한 겨울인데 포석정에서 술잔을

 띄워가며 유상곡수놀이를 할수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또 경애왕은 백제군사들이 가까운 영천까지 쳐 들어와서

 고려 왕건에게 지원요청을 하고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궁녀들과 연회나 즐길 한가로운

입장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한 경애왕은 다급한 심정에 포석사에 와서

 제를 올리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바로

 그 때에 백제 견훤의 군사들이

밀어닥쳤다는 것입니다

 

 

 

 1999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포석정 남쪽에서

 포석(砲石)이라는 명문기와를 발굴하였으며

제기로 사용하였을토기와 술잔 등 제기류

들이 출토됨으로서

 

포석정은 유흥장소가 아니라 국가적인 행사나

 제사의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아니면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입니다만

 

실제로 성남의 이궁터라고 하는 포석정 개울

 건너가정집 굴뚝위로 피어난 살아있는

 대나무 가지들입니다

 

 

 

 신라 제 6대 지마왕릉으로

가는 길 안내판입니다

 

 

 

포석정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평탄

하면서도 인적이 드문 길입니다 

 

 

 

 지마왕의 릉입니다 재위기간은 112년에서 134년

까지이며 왜국과 수교를 맺고 백제의 협조를

 얻어 말갈의 공격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윤을골이라고 하는 포석정 윗쪽에 있는

 불상으로 삼신바위라고도 하는

마애여래좌상입니다

 

 

 

 남산의 바위를 1층기단으로 세워져 있는

늠비봉 5층 석탑 입니다

 

  

     

 늠비봉 부근에 있는 황금불이라고도 하는

 마애여래좌상 입니다 서산에 해가

기울 무렵이면 황금불상이

화려하게 살아 납니다

 

 

 

   지마왕릉으로 가는 길 옆에 있는 감자 밭입니다

 감자밭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차리리 감자 꽃 밭

이라고 해야 할까요? 

 

 

  

 자주 감자 꽃 이라고 하는데 감자 꽃도 예뻐요

무배추 처럼 감자화초로 개량 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 번 올려 보았습니다

 

 

 

 포석정지(鮑石亭址) 안내 자료

 

1. 포석정지는 ?

포석정지는 옛날 신라 왕실의 별궁으로 임금이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며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던 사당(祠堂)이 있던 곳입니다

이 포석정은 사적  제1호(63. 01)로 지정된 곳입니다

국보 1호는 남대문이고 보물 1호는 동대문인데 포석정이 왜 사적 1호로 지정했을까?

전복 모양의 석조만 남아 있으며 왕이 풍류를 즐기고 술잔을 기울이던 곳이었으므로 뜻이 좋은 문화재는 아니지만 물이 흘러가는 원리를 과학적으로 잘 이용한 것 때문에 사적 1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2. 포석정은?

전복 모양과 같다고 하여 전복포자를 써서 鮑石亭 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는 유상곡수연을 하였다고 하는데, 포석정은 이 유상곡수연을 본 따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3. 크기는?

타원 모양으로 긴 지름은 6.5m, 짧은 지름은 4.7m,  수로의 너비는 약 30cm, 깊이는 20cm, 수로의 전체 길이는 22m, 모두 63개의 돌로 조립되어 있습니다.

포석의 홈도 처음엔 평형을 유지했으나 입수부 쪽은 느티나무 뿌리 때문에 튀어 올라왔고 배수구 쪽은 개울물에 흙이 깎여서 낮아졌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돌 거북의 입으로 물이 나와서 홈으로 물이 흘러가게 한 것인데 이 거북 돌은 조선말엽 경주부윤이 옮겨다가 자기 조상 무덤의 비석 대좌로 사용했다고 하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동북쪽에 배성못자리가 있는데 그 못이 포석정 수원지라 전하며, 북쪽 개울을 건너 대밭 속에 있는 마을이 성남 이궁 터라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4. 만들어진 시기는 ?

정확하게 남아 있는 기록은 없으나〈삼국유사〉권2 처용랑망해사조 에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포석정은 9세기 중엽에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돌을 다루는 정교한 솜씨로 보아 9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5. 어무상심무(御舞祥審舞)란?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남산신이 임금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임금은 신하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령하였고 남산신이 산으로 들어간 다음에 이제는 놀아도 좋다고 하니 신하들이 임금께 묻기를,"그 동안 어찌하여 놀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남산신이 내려 오셔서 춤을 추고 계셨기 때문이다."" 남산신이 어떻게 춤을 추셨습니까?"헌강왕이 직접 남산신이 춤추던 모습을 흉내 내어 보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 춤은 남산신의 이름을 따서 어무상심무(御舞祥審舞)라 하였습니다.


6. 경애왕과 견훤

경애왕은 견훤이 영천까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 속에서 경애왕은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해 11월에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경애왕은 백제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다가 기습을 당하여 이궁으로 달아났지만 백제군에 잡혀 왕비와 부하들 앞에서 자결 하였다고 합니다.

견훤은 김 부를 왕으로 세우고 왕족과 기술자, 병기, 보화들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김 부는 백제의 견훤에 의해 신라의 마지막 왕인 56대 경순왕이 되지만 935년 왕건에게 신라 천년의 찬란하던 역사를 넘겨주고 신라는 그 막을 내리게 됩니다.


7. 역사의 재 조명

포석정이 왕과 귀족들의 놀이터였다고 전해오지만 최근에 와서는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경애왕이 11월에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였다는데 음력 11월은 겨울인데 과연 한겨울에 포석정에서 술잔을 띄우고 '유상곡수' 놀이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또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잔치를 하며 놀기 두 달 전에 후백제의 견훤은 경주와 가까운 영천까지 쳐들어와 있었습니다.

다급해진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왕이 잔치나 베풀고 유흥을 즐길 수 있었을까?     그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경애왕이 포석정에 간 것은 잔치를 하며 놀러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보면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한 경애왕은 다급한 심정으로 포석사에 와서 제를 올리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는 바로 그 때 백제의 군대가 밀어닥쳤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포석정을 비운의 장소로 기록한 것은 고려의 사가들이 신라 멸망의 당위성을 역설하기 위해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왕이 춤추며 즐기고 놀았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위기에 처한 신라의 왕과 지배세력들이 국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사료로는 당시 신라왕과 지배세력이 왜 포석정에 갔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8. 포석(砲石) 명문 기와

1999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포석정 남쪽 에서 포석(砲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를 발굴하였으며 제기로 사용되었을 토기와 술잔 등 제기류도 출토됨으로서 포석정은 유흥장소가 아닌 국가적인 행사나 제사의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입니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포석사 또는 포사의 사는 사당사(祠)로 사당은 신주를 모셔두는  집으로 포석사가 삼국시대 신라의 사당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됐습니다.

 

9. 계욕 장소 

화랑세기에는 포석사 에서 길례를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러한 행사에 앞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계욕 장소로 보여 지는 웅덩이가 포석정 옆에서 발견 되었습니다

 

10. 서남산 포석골

서남산의 윤을골과 부엉이골이라고 하는 포석골, 기암골이 서로 만나는 포석계곡은 금오산 정상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약 1km쯤 흘러오다가 부엉드미 부근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윤을곡 여울물을 합치고 배실 여울을 합쳐 포석정 기슭을 씻으며 기린내로 들어가는 2.5km의 깊은 골짜기입니다.

윤을골 = 삼존 마애여래좌상(삼신바위),  해목령,  남산성, 

부엉골(포석골) = 마애여래좌상(황금불),  부흥사,  늠비봉 사리탑,  늠비봉 5층석탑 

 

오늘도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