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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를 찾아서

석탈해왕 탄강유허비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0. 9. 28.

석탈해왕 탄강유허비를 찾아서

 

나아 해변에 있는

이 유허는 신라 탈해왕이

탄생하신 곳으로 삼국사기에는

진한 아진포구라고 하였으며 삼국유사

에는 계림동 하서지촌 아진포라 하였다고 합

니다 석씨 시조 탄생설화는 남해왕 때에 아진

포에 한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바닷가에서 까치

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우짓고 있어서   가까이

보니 배 한척이 있고 배 안에는 큰 궤짝이

 하나 있었다고 하는데 궤짝을 열어보니 한 

 사내 아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사내 아  

이가 석씨의 시조가되었다는 설화가 

 있는 곳 입니다.석탈해왕 탄강    

 

 

 

 

 

왜국에서 동북으로 천여리 떨어진 다파나국의 왕비가 

아기를 가진지 7년 만에 큰 알을 하나 낳았는데 -----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왕이 궤 속에

이 알과 칠보를 넣어 바다에 뛰워 보내면서

 인연이 닿는 곳에 도착하여 ---------- 

 

 

 

 

살기 좋은 평화로운 나라를 세우라고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다에서는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그 궤가 신라 땅에 와 닿자

 

 

아진의선 이라는 노파가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와 키우게 됩니다

 

 

 

 

 아이를 7일 동안 보살펴 주자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기를 ---------------------

 

 

 

 

나는 본디 용성국 사람으로 그 나라의

왕비에게서 알로 태어났으므로

 

 버림을 받아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였답니다

 

 

 

 

그 아이는 말을 마치자 지팡이를 들고 두 사람의

 종과 더불어 토함산에 올라가

 

 

토함산 정상에 돌 무덤을 파고 7일 동안

 머물렀다고 하는데-----

 

 

 

 

그 뒤에 토함산에서 내려와 성 안을 살펴 살 만한 곳을

물색하 던 중 호공의 집에 다달았다고 합니다

 

 

 

 

그는 호공의 집 곁에 남 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서

이튼날 아침에 관가에 가서

 

 

그 집은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었는데 ---------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호공이 들어와

그 집을 차지한 것이라고 송사를

제기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숫돌과 숯을 증거물로 제시하여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소문이 나자 남해왕은 이사람은 보통 인물이 아닌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맏 공주와

 배필이되게 하였다고 합니다

 

 

 

 

다른 비각에서는 볼 수 없는 고기 모양을 한 나무

조각들이 네귀퉁이를 받쳐들고 있습니다

 

 

 

 

탈해 이사금은 62세에 왕위에 오랐으며

성은 석이고 왕비는 아효부인

이라고 합니다

 

 

 

 

석씨가 된 사연은?

 

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 없으나 처음 상자가

 이 곳에 도착 하였을 때

 

 

 까치가 우짓었다고 해서 까치작(鵲)자를 줄여

 석(昔)으로 성을 삼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석씨가 되었다고 합니다

 

 

 

 

탈해라는 이름은?

 

이 아이가 상자를 풀고 나왔으니 벗을 탈(脫)자와

 풀해(解)자를 써서 탈해로 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석탈해 라고 하였답니다 

 

 

 

 

 사방에 있는 고기들의 색깔이 모두

다르게 칠해져 있습니다

 

 

 

 

석탈해왕 탄강유허비가 있는 비각의 천정에는

사군자 처럼 국화도 그려져 있습니다

 

 

 

 

목단인가 봅니다 화려하게 채색이

 되어 있습니다

 

 

 

 

국화꽃인 것 같습니다만 수묵의

 농도가 선명합니다

 

 

 

 

사군자 라는 생각은 이 대나무에서도

느껴 볼 수 있습니다

 

 

 

 

 유허비의 높이는 130cm정도의 크기입니다

폭은 45cm 두깨가 25cm로 비수와

 좌대는 없습니다

 

 

 

 

조선 현종 11년(1845)에 이종상이라는

사람이 비문을 지었으며

 

 

상량문은 1845년에 한문건이

 썼다고  합니다

 

 

 

 

비각기는 1847년 이시우가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고기들이 모두 밖으로 향하여 나올려고

 하는 모습 입니다

 

 

 

 

 신라석탈해왕탄강유허비(新羅昔脫解王誕降遺墟碑)가

있다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가까이에 두고서도 처음

 가 보는 곳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공부하면서 꼭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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