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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고달사지를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09. 11. 15.

고달사지를 찾아서

 

문화유산 탐방자들이 으뜸으로 꼽는 곳이 여주의 고달사지와 양주의 회엄사지라고

정도로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고 고려 4대 광종 이후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대가람으로 지내 왔으나 언제쯤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고달사지에는 국보 제 4호인 석조예술의 대표작

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도탑이 있고 보물 제 7호인 원종대사

혜진탑이 화려함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폐사지로는

경주의 황룡사지, 양주의 회엄사지, 여주의 고달사지가

폐사지로 는 곳들입니다

 

 

 고달사지는 크기 뿐 아니라 유적들이

경주의 신라 석조유물의 뒤를 이어 고려로 이어지는

불교미술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중요한 곳이라고 합니다

 

 

고달사지에 외롭게 남아있는 석조입니다

경주의 석조처럼 화려한 연화무늬는 없어도 큰 석조입니다

 

 

 고달사지에는 국보 제 4호인 고달사지 부도와

원종대사 혜진탑 귀부 및 이수가 보물 제 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문화재 입니다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보물 제 8호입니다 

 

최근에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터를 비롯한 건물터를 확인하고,

절터의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처음 세워진 후, 고려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절로 성장하였다. 고달사에는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전합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 귀부 및 이수는 보물 제6호라고 합니다

부도는 스님의 사리를 모시는 탑으로 승탑이라고도 합니다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은 보물 제282호라고 합니다 

 

 

고달사지에 있는 돌 조각품들은 어느것이 더 훌륭한 것인가?

라는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할 정도로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 데에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정교하면서도

숙련된 솜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원종대사비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고

비신은 깨어진 채로 경복궁에 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비문은 혜목산 고달선원 국사 원종대사지비 라는 제액이 있습니다

 

 

혜목산 고달선원 국사 원종대사지비

(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之碑)

 

   

비문에 의하면 이 비는 고려 5대 광종 975년에

조성되었다라고 기록학고 있습니다

 

 

 신라의 무열왕릉 비와 비교를 해 본다면 신라의 귀부는

거북이 머리가 사실적으로 거북이 머리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고달사지의 귀부는 거북이의 몸체에 머리는

거북이가 아닌 용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신라 이후부터 고려 초기로 오면서 귀부의 얼굴은

용의 얼굴 모습으로 변하게 된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수의 용의 얼굴 모습도 신라의 용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귀부의 꼬리와 발의 모습이 비교적

온순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습니다.

 

  

 고달사지 부도탑은 국보 제 4호로 고려 석조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 명성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 부도탑은 비교적 완전하게 잘 보존되어 있으나

부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부도의 주인을 알 수가 없어서 명칭을

고달사지 부도라고만 지칭하고 있으나

 

 

 최근에 자들은 원종대사의 스승인 원감대사의

부도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사천왕상의 모습입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사천왕상과 문비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국보 제 4호인 부도탑과 중대석의 조각들입니다

 가운데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집니다. 

 

 

 몸체는 거북이 형상입니다만

머리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용이 비천하는 모습을 조각해 놓은 것 같습니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습니다.  

 

 

 돌에 꽉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집니다. 

 

 

원종대사 혜진탑은 보물 제 7호라고 합니다

 가운데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습니다.

 

  

 사리를 모셔둔 탑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습니다

 

 

 원종대사는 비문에 의하면 신라 경문왕 9년(869) 13세에 출가를 하여

 

 

 22세에 양주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원종대사는 23세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서주에 있는 적주사 에서

자선화상의 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경명왕 5년에 신라로 돌아와서 광주 천왕사에 주석하다가

90세로 입적을 하였다고 합니다

 

 

 고려 광종이 애도하여 원종대사혜진이라는 시호를 내리시고

영정도 그리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 비는 스님이 돌아가시고 17년이 지난

975년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원종대사의 사리탑은 보물 제 7호로

977년에 세웠다고 합니다

 

 

 용두를 만들면서 용의 뿔을 따로 만들어서

꽂았던 홈 이라고 합니다

 

 

탑의 중대석에는 4개의 문비와

4구의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거북모양의 귀부에 머리는 용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탑은 국보 4호인 고달사지 부도탑과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탑의 양식이나 조각의 문양과 수법이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모두

닮아 있습니다  사리탑 하대석의 연꽃 문양입니다

 

 

망주석이나 문인석 같기도 합니다만

석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들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집니다. 지붕돌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습니다.

  

 

부도탑은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며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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