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국사를 찾아서

[스크랩] 석굴암에 대한 옛 신문기사 모음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09. 9. 30.

<석굴암에 대한 옛 신문기사 모음>

 

조선'석굴암 마애비’발견…“일제 비문훼손”  

 

 

석굴암이 창건 이래 우리민족의 손에 의해 수호돼 온 사실을 일본이 고의로 왜곡했음을 뒷받침하는 조선시대 마애비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위덕대 박물관 학술조사단(단장 金武生)은 석굴암 남쪽 진입로 바위 틈에 숨겨져 있던 조선시대 마애비(가로 45㎝, 세로 95㎝)를 발견했다고 2일 밝혔다. 조사단은 마애비가 만들어진 바위면에서 명문을 쪼아 낸 흔적 10개를 찾아내 일본이 역사왜곡을 위해 마애비에 새겨진 명문의 상당 부분을 고의로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조사단은 “석굴암과 관련된 유일한 금석문인 마애비는 당초 4행 40자인 것으로 추정되나 연호와 본문이 철저히 지워진 상태이며, ‘제세당(濟世堂)··현산석굴암(峴山石窟庵)··대소(大小)··기(基)·영세(永世)·모비(慕碑)’ 등의 글자만 희미하게 보인다”고 밝혔다.

이 글은 ‘제세당이라는 스님이 석굴암의 특정 부위를 중수했다’는 뜻으로 해석되며 이는 석굴암이 신라 경덕왕때 창건된 이래 우리민족에 의해 면면히 수호돼 온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조사단은 설명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런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해 바위 명문을 쪼아낸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김무생 단장은 “석굴암 진입로 공사가 일본에 의해 이뤄졌고 당시 일본인 인부만 고용한 점 등으로 미뤄볼 때 일제가 비문을 지운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경향신문/경주/백승목기자  2001.11.3>

 

 

 

석굴암 부근 바위서 일제 훼손 명문 발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주 석굴암 부근 바위에서 일제(日帝)가 훼손한 것으로 추정되는 명문(銘文)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위덕대 박물관 학술조사단은 "지난 10월 한달간 경주 토함산 일대 유적을 답사하던 중 석굴암 남쪽 진입로의 바위에서 조선시대 유행했던 가로 45㎝ 세로 95㎝의마애비(磨崖碑)와 높이 6-8m 크기인 바위 2개에서 누군가 고의로 명문을 훼손한 흔적 10여개 부분을 확인했다"고 2일 밝혔다.

학술조사단이 석굴암 남쪽 100m 지점의 바위에서 찾아 낸 마애비는 비문이 심하게 훼손돼 <’濟世堂’ ’峴山石窟庵(?)’ ’大小..基..永世..慕碑’> 등의 글자만 판독됐는데, 이 내용은 제세당이란 스님이 석굴암의 어느 부분을 중수한 것으로 관계자들은 풀이했다. 특히 이 마애비는 현재까지 석굴암과 관련된 유일한 금석문으로 알려졌다.

김무생 조사단장은 "마애비에는 원래 4행 40자 정도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연호부분과 본문이 철저히 지워졌다"며 "1907년까지 승려가 있고 석탄일엔 수천명의신도가 운집했던 석굴암을 일제가 총독부 정치의 우월함을 선전하려 바위의 명문을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사단은 명문이 훼손된 곳은 이미 마멸될 만큼 오랜 세월이 흘렀고 글자 부분전체를 정밀하게 없앴으며 자국마저 찾기 힘들게 손질한 점, 1913-1915년 사이 석굴암 복원공사 때 일본인이 467m의 진입로 공사를 한 점 등으로 미뤄 조선총독부가 기록인멸행위를 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이번 마애비 발견과 조사를 통해 토함산이 한때 현산(峴山)으로 불렸으며, 현재 진입로가 옛날 참배로와 일치하는 것을밝혀 냈고 아울러 일제 총독부가 석굴암의 역사 인멸을 한 증거자료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한편 일제는 석굴암 복원공사 당시 본존불과 11면 관세음보살 중간에 있던 5층대리석보탑과 감실안의 보살상 2구를 훔쳐갔고 석굴공사에는 천장돌에 ’日本’이란글자를 새겨넣는 만행을 저지른바 있다. (사진 있음)


***************************〈연합뉴스 2001.11.3〉

 

 

 

석굴암 감실속 유물 추정 73점 공개  

지난 4년동안 경주 불국사 석굴암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던 배근택(裵根澤·40·경남 함양군 서상면 중남리)씨가 15일 석굴암 감실(龕室)에 있었던 것이라며 유물 73점을 공개, 학계의 검증을 요구해 관심을 끌고 있다.

배씨가 석굴암 유물이라며 공개한 것은 불족(佛足)판 대1점과 소1점을 비롯해 반야심경이 들어있는 경통 3점, 천수경(千手經) 4점, 금강경(金綱經) 1점, 사리함 1층형 1점, 여래상, 반가상, 판불수인 등 모두 73점이다.

특히 석가가 걸어 온 행적이 담긴 불적과 갖가지 손의 모양이 그려진 판불수인, 천수경, 반야심경 등은 국내서는 처음으로 공개되는 유물로 어느 박물관에도 소장돼있지 않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배씨는 이 유물들이 석굴암 유물임을 주장하는 증거로 천수경 금·은장본과 반야심경이 들어 있는 경통을 석굴암내 본존불 앞뒤로 있었던 탑대석에 나 있는 홈에 들어맞는 형태여서 실제로 맞춰 보니 정확히 맞았다고 주장했다.

배씨는 공개한 금동재질의 불상들이 석굴암의 구조상 윗부분에 있는 감실에 각각 들어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감실에 불상이 있었다는 학설은 없어 이 부분에 대한 학계의 연구와 공개된 유물의 진위 판단작업이 필요하다.

이밖에 배씨는 우리나라 불교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유교와 도교가 합해진 삼신신앙이 전통불교이며 이는 동서남북, 중앙을 의미하는 오방불(五方佛)신앙으로 연결되고 이 내용을 토대로 석굴암이 조성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배씨는 지난 96년 우연한 기회에 천수경을 입수한 뒤 지난 4년동안 석굴암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사재를 털어 전국을 돌면서 유물들을 모았다고 할 뿐 정확한 입수경위는 밝히지 않고 있다.

배씨는 『올들어 문화재관리국 등에 석굴암 유물로 추정돼 진위 여부를 판명하고 진품으로 밝혀지면 국가에 기증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아직까지 제대로 답변을 듣지 못했다』면서 『석굴암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관심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문화재 관련 학자들은 『배씨가 국가에 기증하려면 해당 지자체에 신고한뒤 심의위원회에서 진위 여부를 가리고 학술발표를 여는 등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함양/연합  2001.10.1〉

 

 

'석굴암'..불교예술 '조화.균형' 극치  

경주 토함산 중턱에 위치한 석굴암은 우리나라 불교예술의 백미로 꼽힌다.
석굴암은 경덕왕(재위:742~765년)이 세상을 떠난 역대 김씨왕 선조들의 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석불사를 김대성에게 창건토록 한 것이 기원이다.
석불사는 후에 석굴암으로 개칭됐으며 약 751년에 창건됐다.

석굴암은 당시 신라 오악중 하나인 동악(토암산)에서 동해구를 바라보는 동남
방향에 위치해있다.
동해구 앞바다에는 신라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의 해중능 대왕암이 있으며 경덕왕의 친형인 효성왕(737~741년)도 화장돼 이곳에 산골되었다.

석굴암 본존불의 시선은 바로 이 동해구를 향하고 있다.

69년 남천우 박사는 석굴암이 바라보는 방향은 대왕암이 있는 동해구 근처의 동짓날 해뜨는 방향인 동남 30도임을 증명한 바 있다.

1932년 일본의 요네다 미요지는 최초로 석굴암을 정밀측량했다.
그 결과 석굴암의 조형은 12자를 기본으로 하면서 정사각형과 그 대각선 길이의 응용,정삼각형 높이의 응용,원에 내접하는 육각형과 팔각형 등의 비례구성으로이루어졌음을 밝혀냈다.
이는 신라인들이 원주율(파이)의 값인 3.141592...보다도 훨씬 더 정확하게 알
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요네다가 당시 작성한 본존불의 측량도면을 보면 석굴암은 12당척(1당척은 29.7cm)을 기본으로 정사각형과 그 대각선의 연속으로 설계되었다.
입면의 경우 주실 반구형도 12자를 반지름으로했다.
본존불의 좌대 밑에서부터 본존불 머리끝까지의 길이가 12 자의 배수로 되어있
고 본존불 위 반구형의 반지름도 12자이다.
석굴 평면 역시 반지름이 12자인 원이다.

이같은 현상은 석굴암 곳곳에 무수히 적용된다.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이 1:1.618의 비례로 설계되어있는 반면에 석굴암
설계는 1:1.414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 최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조화의 비례로 많은 자연현상과
예술에서 찾아볼수있다.

영남대 김익수 교수가 1980년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김교수가 측정한 본존불뒤
에 있는 공배도 우리가 알고 있듯이 정확한 원이 아니라 좌우 224.3cm 그리고
상하 228.2cm로 타원이다.
이는 참배자가 서서 공배를 보았을 때 원으로 보이도록 설계한 것이다.
신라인들의 과학기술에 거듭 놀랄 수 밖에 없다.


*****************<경향신문 2001/10.24 /엄영일 <포항공대 기계공학과 교수>

 

 

'석굴암 불상에도 색을 칠했다?’  
KBS 역사스페셜, 석불 채색 흔적으로 고대불교 조명

석굴암 불상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불상이다.

그러나 그 석불에 색이 입혀져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99년에야 군위 삼존불이 채색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질 정도니 보통 사람들이 석불에도 채색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지도 모른다.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지난 99년 10월 16일에 석굴암 불상에도 색을 칠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흙이나 나무로 만든 불상에 색을 칠했다는 사실과 색을 칠한 마애불의 예를 들면서 석불인 석굴암 불상에도 색을 칠한 것이 아닌지를 알아보는 작업을 보여준다.

프로그램에서는 석굴암 이외에 석불에 색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을 알아보고 남아있는 색 흔적이 자연적인 변화 때문인지 채색의 흔적인지를 알아보는 작업을 보여준다.

그리고 석불에 어떤 방법으로 채색을 했는지, 왜 선인들이 석불에 채색을 했는지도 설명한다. 부처님 모습에 대한 기록과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석굴암 본존불이 처음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채색된 석불의 모습을 통해 고대 불교 문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당연하게 받아들인 불교 문화재들이 새로워 보이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법보신문/공선림기자 2001.10.24>

 

 

 

불국사와 석굴암의 암석 분석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인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은 석조 건축물이다. 이 석조 건축물을 세우는 데 쓰인 암석은 어떤 것일까? 암석들은 어디서 가져왔을까?

많은 역사학자들은 석굴암 석재는 토함산, 불국사 석재는 토함산이나 경주 부근에서 채취됐다는 추정을 해왔다. 과연 그런가. 지질학자에게는 추정은 증명 안된 가정일 뿐이다.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석가탑이나 석굴암 바위를 긁어내어 성분 분석을 할 수는 없다. 석굴암 내부는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어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경상대학교 지구환경과학과 좌용주 교수는 전암 대자율(whole-rock magnetic susceptibility rate) 측정이라는 과학적 도구를 적용했다. 그는 이 측정도구를 사용해 사학자들의 가설이 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전암 대자율은 바위 등에 자기장을 쐬면 암석에 포함된 자성을 띤 물질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 이 값을 이용해 석재의 유사성과 차이를 알아내는 것이다.

일단 경주 부근의 석재들에 대해 조사한 결과 크게 세 종류의 화강암이 존재했다. 토함산 화강섬록암, 흑운모 화강암, 남산 화강암이 그 셋이다. 토함산 화강암은 대자율 값이 7.0~25.0, 흑운모 화강암은 0.25 이하 또는 1.0~4.0, 남산 화강암은 0.25~6.0의 범위를 가졌다.

측정 결과 석굴암 석재의 대부분은 토함산 화강섬록암과 대자율 값이 거의 일치했다. 석굴암 내부는 접근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1913년과 1962년 두 차례 석굴암 보수 때 교체된 석물들이 외부에 전시돼 있었다. 좌 교수는 “석굴암에 쓰인 석재 대다수는 인근 토함산에서 가져왔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 석가탑, 다보탑, 대웅전 석조 기단과 석등은 대부분 남산 화강암으로 건조한 것으로 분석됐다. 다리와 탑들의 석단 등 일부는 토함산 화강섬록암이 쓰였다.

여기에 일부 사학자는 이의를 단다. 경주 남산은 신라 당시 성지로 남산의 돌이 외부로 반출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석 결과 불국사와 건축 연대가 비슷한 경주 북쪽의 나원리 5층 석탑도 남산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좌 교수는 “당시 재상인 김대성의 권력은 왕에 버금갔을 것”이라며 “그가 남산의 돌을 사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한겨레신문 2000.10.30. 이근영기자)

 

 

 

석굴암 전실 수호상은 6개였다  

일제시대 저서에서 석굴암 전실사진 공개   

석굴암 본존불

석굴암 실물 크기의 모형을 만들겠다는 계획에 대해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 가운데 석굴암 전실이 현재와 같은 구조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진이 발견돼 논란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최근 52억원을 들여 석굴암을 보존하기 위해 석굴암 부근에 모형을 제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929년 일본인 미술사가인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가 지은 ‘조선 경주의 미술(朝鮮慶州之美術)’에 수록된 사진은 석굴암 전실에 있는 8부중상(八部衆像·불법을 수호하는 불교 신들의 조각상)이 지금과 같은 8개가 아니라 6개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8부중상이 전실 좌우로 4개씩 세워져있는 것과 달리 이 사진엔 좌우로 3개씩만 있다. 세번째 조각상 옆엔 돌을 직각으로 쌓아놓아 네번째 조각상 2구는 없었다는 것이 명확하다. 사료수집가 이순우씨가 최근 확인한 것.



1910년경 석굴암 전실 좌우벽 세번째 조각상



그동안의 석굴암 사진은 전실 외부에서 찍은 것이어서 네 번째 조각상의 존재 여부가 불명확했다. 그러나 이번 사진은 전실 내부에서 찍은 것이어서 구조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책이 1929년 출간됐지만 사진은 일제가 1913년 석굴암을 보수하기 전의 모습을 담고 있어 1910년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카무라는 특히 이 책에서 ‘4번째 조각상 2개는 1913년 보수공사시 조선총독부가 부가했다…이는 추악의 극이며 실로 대담함 추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도 1910년대에 이미 ‘문제의 두 상은 석굴의 부근에서 발굴한 것으로, 무슨 근거로 추가를 감행했는지 궁금하다’고 지적한 바 있으나 국내 전문가들은 이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현재의 8부중상 모습



1913년 조선총독부는 석굴암을 보수하면서 문제의 불상 두 개를 전실 입구쪽 좌우의 세 번째 불상 옆에 직각으로 꺾어 연결해 붙였다.

1964년 보수공사 때 이것이 잘못됐다고 보고 구부러진 부분을 직선으로 펼쳐놓았고 이후 어느 것이 맞는지를 놓고 논란이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양측의 견해 모두 8개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 사진을 살펴본 문명대 동국대 교수(불교미술사)는 “꺾였는지 직선인지는 여전히 의문사항이지만 일단 1913년 보수 직전 6개였을 가능성이 짙다”고 말했다.

 

 

 

*********************<동아일보/이광표 기자 2002.2.28>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