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압지를 찾아서
안압지라는 이름은?
안압지는 신라시대 때는
월지(月池) 또는 임해전지 라고
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갈대와
부평초가 무성하고 오리와 기러기 만
날아다니는 못이라는 뜻으로 기러기 안
(雁)자 오리 압(鴨)자를 써서 안압지
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사적 제18호
입니다 월지와 임해전지.안압지
안압지가 만들어진 때는?
안압지는 674년(30대 문무왕 14)에 완성되었으며
5년 지나서 679년에 동궁을 만들었는데 임해전은
동궁 안에 있던 건물이며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나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고 합니다
안압지의 발굴은?
1970년대에 경주종합관광개발계획을 수립하고 1973년에
천마총을 발굴하고 황남대총을 발굴한 다음 1974년에
준설작업을 하면서 3만점의 많은 유물들이 출토
되었으며 1975년부터 1976년까지 2년간
문화재연구소에서 연못과 건물터를
발굴 하였습니다
못 바닥에 강회와 바다 조약돌을 옮겨와 50cm
정도로 깔아서 물을 맑게 하였으며 못 가운데
'井'형 목조물 안에 연을 심어 연뿌리가
번져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발굴 조사 결과는?
못은 동서 길이 약 190m, 남북길이가 약l90m의
장방형 평면이며 면적은 1만5,658평방미터
(4,738평)이고, 세 섬을 포함한 호
안 석축의 길이는 1,285m 입니다
삼기팔괴중의 하나인 압지부평(鴨池浮萍)은
안압지에 있는 부평초는 뿌리를 땅에
내리지 않고 수중에 떠서
자란다고 합니다
안압지의 구조는?
월지의 못 안쪽은 돌을 다듬어서 쌓았는데 동쪽과 북쪽은
복잡한 곡선으로 처리하여 리아스식 해안처럼 만들었고
서쪽과 남쪽은 직선으로 쌓았는데 어디서 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못 길이가
길게 보이도록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안압지에서 목선이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발견된 목선은
국내에서 발견된최초의 것으로 우리 배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목선은 경화처리를 거쳐 안압지관에 전시되어있으며.
길이 6미터 너비 1.2미터 규모의 이 배는 세토
막의 통나무 속을 각각 파내고 바닥에 고리를
파서 장쇠로 연결한 통나무 배로 이런
배는 가장 발달된 형태라고 합니다.
동쪽과 북쪽에는 무산12봉을 상징하는 12개의
봉우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선
사상을 상징한 것이라고 하며
아름다운 꽃을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러서 철마다 예쁜 꽃이 피고 새들의
노래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주령구란?
안압지를 발굴할 때 주사위가 하나 출토됐는데
참나무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4.8㎝로 손에
딱 잡히는 크기였으며 보통 주사위와는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정육면체가 아니라 십사면체라는 점입니다
이 중 6개면은 정사각형이었고 8개면은 육각형인데
13면에는 한자로 네 글자씩 적혀 있고 나머지
한면은 다섯글자가 쓰여져 있는데 내용으로
보아 술자리에서 사용되던‘벌칙용으로
신라시대술자리의 풍류를 느끼게
하는 주령구입니다
주령구에 있는 명문에는 음진대소 라 하여 술을 다
마시고는 큰소리로 웃기 삼진일거는 한꺼번에
술 세잔 마시기 농면공가가 나오면 얼굴을
간질러도 꼼작하지 않기 등 14가지의
벌칙이 면마다 쓰여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사위가 지금 없어졌다고 합니다.
출토 직후 수분을 제거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특수 오븐에 넣었는데 온도 과열로 그만
한줌의 재로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오븐에 넣기 전에
주사위의 실측을 하고 전개도를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복제품을 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14면체인 이 주사위를 던지면 각 면이 나올 확률은
모두 같을까? 실측 결과로는 정사각형의 넓이가
대략 6.25㎠였고 육각형의 넓이는 6.265㎝로
넓이는 대략 같았고 확률도 평균치인
500번에 가깝게 나왔다고 합니다
안압지에서 발굴된 500여개의 전 중에서 단 한 개의
보상화문전 측면에 세로로 음각을 하여 조로
이년 한지벌군약소사 삼월삼일 작강
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내용은 조로 2년에 한지벌부에 사는 군약이라는
사람이 3월 3일에 이 전 돌을 만들어서 납품
한다는 뜻으로동궁의 축조 연대가 679年
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의봉4년 개토 라고 쓰여진 암키와를 발견하였는데
의봉4년은 679년으로 동궁을 창건할 때 사용했던
기와로 추정하고 있으며 종전에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에 의해 임해전의 제작 연대가 8세기로
잘 못 판단되었던 것을 7세기로
수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출토된 유물은?
출토된 유물은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는 달리
신라의 궁중에서 사용하던 실생활용품
이라는 점이 특징이며
대표적인 유물로는
주령구 금동판 삼존불좌상 금동화불 동초심지가위,
나무배 등 총 32,587점이 출토되었으며
1985년 박물관에다 단위 유적으로는 최초로
안압지관을 세워서 출토된 배와 유물들을
별관에 따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 삼한시대에는 진한 땅에 6촌으로 이루어진
사로국이었고. BC 57년 박혁거세가
이곳에 서라벌을 세웠으며.
이 나라가 503년(지증왕4)부터 신라로 개칭
발전하였는데 이후 992년간 신라의
왕도 역할을 하였습니다
건물터가 26동, 담장 터가 8개소, 배수로가 2개소,
입수구가 1개소를 확인하였으며
1980년에 발굴결과를 토대로 문화재 관리국에서
안압지 서쪽에 접하여 세워졌던 5개의 건물터
중에서 3개를 복원하였으며
발굴하기 전에 있던 정자는
황성공원 궁도장으로 옮겨 세웠습니다
안압지로 들어오는 물은 거북모양으로 조각한
두개의 수조에 고이게 하였다가 폭포가
되어 떨어져서 안압지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수조에는 용의 입으로 물을 토해서 아래 수조로
떨어지게 만들었는데 지금은 용머리는
없어지고끼웠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월지는 고구려의 토목기술과 백제의
조경사상이 투영된 작품
안압지에 투영된 고구려적 요소는?
석축의 경사가 수직인 점 축조방법으로
산의 돌과 가공석을 동시에 썼다는 점
돌의 규모가 크다는 점 연못 바닥에
돌을 고르게 깔았다는 점
백제적 요소는 ?
신선사상을 연못 조성에 표현했다는 점
삼신사상을 도가사상과 함께 더 발전시켜서
신라 특유의 문화를 제 창조 하였다는 점
연못 속에는 3개의 섬이 있는데 불로초가
자란다는 발해만 동쪽에 있다는삼신산
(방장산, 봉래산, 영주산)을
본 떠서 만들었다고 하며
남쪽에는 큰 섬을, 북쪽에는 중간 섬을 가운데는
작은 섬을 만들어서 월지를 바다처럼
보이도록 축조 하였다고 합니다
못 물의 깊이는 약 180㎝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못을 바다로 상징하여 넓게 보이고자 한 것인데
연꽃이 가득하면 답답하고 좁게 보이기 때문에
못 바닥에 수초가 나지 못하게 강회나
자갈돌을 깔았던 것입니다
입수부를 통하여 들어 온 물은 안압지를 돌아서
나가는데 배수구에는 나무로 된 마개로
수위를 조절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안압지는 들어오는 물을 폭포처럼 떨어지게 한
입수시설, 바다의 섬을 연상케 하는 3개의 섬,
동양의 신선사상을 상징 한다는 무산 12봉,
어느 곳에서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도록 조성한
조경 등은 독창적인 조형 감각이 돋보이는
정원예술 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안압지는 동양 최고의 조경으로 일본인들의
정원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 입니다
무산12봉은 중국 양자강 상류에 있는 무산에서
초나라 양 왕이 선녀와 놀았다는 산으로
선녀가 살고 있는 열두 봉우리의
선경을 의미하며
안압지는 도교의 신선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공 바다를 상징합니다
복원된 건물은 ?
못 주변에서 회랑지(廻廊址)를 포함하여 26개소의 크기가
다른 건물터가 확인되어 그중 서쪽 못가의 5개건물 중
3개만 신라시대의 건물로 추정하여 우선 복원했습니다.
안압지와 임해전 등 부속건물을 추정하여 50분의 1로
축소한 모형도를 만들어 원래의 임해전 모습을
상상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습니다
초석(礎石)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을 그대로 모조하여
회랑지를 제외한 건물 터에만 배치해 놓았습니다
신라가 고려에 합쳐지던 해인 935년(태조18)에
처음으로 경주라 불렀으며,
940년(태조23) 영남지방의 행정 관청인
안동대도호부가 설치되었으며.
987년(성종6) 동경으로 바꾸고, 유수사를 두었으며
1012년(현종3)에 다시 경주가 되었습니다
안압지(雁鴨池) 해설 자료
☸ 안압지라는 이름은?
안압지는 신라시대 때는 월지(月池) 또는 임해전지 라고 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갈대와 부평초가 무성하고 오리와 기러기만 날아다니는 못 이라는 뜻으로 기러기 안(雁)자 오리압(鴨)자를 써서 안압지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사적 제 18호로 입니다
☸ 안압지가 만들어진 때는?
안압지는 674년(30대 문무왕 14)에 완성되었으며 5년이 지나서 679년에 동궁을 만들었는데 임해전은 동궁 안에 있던 건물이며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나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고 합니다
☸ 안압지의 발굴은?
1970년대에 경주종합관광개발계획을 수립하고 1973년에 천마총을 발굴하고 황남대총을 발굴한 다음 1974년에 준설작업을 하면서 3만점의 많은 유물들이 출토 되었으며 1975년부터 1976년까지 2년간 문화재연구소에서 연못과 건물터를 발굴 하였습니다
☸ 발굴 조사 결과는?
못은 동서 길이 약 190m, 남북길이가 약l90m의 장방형 평면이며, 면적은 1만5,658평방미터(4,738평)이고, 세 섬을 포함한 호 안 석축의 길이는 1,285m 입니다.
건물터가 26동, 담장 터가 8개소, 배수로가 2개소, 입수구가 1개소를 확인하였으며 1980년에 발굴결과를 토대로 문화재 관리국에서 안압지 서쪽에 접하여 세워졌던 5개의 건물터 중에서 3개를 복원하였으며 발굴하기 전에 있던 정자는 황성공원 궁도장으로 옮겨 세웠습니다
☸ 안압지의 구조는?
월지의 못 안쪽은 돌을 다듬어서 쌓았는데 동쪽과 북쪽은 복잡한 곡선으로 처리하여 리아스식 해안처럼 만들었고 서쪽과 남쪽은 직선으로 쌓았는데 어디서 보아도 못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못의 길이가 길게 보이도록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연못 속에는 3개의 섬이 있는데 불로초가 자란다는 발해만 동쪽에 있다는 삼신산(방장산, 봉래산, 영주산)을 본 떠서 만들었다고 하며 남쪽에는 큰 섬을, 북쪽에는 중간 섬을, 가운데는 작은 섬을 만들어서 월지를 바다처럼 보이도록 축조 하였다고 합니다
동쪽과 북쪽에는 무산12봉을 상징하는 12개의 봉우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선사상을 상징한 것이라고 하며 아름다운 꽃을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러서 철마다 예쁜 꽃들이 피고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 입수부와 배수부는?
안압지로 들어오는 물은 거북모양으로 조각한 두개의 수조에 고이게 하였다가 폭포가 되어 떨어져서 안압지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수조에는 용의 입으로 물을 토해서 아래 수조로 떨어지게 만들었는데 지금은 용머리는 없어지고 끼웠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입수부를 통하여 들어 온 물은 안압지를 돌아서 나가는데 배수구에는 나무로 된 마개로 수위를 조절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 출토된 유물은?
출토된 유물은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는 달리 신라의 궁중에서 사용하던 실생활용품이라는 점이 특징이며 대표적인 유물로는 주령구, 금동판 삼존불좌상, 금동화불, 금동초심지가위, 나무배 등, 총 32,587점이 출토되었으며 1985년 박물관에다 단위 유적으로는 최초로 안압지관을 세워서 출토된 배와 유물들을 별관에 따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안압지에서 발굴된 500여개의 전 중에서 단 한 개의 보상화문전 측면에 세로로 음각을 하여 조로이년 한지벌 군약 소사 삼월삼일 작강」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내용은 조로 2년에 한지벌부에 사는 군약 이라는 사람이 3월 3일에 이 전 돌을 만들어서 납품한다는 뜻으로 동궁의 축조연대가 679年 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의봉4년 개토 라고 쓰여진 암키와를 발견하였는데 의봉4년은 679년으로 동궁을 창건할 때 사용했던 기와로 추정하고 있으며 종전에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에 의해 임해전의 제작연대가 8세기로 잘 못 판단되었던 것을 7세기로 수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주령구란?
안압지를 발굴할 때 주사위가 하나 출토됐는데 참나무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4.8㎝로 손에 딱 잡히는 크기였으며 보통 주사위와는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정육면체가 아니라 십사면체라는 점입니다. 이 중 6개면은 정사각형이었고, 8개면은 육각형인데 13면에는 한자로 네 글자씩 적혀 있고 나머지 한 면은 다섯 글자가 쓰여져 있는데 내용으로 보아 술자리에서 사용되던 ‘벌칙용으로 신라시대 술자리의 풍류를 느끼게 하는 주령구입니다.
14가지의 벌칙이 면마다 다르게 쓰여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사위가 지금 없어졌다고 합니다. 출토 직후 수분을 제거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특수 오븐에 넣었는데, 온도 과열로 그만 한 줌의 재로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오븐에 넣기 전에 주사위의 실측을 하고 전개도를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복제품을 제작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주령구에 있는 명문에는 음진대소 라 하여 술을 다 마시고는 큰소리로 웃기, 삼진일거 는 한꺼번에 술 세잔 마시기, 농면공가 가 나오면 얼굴을 간질러도 꼼작하지 않기 등
☸ 복원된 건물은 ?
못 주변에서 회랑지(廻廊址)를 포함하여 26개소의 크기가 다른 건물 터가 확인되어 그 중 서쪽 못가의 5개 건물 중 3개만 신라시대의 건물로 추정하여 우선 복원했습니다.
초석(礎石)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을 그대로 모조하여 회랑지를 제외한 건물 터에만 배치해 놓았습니다.
안압지와 임해전 등 부속건물을 추정하여 50분의 1로 축소한 모형도를 만들어 원래의 임해전 모습을 상상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습니다.
안압지는 들어오는 물을 폭포처럼 떨어지게 한 입수 시설, 바다의 섬을 연상케 하는 3 개의 섬,
동양의 신선사상을 상징 한다는 무산 12봉, 어느 곳에서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도록 조성한 조경 등은 독창적인 조형 감각이 돋보이는 정원예술 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안압지는 동양 최고의 조경으로 일본인들의 정원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 안압지 출토 목제 주령구 명문해석
※ 4각형인 여섯 면의 벌칙
1.금성작무 = 禁聲作舞 = 소리 없이 춤추기
2.중인타비 = 衆人打鼻 = 여러사람 코 두드리기
3.음진대소 = 飮盡大笑 = 술을 다 마시고 크게 웃기
4.삼잔일거 = 三盞一去 = 한 번에 술 석 잔 마시기
5. 유범공과 = 有犯空過 = 덤벼 드는 사람이 있어도 가만히 있기
6.자창자음 = 自唱自飮 =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
※ 6각형인 여덟 면의 벌칙
7.곡비즉진 = 曲臂則盡 = 팔뚝을 구부려 다마시기
8.농면공과 = 弄面孔過 = 얼굴 간질러도 꼼짝 않기
9.임의청가 = 任意請歌 =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 시키기
10. 월경일곡 = 月鏡一曲 = 월경 한 곡조 부르기
11.공영시과 = 空詠詩過 = 시 한수 읊기
12.양잔즉방 = 兩盞則放 = 술 두 잔이면 쏟아버리기
13.추물막방 = 醜物莫放 = 더러운 물건을 버리지 않기
14.자창괴래만 = 自唱怪來晩 = 스스로 괴래만을 부르기
☸ 14면체인 이 주사위를 던지면 각 면이 나올 확률은 모두 같을까?
실측 결과로는 정사각형의 넓이가 대략 6.25㎠였고, 육각형의 넓이는 6.265㎝로 넓이는 대략 같았고 확률도 평균치인 500번에 가깝게 나왔다고 합니다.
☸ 무산12봉은 중국 양자강 상류에 있는 무산에서 초나라 양 왕이 선녀와 놀았다는 산으로 선녀가 살고 있는 열두 봉우리의 선경을 의미하며 안압지는 도교의 신선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공의 바다를 상징 하였습니다
☸ 못 바닥에 강회와 바다 조약돌을 옮겨와 50cm 정도로 깔아서 물을 맑게 하였으며, 못 가운데 '井'형 목조물 안에 연을 심어 연뿌리가 번져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 못 물의 깊이는 약 180㎝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못을 바다로 상징하여 넓게 보이고자 한 것인데, 연꽃이 가득하면 답답하고 좁게 보이기 때문에 못 바닥에 수초가 나지 못하게 강회나 자갈돌을 깔았던 것입니다.
☸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 삼기팔괴중의 하나인 압지부평(鴨池浮萍)은 안압지에 있는 부평초는 뿌리를 땅에 내리지 않고 수중에 떠서 자란다고 합니다
☸ 안압지에서 목선이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발견된 목선은 국내에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 우리 배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목선은 경화처리를 거쳐 안압지관에 전시되어있으며. 길이 약 6미터, 너비 1.2미터 규모의 이 배는 세 토막의 통나무 속을 각각 파내고, 바닥에 고리를 파서 장 쇠로 연결한 통나무배로. 이런 배는 가장 발달된 형태라고 합니다.
☸ 삼한시대에는 진한 땅에 6촌으로 이루어진 사로국이었고. BC 57년 박혁거세가 이곳에 서라벌을 세웠으며. 이 나라가 503년(지증왕 4)부터 신라로 개칭·발전하였는데, 이후 992년간 신라의 왕도 역할을 하였습니다.
☸ 신라가 고려에 합쳐지던 해인 935년(태조18)에 처음으로 경주라 불렀으며, 940년(태조23) 영남지방의 행정 관청인 안동대도호부가 설치되었으며. 987년(성종6) 동경으로 바꾸고, 유수사를 두었으며 1012년(현종 3)에 다시 경주가 되었습니다.
☸ 월지는 고구려의 토목기술과 백제의 조경사상이 투영된 작품
☸ 안압지에 투영된 고구려적 요소는?
석축의 경사가 거의 수직인 점 축조방법으로 산의 돌과 가공석을
동시에 썼다는 점
돌의 규모가 크다는 점 연못 바닥에 돌을 고르게 깔았다는 점
☸ 백제적 요소는 ?
신선사상을 연못 조성에 표현했다는 점 삼신사상을 도가사상과 함께
더 발전시켜서 신라 특유의 문화를 제 창조 하였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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