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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를 찾아서

경주 석굴암을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0. 9. 21.

경주 석굴암을 찾아서

 

석굴암은

인도에서 더위를

 피하기 위해 굴 속에 절을

 짓고 수도를 한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인도에서 발원한 석굴사원과 서양

에서 완성된 돔 지붕의 결합을 우리 불국사 

석굴암의 건축에서만 볼수있는 유일한 독창성

이라고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는

석불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석불사는 경덕왕

10년 (751)에 김대성이 창건하여 혜공왕 

10년 (774)에 완성을 하였으며 창건 

당시에는 석불사 라고 하였습니다 

 

 

  

  서라벌에는 오악 이라 하여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을 동악,

보희와 문희의 꿈을 사고 팔았다는 선도산을 서악,

노천박물관이라고 하 남산을 남악,

이차돈의 목이 떨어졌다는 소금강산을 북악,

선덕여왕의 왕릉이 있는 낭산을 중악

이라고 하였습니다

 

 

 

 윗쪽에 릉처럼 보이는 곳이 석굴암이고

그 앞쪽에 보이는 기와집이 전실입니다

이 곳에서 석굴암의 안쪽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세계 문화유산인 국보 제24호 석굴암을 길이 보존

하기 위해서라면 유리벽 밖에서만 관람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석굴암 전실의 지붕 위에는 잔디로 덮혀 있는

부분이 바로 석굴암의 산층 부분입니다

  

 

석굴암으로 들어가는 전실입니다

  우리는 이 곳에서 석굴암 내부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직사각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입구인 전실은 인간의 세계인 땅을 의미하고

둥근 모양의 주실은 부처님의 세계로

하늘을 나타내는 천원지방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팔부중상의 모습입니다 팔부중상은 인도의 잡신들이

석가의 설법으로 교화된 후 개종하여 불법에

귀의하였으며 불법의 수호신입니다  

 

 

석굴암의 전실을 지나 사천왕실로 들어가는 입구의

 양쪽에 있는 금강역사상은 인왕상이라고도 하는데 

 탑이나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의 역할을 합니다 

 

 

수미산의 사방을 관장한다는 사천왕상입니다

동방지국천왕, 서방 광목천왕, 남방 증장천왕으로

 모두 칼을 들고 있지만 북방 다문천왕은

보탑을 들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제석천상으로 오른 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 불자를

쥐고 있고 왼손은 손바닥을 펴서 금강저를

살짝 올려 놓고 있는 모습입니다  

 

 

 십일면관음상 좌우에 있는 십대제자상으로 석가여래의

제자 중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10인을 말하며 

 얼굴모습과 제능이 모두 다릅니다 

 

 

 십대제자의 덕목은 지혜. 신통. 두타. 혜공. 설법. 논의. 천안.

지율. 밀행. 다문의 으뜸으로 구별하는데  위의 사진은

유일한 우측 면관을 하고 있는 지율의 으뜸인

우바리 라고 하는 제자상입니다

 

 

 십일면관음보살은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고

중앙에 있는 보현보살은 불경첩을 들고있으며

문수보살은 발우를 들고 있습니다

 

 

 십일면 관음보살의 모습입니다

자비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보살로 얼굴이 열개인데

이것은 다양한 성품을 가진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본존불 뒤에는 보이지 않았던 광배가 뒷 벽면에

 끼워져 있는데 모리광배라고 합니다

 

원형의 두광은 2단의 띠 안에 20엽의

연꽃을 새긴 중간 원이 있습니다

 

 

 

 본존불의 뒷 모습인데 광배가 보이지 않습니다 

 

천정에 있는 천계석은 3조각으로 갈라져 있는 모습이

설화의 내용을 사실인것 처럼 증명하고 있습니다

 

  

 

 김대성이 천계석을 다 만들었는데

그만 세도막으로 갈라져서

낙심을 하고 누워있는데 

 

천신이 내려와서 올려 놓고 갔다는데

 천신에게 향을 피워 놓고 감사의 례를

올렸다는 향령이라고 합니다

 

 

 

   두광 조금 밑에는 작은 감실을 좌우로 각각 5개씩 만들고

감실 안에는 보살상을 안치하고 있습니다만 입구쪽에

있던 두 보살상이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시멘트와 전실 유리벽을 하면서 내부에서 발생하는

 습기를 제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계실입니다

 

 

 

하층에는 감로수가 있고 중층에는 수광전이 있으며

윗쪽에는 석굴암의 전체 모습이 

한 눈에 들어 옵니다

 

 

 

 석굴암의 십일면 관음상 뒷쪽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석굴암 내부의 결로현상을 차단해 주던 물이

 흘러 내리는 감로수인데 이 물이

대종천의 발원지라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상의 지물을 보면 감로병을 들고 있는데

감로병 속에는 감로수가 들어 있으며 감로수는

 불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석굴암에서 흘러 내리는 이 감로수를

마시면 불사한다는 바로

그 감로수 입니다

 

 

 

 석굴암 아래에 있는 수광전의 모습입니다

 

 

 

 아니온듯 다녀가세요 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입구에서 바라 본 수강전의 전경입니다

 

 

 수광전 앞에 있는 석등입니다 멀리 보이는

곳에 동해 바다가 있습니다

 

 

    석굴암 아래 강전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광명이

단풍을 더욱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자연의 빛 그 조화로움이 신비의

손길을 가꾸어 갑니다

 

 

 

 석굴암의 동편 언덕에 있는 요사체 앞에 있는

특수한 형태의 삼층 석탑입니다 

 

 

 

사찰에서 이 곳은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곳입니다

 

 

 

 석탑은 2중 기단의 3층 석탑인데 지대석과 상하

 갑석은 원형이고 그 사이의 중석은 8각형인데

 

 

 

모서리에는 우주를 조각하여 석굴암

본존불 대좌를 모방한 것 같습니다 

 

 

 

탑신부는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층급 받침이 3단인 것으로 보아 신라 하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석굴암을 여러번 수리를 하면서 나온 부재들입니다

엄청 많습니다 다른 곳에도 또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수리나 개축을 하면 부재들이

모자라는 것이 상식입니다만 ...

 

 

 

 보수공사를 하고 남은 부재들이

이곳에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어느 일본인 신도가 석굴암 본존불앞에서

찬불가를 불어 찬미하는 모습입니다

 

 

 

 

어린이가 돌 계단에 앉아서 넋을 잃고

경청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돌발스런 연주에 발길을

멈추어 찬불가를 들었습니다 

 

 

 

 

부사에 참여한 신도들의 기원문입니다만

내국인 보다는 외국인들의 글씨가

더 많이 눈에 뜨이는 것 같습니다

 

  

  

 10월 하순이라선가 석굴암의

단풍이 아름답습니다

 

 

 

 

 안내판 앞에서 해설을 듣고 있는 모습입니다만

 색색의 옷들이 단풍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석굴암  안내판 바로 위의 단풍입니다

 

 

 

 

 석굴암 아랫쪽에 있는 석굴암 안판입니다

많은 내외국인 관광객들이 이 곳에서

해설을 듣고 있는 모습입니다

 

 

 

 

 안내판 바로 윗쪽에 있는 아름다운 단풍입니다

 

 

 석굴암 문화관광 안내소 입니다

 

우리 국어는 물론  일어, 중국어, 영어를 해설해

주시는 해설사들이 근무하고 있는

 해설사의 집입니다

 

 

 

 토함산 주차장에서 석굴암으로 들어가는 일주문입니다

일주문에서 10분 에서 15분 정도면 석굴암에

 도착할 수 있는 평탄한 길입니다

 

 

 

 일주문 앞에 있는 단풍입니다 붉다 못해

 검은색으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먼저 석굴암 주차장에서 석굴암을 입장하기 전에

매표소 뒷편인 일주문 반대편으로 토함산

등산로가 있어서 등산부터 하기로 합니다  

 

 

 

88 올림픽때 채화장소로 선정되어 그 흔적들이

남아 있는 성화 채화지를 지나게 됩니다

 

 

 88 성화채화지 기념 작품을 자연석에 남겨 놓았습니다 

오래된 불적 같습니다만 하늘로 부터 불의 씨앗을

받으려는 염원이 담겨져 있는 작품입니다

 

 

 

 연화대좌처럼 예쁜 앙련으로

장식된 채화 대입니다

 

 

 채화대 윗면에는 오목렌즈처럼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채화장소에서 동쪽으로는 석굴암이,

서쪽으로는 불국사기 있는

토함산의 능선입니다

 

 

 

국립공원인 경주 토함산 정상의 높이가  해발 745m 입니다

석굴암은 이 보다 아래인 해발 565m 의

위치하고 있습니다

 

 

 

 귀하신 분들이 정상에 올라서 동해랑 무장사지가

있는 곳들을 번갈아 봐 가면서 다음 코스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토함산 정상에 있는 갈대 숲입니다    

억새 밭이 아니라 갈대 밭입니다

 

매년 이 맘때면 이 갈대밭이 보고 싶어서

토함산을 오르곤 한답니다

 

 

 

최재호씨의 시 토함산이라는 시비가

찾는이들을 반겨 주고 있습니다

 

푸른 숨결 돌려놓고 연좌에 앉으신 님은

웃음마져 좋으셔라   

   

 

 이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옛날의 물탱크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토함산에는 군데 군데 이런 바위의 모습들을 볼 수가

있는데 석굴암과 불국사의 대역사를 창조하는데

 필요한 석자제들을 만들기 위해서 쐐기를

박기위해서 파 놓은 구멍들이라고 합니다  

 

 

 

토함산 자락에는 황금물결이 넘실거리고 

저멀리 흰색 건물이 보이는 곳이

바로 문무대왕의 수중능이

 있는 곳입니다

 

 

 

 토함산 주차장에 있는 범종각입니다

 

석굴암 관광을 준비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보고 들은 내용들을 정리하여 간략하게

한 번 올려 봅니다

 

   

 

 

 

⦿ 경주 석굴암을 찾아서 ⦿

 

Ⅰ. 토함산

경주에는 5악이라 하여 동악은 토함산, 서악은 선도산, 남악은 남산, 북악은 금강산, 중악은  낭산 이 있습니다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팔공산)

토함산은 해발 745m로 경주에 있는 산 가운데서 단석산 (827) 다음으로 높은 산 입니다  ( 남산 고위봉 494 금오봉 468 선도산 380 금강산 177 )

토함산(吐含山)이라는 이름은 안개와 구름을 토하고 삼킨다는 뜻입니다.

 


Ⅱ. 석굴사원의 유래

석굴암은 인도에서 더위를 피하기 위해 굴속에 절을 짓고 수도를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그 후 중국으로 전해져서  삼국시대 후기에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Ⅲ. 석굴암의 창건

석굴암은 토함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조금 내려온 해발 565m 에 위치하고 있으며  방향은 정동에서 남쪽으로 26˚ 틀어져 있어서 대왕암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경덕왕 10년(751)에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습니다.

경덕왕(35대)은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 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Ⅳ. 석굴암의 구조

석굴암은 단단한 화강암을 정으로 쪼아서 만든 인조 석굴사원 입니다.

☸ 석굴암은 사각형으로 된 전실과  원형으로 된 주실 그리고 전실과 주실을 연결하는 사천왕실로 되어 있는데 앞의 네모난 방은 인간세계이고 본존불이 계신 곳은 둥근 방으로 부처님의 세계라고 합니다 

옛날 엽전도 안쪽의 네모는 땅을 상징하고 태두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세계인 땅과 부처님의 세계인 하늘을 사천왕실이 연결하고 있다고 합니다  

☸ 전실 양쪽 벽에는 4구씩의 팔부신중을 배치하였습니다. 8부신중은 부처님을 모시거나 불법을 수호하는 신들입니다

☸ 전실에서 사천왕실로 향하는 입구의 좌우 벽에는 금강역사를 배치하였습니다. 금강역사는 인왕상이라고도 하며 탑이나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장입니다 

☸ 사천왕실 (비도 : 사다리) 은 양쪽에 2구씩의 사천왕을 배치하였습니다.

동방은 지국천(칼), 서방은 광목천(칼), 남방은 증장천(칼), 북방은 다문천왕(보탑)이 지키고 있으며 사방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입니다

☸ 주실 입구 좌우에는 천부상인 제석천과 범천이 있는데 주실 좌우에서 본존불을 밀착 경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 천부상 다음으로 좌측에 보현보살이, 우측에는 문수보살이 있습니다 

☸ 보살상의 좌우로 각각 5구씩 10구의 십대제자상이 있는데 십대제자는 부처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열 분의 제자를 말 합니다  

☸ 본존불 바로 뒤에는 십일면관음보살이 있는데 본존불과 겹쳐 있어서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석가와 관음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사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십일면관음보살은 자비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보살로 얼굴이 여러 개인데 이것은 다양한 성품을 가진 중생들을 모두 구제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 주실의 중심에서 약간 뒤로 연화대좌 위에는 본존불이 있는데 머리는 나발이고 이마에는 백호가 있습니다

본존불은 얼굴은 2.2자 가슴은 4.4자 어깨는 6.6자 무릎은 8.8자로 1:2:3:4의 비율로 만들어진 우리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고 합니다

본존불의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서 석가모니불이라고도 하고 창건설화로 볼 때는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항마촉지인은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며 땅을 짚어 부처의 영광을 증명하게 하는 손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본존불의 바로 뒤 십일면관음의 위쪽에 연화문의 두광이 새겨져 있습니다.

☸ 두광의 약간 밑에는 좌우로 각 5개씩 10개의 작은 감실을 만들고 안에 보살상을 안치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좌우 4체씩 모두 8체 뿐이며, 나머지 2개의 감실은 빈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 주실의 천장은 천계석이 원형의 연화모습으로 연실까지 표현되어 있는데 3조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 석굴암에는 팔부신중 8구, 인왕 2구, 사천왕 4구, 천부상 2구, 보살 3구, 제자상 10구, 본존불 1구, 감실상 8구로 모두 38체가 있습니다.

☸ 석굴암에는 모두 40체의 불상이 조성되었으나 감실에 있는 불상 2체가 분실 되었습니다

☸ 본존불 앞뒤로 작은 탑이 있었는데 본존불 뒤의 5층탑은 일본으로 반출된 후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하며 앞에 있던 탑은 파손되어 경주국립박물관에 있다고 하며 대석만 남아 있습니다


 

Ⅴ. 석굴암의 과학적인 신비

1. 석실내의 습기를 과학적으로 제거하였다는 점입니다

11면 관음보살의 발아래 샘은 지금도 감로수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샘물을 석실의 바닥에 돌을 깔아서 그 사이로 찬 물이 흘러가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석실 안으로 습기를 머금은 외부 공기가 유입되면 위쪽은 따뜻하지만 아래쪽은 차기 때문에 이슬이 맺혀 돌 사이로 흐르는 물에 합치게 되는 현상이 반복되어 석실 내의 공기는 항상 일정한 습도를 유지하게 된다고 하며 여름에 냉장고에서 찬 사이다병을 꺼내서 잠시만 두면 사이다 병에 물방울이 맺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물이 발원되어 감은사 앞을 흐르는 대종천을 이루는 발원지가 됩니다

2. 착시현상을 이용한 점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았을 때 실제와는 다르게 보이는 현상으로 건물의 기둥을 아래위로 지름의 크기가 같은 원통(민흘림)으로 만들면 가운데가 잘룩하게 보이므로 가운데를 배가 부르게 (배흘림)만든다는 것입니다

1) 본존불이 중심선보다 뒤에 있다는 점입니다

밝은 색은 실상보다 앞에 나와 보이는 현상으로 석굴에 빛이 비치면 본존불이 밝게 보이고 다른 부분은 어둡게 보이므로 본존을 가운데 앉히면 앞으로 튀어나와 보이게 되어 신자들에게 거북한 느낌을 주게 됨으로 중심선 보다 뒤로 모셨습니다

2) 오른손 손가락과 왼손 손가락의 길이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손가락의 길이를 같게 하면 늘어뜨린 손가락이 짧게 보이므로 무릎위에 놓인 손가락을 조금 짧게 하였습니다

3) 본존불은 크게 만들고 다른 상들은 작게 만들어서 같은 크기라도 좀 더 본존불이 크게 보이도록 하였다는 점입니다

4) 석굴의 크기도 상단에 작은 감실을 만들어 상대적으로 엄청 큰 석굴로 착각하도록 배려했다는 점입니다


3. 화강암을 절단하고 다듬을 수 있는 연금술

학창 시절에 불국사 다보탑을 공부하면서 단단한 화강암을 콩고물 주무르듯 돌을 다루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만 요즈음처럼 마석기나 절단기도 없이 망치와 정 하나 만 가지고 사람의 손으로 크고 단단한 돌을 자르고 두드리고 다듬어서 수 많은 불상들을 만들었다면 여기에 필요한 망치와 정을 만드는데도 보이지 않는 연금 기술이 발달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Ⅵ. 석굴암 보수공사의 문제점

석굴암은 1907년 일본인 집배원이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인들에게 그렇게 알려졌을 뿐입니다 

석굴암은 창건 후 한 번도 맥이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조선 말기인 19세기말에는 울산병사로 있던 조순상이라는 신도가 수리도 하고 보호 했다고 하여 ‘조가 절’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조선시대 우담 정시한 의 산중일기가 있습니다.

정시한의 산중일기는 석불사의 당시 모습을 소상히 적고 있는데 그 내용으로 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석굴암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 상태로 잘 보존되어왔음을 알 수 있는 우담 정시한의 산중일기를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석굴암에 당도하니 해명스님이 맞아들인다.

잠시 쉬고서 석굴에 오르니 사람들이 공들여 만들었는데 돌문 밖 양 편에도 불상을 새겼다. 

큰 돌에 각 네 다섯 씩을 새겼는데 그 기교함이 하늘의 솜씨인 듯 석문은 돌을 다듬어 무지개 모양을 하였고 그 안에 큰부처가 있는데 살아 있는 듯하다.

 

좌대석은 반듯하고 아름답고 굴의 천장이나 여러 구조석이 하나도 어그러지지 않았고 열립한 불상들은 다 살아 있는 듯 하나 그 기묘한 형상과 이름을 알기 어렵구나  다시 보기 어려운 장관을 오래 본 뒤에 내려와 암자에서 잤다.


이 글을 보면 우담 정시한이 본 석굴암은 아무런 파괴나 일그러짐이 없이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위대한 조형물임에도 불구하고 창건 이후 어떠한 역사적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1) 일본인 (1913 ∼ 1915) 3년간, 시멘트 사용

2) 누수로 2차 중수(1917년)

3) 3차 중수(1920 ∼ 1923) 4년간


1907년 일본인들에게 알려진 후 1913년까지 조사활동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조사가 끝나자 일본인들은 1915까지 3년에 걸쳐 보수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전면 해체되는 비운을 겪게 되는데 복원할 때 기차터널 입구처럼 시멘트를 사용하여 토목공사를 하였기 때문에 보수공사가 완공된 후 결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보수 공사를 할 때 십일면관음보살 밑으로 샘물이 솟아올라 본존불 대좌 아래로 흘러서 지금의 감로수에 이르는 물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사를 하면서 이 물길을 돌렸습니다. 이 샘물은 석굴의 바닥 밑으로 흐르면서 바닥의 온도를 일정하게 냉각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냉각된 바닥은 석굴내부의 습기를 응결시켜서 바닥에 맺히도록 하는 역할을 한 것인데 이 샘물을 막았으니 석굴내부 벽면과 천장까지 결로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석굴이 흙으로 덮여 있었을 때는 습기를 품은 공기가 밖으로 빠져 나올 수가 있었으나 시멘트로 덮은 후에는 석굴이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현재 석굴암 입구에는 목조전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1963년 황수영 박사가 보수공사를 할 때 겸재 정선의 ‘교남명승첩(1733)’에 나오는 석굴암 그림에 목조건물이 그려져 있는 것을 근거로 설치된 것입니다.


보수공사를 하면서 목조전실을 만들었으나 외부 온도는 높고 실내 온도는 차가워서 결로현상으로 물방울이 맺히게 되어 뒤편에 다시 습기 제거 장치를 하였습니다


그 뒤에 규장각에서 지도를 정리하던 중 토함산지도를 발견했는데 지도에 토함산의 많은 절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교남명승첩에 나오는 목조전실은 석굴암이 아니라 기림사의 골굴암 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인도와 중국에 있는 석굴사원은 빛이 석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으나 석굴암에는 현재 석굴 안으로 빛이 들어갈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Ⅶ. 석굴암 삼층석탑 (보물 제911호)

석굴암의 동편 언덕에는 요사체 앞에 특수한 형식의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찰에서 이곳은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석탑은 2중기단의 3층 석탑인데 지대석과 상하갑석은 원형이고 그 사이의 중석은 8각형인데 모서리에는 우주를 조각하여 마치 석굴암 본존불의 대좌를 모방한 것 같습니다.

탑신부는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각 층의 층급 받침이 3단인 점으로 보아 신라 하대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Ⅷ. 석굴암을 나오면서

석굴암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 때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종합적으로 결합하어 이룩한 명품 중의 명품입니다.

현재 석굴암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습니다.

 

 

⦿ 석굴암 창건설화 ⦿


 

1. 김대성의 효행. 호국설

 

석불사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와 불국사 고금창기, 우담 정시한의 산중일기를 들 수 있는데 먼저 삼국유사의 『대성 효 이세 부모 조』 에 보면

모량리에 사는 경조라는 여자에게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편편하여 성처럼 생겼으므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성이라는 아이는 집안이 가난하여 복안이라는 부잣집에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그 집에서 밭떼기 하나를 주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점개라는 스님이 흥륜사에서 육륜회를 열려고 복안의 집에 와서 시주를 부탁하니 베 50필을 시주하였습니다.

점개가 축원하기를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고 무병장수 하라”고 하였습니다.


대성이 이 말을 듣고는 집으로 뛰어가서 어머니께

내가 스님 말을 들어보니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전생에 적선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가난한 것입니다.

이생에서 또 시주를 하지 않으면 저 세상에서는 더 가난할 것이니 내가 품팔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니 어머니가 “좋다!” 고 하여 그 밭을 시주하였습니다.


며칠 후에 대성이 죽었는데 이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서는 하늘로부터 “모량리의 대성이라는 아이가 이제 너의 집에 태어날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집안사람들이 모두 놀라 사람을 시켜서 모량리에 가보니 과연 대성이 죽었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던 날 같은 시간에 아기를 배어 낳으니 아기가 왼손을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야 폈는데 대성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금간자가 있어서 이름을 대성이라 짓고 에전 어머니를 이 집으로 모셔 와서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대성이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날이 어두워 산 밑에 있는 마을에서 자고 있었는데 꿈에 그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말하기를,

“네가 무엇 때문에 나를 죽였느냐. 내가 환생하여 너를 잡아 먹으리라!”고 하니 대성이 무서워 떨면서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귀신이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절을 세울 수 있겠느냐?”고 하여 대성이 그러겠다고 맹세하고 깨어보니 땀이 흘러 요를 다 적셨다고 합니다.


이후로 대성은 사냥을 하지 않고 곰을 잡았던 자리에 장수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대성은 이생의 부모님을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서는 석불사를 세워서 양육한 은혜를 갚았다고 합니다.

 

 


2. 경덕왕의 득남 기도처(표훈대사) : 혜공왕

 

경덕왕이 아들을 얻기 위하여 표훈대사를 불러 천상을 오고 가게 했을 때 석굴암이 바로 천상을 통하는 표훈스님의 기도처이고 그렇게 해서 얻은 아들이 혜공왕이라고 합니다


☸ 경덕왕은 첫째 삼모 부인(김순정의 딸)사이에 자식이 없자, 둘째 만월부인(김의충의 딸)을 맞이합니다.  


하늘의 도움을 받고자 당시 명망이 높았던 표훈스님에게


"내가 덕이 없어 아들을 얻지 못하였으니,

대덕은 상제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달라"


천제는 "딸은 구한다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될 수 없다"고 하자

"과인은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이 꼭 필요하니 아들로 바꾸어 달라"


"그렇게 된다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나라가 비록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이어면 족하다"


즉위 17년 7월 23일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게 됩니다. = 36대 혜공왕

 

☸ 경덕왕릉은 사적 제23호로 내남면 부지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석굴암 관련 이야기들  ⦿


1.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황태자비 내외 석굴암 관람  

 

1992년 11월에 에드워드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황태자비 내외가 방한했습니다.

찰스 황태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석굴암을 보는 일정이 있었는데 관람시간을 5분으로 짰는데, 30분이 넘어서야 나와서 하는 이야기가, 이렇게 보고 있으니, 이 석굴암을 지은 사람에게 자신이 참 송구스런 마음이 들더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런 걸 지었을까. 어떤 마음을 가져야 이런 걸 지을 수 있을까.

 

2. 언더우드 가의 석굴암 방문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한 언더우드(원한경)의 4대손 토마스 언더우드가 할아버지가 남긴 90년 전, 석굴암의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찍은 사진첩을 들고 경주를 찾았습니다

1913년, 사진속의 석굴암은 콘크리트나 시멘트를 덧칠한 흔적 없이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1920년대 석굴암 앞에서 찍은 사진은 10년 사이에 석굴암의 모습이 달라졌음을 보여줍니다.

"일제가 돌 틈을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막아버리는 바람에 석굴암이 많이 훼손됐어요!"  언더우드씨는 또 석굴암이 세계 최고의 건축물이라며 개인적인 소망을 말했습니다.

"석굴암이 햇빛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석굴암을 둘러싼 건물을 해체하면 좋겠다"는 말도 남겼습니다

 

 


3. 항마촉지인

 

석존이 득도하기 전에 정각산 선정굴에서 내려와 보리수 아래 금강보좌에 앉아 선정에 들면서 석존이 정각이 되지 않으면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는데 이 때 마왕 파순이 방해를 합니다

그 이유는 석존이 만약에 득도를 하게 되면 일체의 중생은 구제되고 마왕의 위력은 없어지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왕은 세 미녀를 보내어 교태를 부리면서 세속의 쾌락이 출가의 즐거움 보다 좋은 것이라고 유혹을 합니다 그러나 마왕의 이 작전이 실패하자 악마의 세력을 동원하여 힘으로 쫓아낼려고 할 때 제1의 지신이 나타나 도와주려고 하였으나 석존은 걱정하거나 겁내지 말라 나는 인내의 힘으로 악마를 항복시킬 것이라고 하면서 타일렀다고 합니다

마왕은 석존에게 칼을 들이대면서 너는 신성한 이 보좌에 앉을 자격이 없는 자이니 빨리 떠나라고 위협을 하지만 석존은 천상천하에 이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라고 하면서 지신이여 이를 증명하라 고 하면서 선정인의 자세에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을 때  제 2의 지신이 튀어 나와 이를 증명하였는데 이 때의 석존의 손 모양이 항마촉지인이라고 합니다 

 

 

4. 석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아 서라벌로 진출한 이야기

 

탈해는 남해왕 때 아진포에서 아진의선이라는 할머니가 키웠는데 하루는 지팡이를 끌고 종 두명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가서 돌집을 짓고 7일동안 머물면서 서라벌 안에 살기 좋은 곳을 물색하던 중 호공이 살고 있던 땅에 숫돌과 숯을 묻는 기지를 이용하여 우리는 조상 대대로 대장장이라고 하면서 우리집이니 돌려달라고 하여 호공의 집을 빼앗게 된 이야기인데 석탈해가 지략이 많은 것을 알고 맏사위로 삼아서 왕위를 물려주게 됩니다

 

 


5. 하인의 입에 뿔잔이 붙은 이야기

 

석탈해(토해)가 토함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하인에게 물을 떠 오게 했는데 물을 떠 오다가 먼저 먹었는데 뿔잔이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자 탈해가 꾸짓으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뿔잔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로 탈해를 따르는 사람들이 탈해를 속이려고 하여도 하늘이 말렸다는 의미입니다

 

 


6. 여신의 서악과 남신의 동악

 

서라벌의 동쪽에 있는 토함산을 동악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선도산을 서악이라고 합니다 서악에는 서술성모라는 여신을 모시고  동악에는 탈해라는 남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7. 공양 이라는 말의 어원은 ?

 

= 양을 바치면 인간이 이롭다 (羊 = 人 = 良)

양(養) 자를 파지해 보면 양(羊)을 바치면 인간(人)이 이롭다(良) 는 뜻이 됩니다

네발달린 짐승 중에서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짐승은 양 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양을 신에게 희생물로 바치는 것이 공양이라고 합니다

 


8. 대성이 보시를 했으나 만 배 득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삼국유사에 대성이 보시를 했는데도 만배의 이득을 보지도 못하고 보시를 한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보시를 하면 전생에서만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니고 후새에서도 이득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리는 교육적인 설화입니다

 

  

9. 석굴암에서 사라져버린 5층소탑

 

석굴암의 본존불 뒤 11면관음상 앞에 자그마하고 우수한 오층석탑이 있었는데 언젠가 사라져 지금은 볼 수가 없고 쓸쓸히 대석만 놓여져 있을 뿐이다.


1909년 강점기 때 2대 통감이 된 소네가 수행원을 거느리고 경주 석굴암을 다녀갔는데 그들이 돌아간 후 석굴암 안에 있던 오층소탑이 온데 간데 없이 증발했다.


1976년의 '석굴암 수리공사 보고서' 에도 오층소탑은 "소네에 의해 약탈되었다" 고 명기하고 있다.  석탑을 약탈당한 후 석굴암은 탑상을 구비하였던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불상들만 있는 석굴이 되고 말았다.

 


10.  경덕왕은 어떤 인물인가?

 

☸ 경덕왕은 신라 35대(742∼765)왕으로 이름은 헌영이며, 34대 효성왕의 친동생으로 효성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를 승계하였으며 아버지는 33대 성덕왕입니다.


☸ 경덕왕 재위 10년(751)에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불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 경덕왕은 아버지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종을 만들기 시작하여 아들 혜공왕이 완성하였습니다. (*성덕대왕신종 국보 제 29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화랑 기파랑을 찬미한 노래)

~헤치고 나타난 달이, 흰구름 쫓아 떠가는 것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기파랑의 모습 잠겼어라.


목매여 기원하노니 흰구름 헤치며 휘영청 나타난 달 기파랑을 우러러 본다

달빛아래 떠 가는 흰구름 속에서도 달빛어린 파아란 시냇물 속에서도

기랑의 얼굴 보는 듯 하구나

일오의 시냇가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셨던 마음 속 깊은 뜻을 쫓으리라 

아아 기랑의 높은 뜻 잣나무 가지만큼 높아 눈도 덮지 못할 우뚝한 그 마음이여

 

 


☸ 충담사 안민가

 

( 3 . 3  귀정문. 스님. 충담.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 공양.  찬기파랑가, 

          안민가 : 백성을 편히 살 수 있도록 다스리는 노래)


~임금은 아버지라,  신하는 사랑스런 어머니라.

백성을 어리석은 아이라고 여기시니 백성이 그 은혜를 알리.

임금같이 신하답게 백성같이 할지면, 나라는 태평하리이다~

우리 백성들은 임금님을 아버지라 여기며

 그 신하들은 우리를 사랑하실 어머니라 여깁니다

우리 백성들은 어리석은 아이이오나

임금과 그 신하들의 사랑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비록 구물대며 살고 있는 중생이지만

우리를 먹여 다스리기만 한다면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겟습니까?

 

이렇게 하여야만 나라가 보전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아 아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생활한다면

나라가 태평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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