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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를 찾아서

[스크랩] 10월 정기답사 중편 (황남대총특별전)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0. 10. 22.

時間으로의 여행, 신라문화동인회 10월 답사기(중편)

고려불화대전 전시관을 나와 황남대총이 열리는 옆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 중간 마주치는 동인회 회원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전시장을 찾아 긴 복도를 걷고 있는데, 경천사지 13층 석탑이 바쁜 발걸음을 붙잡는다. 경주에서 흔히 보던 석탑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렇다고 정혜사지 13층 석탑을 처음 보았을때의 느낌과도 달랐다. 뭐랄까? 아름답고 세련된 자태에 종교적 장엄함까지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였다.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 30분 집합 시간이 2시이니 넉넉잡고 1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서둘러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며 전시관을 찾았지만 전시관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건지? 갈길 바쁜 나그네를 붙잡고 숨박꼭질하자는 것도 아니고... 안내데스크에서 물어 물어 드디어 전시장 앞에 설 수 있었다.


PS : 유물설명은 전시장에 비치된 안내문과 도록을 참조하였고, 국보, 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문화재청 자료를 참조했습니다. 문화재청 자료와 이번 전시회에 나온 도록의 자료가 약간 상이할 수 있으니, 미리 유념을 하세요 ^^


황남대총 98호분



경주에 사는 사람에겐 친숙한 이름이다.
사랑스런 여인의 가슴처럼, 자상한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생긴 자태.
죽은자의 안식처로, 권력의 상징으로, 목동의 휴식처로 그리고 이제 다시 천년 신라의 상징으로, 자랑스런 경주의 문화유산으로 돌아온 황남대총.



 36년전 처음으로 그 신비한 베일을 드러냈던 황남대총이 오늘 다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이는 날이다. 발굴 당시 약 58,000 여점의 화려한 유물로 우리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발굴된 유물의 극히 일부만이 경주박물관 등 전시실 몇 곳에 전시되어왔을 뿐이다. 한국의 투탕카멘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황남대총.
발굴 당시 나온 유물 중 엄선된 1,268점의 유물이 새롭게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 찬란한 황금의 나라 신라로 워커와 함께 가보실까요?




전시실 앞 로비가 경주박물관 상설전시장 크기만 하다. ㅎㅎ















경주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굽다리 접시들입니다.
연대순은 우측(월성로 가-13호)부터 고식이고 연대가 지나면 좌측(천마총)으로..




굽다리 뚜껑단지, 굽다리 장경호 (장경호 : 목이 긴 항아리) 등...
좌측 아래 두번째 녀석은 뚜껑이 아니라 등잔형 접시입니다.




토기반과 뚜껑굽다리접시 (북분 출토)

오손 도손 모여 있는 모습으로 한 형제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남분에서 순장된 젊은 여자의 유골이 나와 21대 소지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한 학자도 있었다던데, 여자가 벽화부인이 맞다고 우기면서...ㅋㅋ



청동초두 (북분) 초두는 자루솥은 말합니다.



청동솥 (남분)



보물 630호 금제관꾸미게 (남분)

 이 관식은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서 발견되었으며, 높이 45㎝, 날개 끝 너비 59㎝의 크기이다. 3매의 금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운데 금판은 위에 3개의 돌출된 부분이 있어서 전체가 山자 모양을 하고 있다. 아랫부분은 차츰 좁아져서 V자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이 가운데 금판 좌우에 새 날개 모양의 금판을 작은 못으로 연결하였다. 
 전면에 작은 원형 장식을 달았으나 가운데 금판 밑의 관(冠)에 꽂게 된 부분에는 장식이 없다. 관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점을 찍어 처리하였다. 가운데 금판은 세로 중심선에서 안으로 약간 접은 상태여서, 밑의 뾰족한 부분을 무엇인가에 꽂았으리라 생각되지만, 평소에 썼던 관의 일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금동제모관과 관꾸미게 (남분. 복원품)

앞에서 보니 꼭 다트 던지기에 다트처럼..동인회카페에도 다트던지기 게임이 있던데.ㅎㅎ



금동제 신발 (남분. 복원품)



신발이 이뻐서 복원품이지만 사진 한 장 추가요 ~~~









은합 (남분)



금사발 (남분)

합이 뭐냐고요? 뚜껑이 있으면 합, 없으면 사발입니다.



금제 굽다리접시 (북분)



은제 굽다리접시 (북분)

굽다리란 뭘까요? 보시는 바와 같이 굽이 있는 것을 굽다리라 합니다.



보물 626호 금제 굽다리 접시 (북분)

 높이 10㎝, 주둥이 지름 10㎝, 무게 169g의 금제 굽다리 접시는 북쪽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토기 굽다리 접시의 형식을 따라 반구형 몸통 밑에 나팔형 굽다리를 붙인 전형적인 양식이지만, 장식이 가해지고, 금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실용품이라기 보다는 껴묻거리(부장품)로 제작된 듯하다.
 아가리 부분은 밖으로 말아 붙였고, 나뭇잎 모양 장식 7개를 2개의 구멍을 통하여 금실로 꿰어 달았다. 굽다리는 작은 편으로 상·하 2단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 사각형 모양의 창을 어긋나게 뚫어서 장식하는 신라 굽다리 접시의 형식을 하고 있다.
 찌그러진 부분이 많으나 발견된 경우가 드문 금제 굽다리 접시이다.





음.. 아무리 부귀영화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다 죽어 거대한 무덤을 조성한다고 하더라도 필요한 공간은 저 널(관)처럼 딱 한 평이면 족하네요..







좌측 길다란 삼형제는 남분에서 나온 고리자루큰칼입니다. 일명 환두대도라 부릅니다.



오른쪽 상당의 것은 북분에서 나온 철제집게입니다. 대장간 용구를 단야구라 불렀는데,
단야구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죠. 어디냐고요? 어디긴 어디야 SF 사극 "김수로"에서지..



투겁창 (남분)

왼쪽 삼지창처럼 생긴 것을 미늘쇠창이라 부르는데, 미늘은 낚시 바늘끝에 달인 날까롭게 휘어진 부분을 말합니다. 물고기가 빠지지않도록 만든 것인데, 청동기 시대의 화살촉에도 나타납니다. 보통 미늘이 없으면 사냥용, 있으면 전쟁용으로 보심이..창 말도 화살촉 야그



청동합과 은합 (남분)

뚜껑에 '十' 모양 손잡이를 단 금속으로 만든 합은 고구려에서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 집안 칠성산 96호 무덤 출토품이다.
신라에서는 황남대총 남분, 서봉총, 천마총, 은령총, 경산 조양동 81-2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은제와 청동제가 있는데, 황남대총 남분과 서봉총 출토품은 은으로 만들었다.



'호우'명 청동합 (415년) 황남대총 출토품은 아니고 노서동 고분군내 호추총 출토품임





금제 나무가지모양장식과 고구려식 금귀걸이 (북문)



은제용문투조방형판

간략하게 도식화된 이른바 용무늬는 입 또는 부리와 규칙적으로 배치한 발의 유무에 따라 미세하게 차이를 보인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용무늬라는 것이 용과 봉황으로 구별될 수 있음을 뜻한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확인되는 용과 봉황무늬는 사실성에서 벗어나 있다. 즉 형태를 간략하게 표현한 도식화된 도안이며, 세부묘사를 거의 하지않는 것이 특징이다.



위쪽이 금제용문투조방형판. 아래가 은제용문투조방형판 (남분)와 장식들



금동제 말꾸미게와 백화수피제고깔과 관장식 (남분)



허리띠꾸미게와 화살집꾸미게(좌측), 허리띠꾸미게 그리고 화살촉 (남분)



허리띠꾸미게와 화살집꾸미게

화살통은 허리띠에서 두 가닥으로 늘어뜨린 띠에 화살촉꽂이를 매단 구조이다. 화살촉꽂이는 남아있는 금속장식으로 볼때 흡사 뚜껑이 없고 밑이 좁은 작은 가방처럼 생긴 것과 반원통형이 있다. 화살촉꽂이는 표면에 '山'자 모양의 금속장식을 대어 꾸몄고, 띠에는 띠고리를 달고 가운데가 경첩처럼 움직이는 금속장식을 덧대었으며, 옆 판의 맨 위에는 찌그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ㄷ'자 모양의 금속판을 대었다. '山'자 장식위에는 부릅뜬 눈알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화살통은 허리띠에 매달아 엉덩이 쪽에 있도록 착용하였다.




청동솥, 청동초두 (남분) 그리고 청동다리미 (좌측은 남분, 중앙, 우측은 북분)



청동솥 (좌. 남분, 우. 북분) 청동쟁반 (좌. 북분, 우. 남분)







채화 방추차 (북분) 그리고 돌절구 (남분), 자갈돌 (남분) 그리고 운모조각 (북분)







경주박물관에 보던 소녀인데...가출했나 보군요..설로..날라리 소녀



재첩 등의 조가비 껍데기(윗쪽)와 닭뼈, 새뼈, 물고기뼈 그리고 거북이뼈(우측)





위쪽은 금동제 판(북분) 아래쪽은 은제 바구니 구연부장식 (남분)

은제 바구니 구연부장식

황남대총 남분의 주곽과 부곽위에 둔 굽다리접시는 굽을 부러뜨렸고, 봉분 꼭대기에 묻은 제의물품 바구니에는 비틀어 뜯어낸 말띠 꾸미게가 담겨있었다. 이밖에도 여려 물품에서 회손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런 행위를 훼기毁器라 하는데, 이는 이승과 저승을 끊어버리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훼기된 금동제 말띠 꾸미게와 금동제말띠드리게 (남분)



회기된 금동제 투조판 (북분)





뚜껑굽다리접시와 물고기뼈 (위쪽. 남분), 새뼈 (아래쪽. 남분) 그리고 청동시루 (남분)

청동시루

마립간 시대에 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그릇과 청동도구 가운데 세발솥, 항아리, 합, 자루솥, 다리미는 여러 무덤에서 나왔지만 시루와 세발쟁반은 황남대총에서만 나왔다.
거의 대부분 신라 왕경 무덤에서 출토됨으로 귀금속 장신구와 마찬가지로 위세품일 가능성이 높다.



토제 시루(남분)과 토제 뚜껑(북분)



갈유소옹(위쪽. 남분)과 토제 합(남분, 북분)



황남대총 정상부에서 무덤을 축조할 당시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질그릇이 발굴되었다.
1m 깊이의 구덩이이 묻힌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표면에서 50cm 깊이를 넘지 않게 얕게 묻혔다. 황남대총 봉분에 묻힌 이 질그릇들은 묻힌 상태와 크기로 볼때 뼈단지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형태와 무늬로 보아 이 질그릇들은 삼국시대 말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로 편년된다.







보물 627호 은잔 (북분) 그리고 쇠거울 (북분), 청동거울 (남분)

쇠거울

황남대총 북분에서 발견된 거울은 특이하게도 철로 만들어져 있다. 쇠거울은 원형이며 가운데 반원형의 고리가 있다. 가장자리에는 음각으로 동심원을 세겼고 그 안쪽에 연호문이 일부 확인된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쇠거울과 청동거울은 왕과 왕비를 빛으로 인도하기위해 무덤에 부장된 귀중한 물건이었다.

청동거울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청동거울은 조문박국경이라 부른다. 새 무늬와 박국이라는 장기처럼 생긴 놀이판에서 이름을 땄다. 박국무늬사이에 배치된 여덟마리의 새는 바람의 신을 의미하며 그 가장자리에 글귀가 적혀있다. 깨어지고 일부가 없어져 전체의 내용은 알 수 가 없지만, "王公大貴富(昌)XXX宜(宣)官X" 이라 읽힌다. 의미는 王, 公, 貴, 富 등 좋은 글을 써놓은 것으로 보아 길상구(吉祥句)라고 생각된다.




보물 627호 은잔

 이 은제잔은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 발견된 신라 잔 모양의 그릇으로 높이 3.5㎝, 아가리 지름 7㎝의 크기이다. 밑이 평평한 잔으로 표면의 장식 무늬가 매우 특이하다. 아가리에 좁은 띠를 두른 뒤, 연꽃을 겹으로 촘촘하게 돌려 무늬를 장식하고, 그 밑으로는 쌍선으로 거북등 무늬를 연속시켰다. 거북등 안에는 각종 상상속의 동물 형상을 새겼다.
 바닥 안 쪽 중앙에도 꽃무늬 안에 봉황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무늬의 표현 형식과 동물의 형상은 경주 식리총에서 출토된 장식용 신발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무늬 자체는 중국 한나라 시대의 구리 거울과 연관이 있으나, 그 분명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북분에서 나온 흑갈유반구병(위쪽)과 유리그릇 (남분)

흑갈유반구병

황남대총 북분에서 중국자기인 흑갈유반구병이 나왔다.
고리가 어깨에 세로로 달렸고, 목이 그리 길지 않으며, 나팔모양으로 입이 벌어졌으나 턱이 얇다. 반구병을 비롯하여 반구호와 계수호 등 중국자기와 비교해 볼때 동진 초기인 4세기 전반인 것을 알 수 있다. 사진를 중국 절강성 덕청요로 본 견해가 있다.

유리그릇

유리그릇 중에서는 짙은 남청색을 띠는 것이 있다. 이러한 유리 그릇은 대체로 단순한 형태이며 굵은 띠로 굽을 붙인 것과 민바닥인 것이 있다. 이는 대롱불기 기법으로 만들었으나, 서아시아와 유럽에서 비슷한 형태와 색상을 확인할 수 없다. 중국대륙에서 대롱불기 기법의 유리그릇은 북위 태무제(408~452) 때에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유리그릇은 형태와 색상에서 마립간 시기 신라 부덤에서 출토된 짙은 남청색의 유리그릇과 매우 닮았다.





위쪽 유리제품 4개 모두가 국보 193호 유리제병 및 배



국보 193호 봉수형유리병 (남분)



국보 193호 유리제잔(남분)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병 1점과 잔 3점의 유리제품이다.

 병은 높이 25㎝, 배지름 9.5㎝이고, 잔① 높이 12.5㎝, 아가리 지름 10㎝ 잔② 높이 8㎝, 아가리 지름 10.5㎝ 잔③ 높이 10.5㎝, 아가리 지름 9.5㎝의 크기를 하고 있다.

 병은 연녹색을 띤 얇은 유리제품으로 타원형의 계란 모양이다. 물을 따르기 편하게 끝을 새 주둥이 모양으로 좁게 오므렸다. 가느다란 목과 얇고 넓게 퍼진 나팔형 받침은 페르시아 계통의 용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목에는 10개의 가는 청색 줄이 있고, 아가리에는 약간 굵은 선을 돌렸고, 손잡이에는 굵은 청색 유리를 ㄱ자로 붙였다. 손잡이에는 금실이 감겨져 있었는데 이는 무덤에 넣기 전에 이미 손상되어 수리를 한 듯 보인다.

 잔①은 병과 같이 연녹색 유리를 사용했고, 위는 넓고 밑은 좁아진 컵 모양을 하고 있다. 아가리 주위는 속이 빈 관(管)모양으로 돌리고, 그 위에 청색 유리띠를 한 줄 둘렀다. 몸체의 윗쪽에는 청색 유리로 물결무늬를 두르고, 밑쪽에는 격자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잔②는 색은 연녹색이고 아가리가 넓다. 아가리 주위는 약간 도톰하게 돌기가 있으며, 밑면 가운데 부분이 약간 들어가 있다.

 잔③ 역시 연녹색이고 아가리가 넓은 원통형이다. 아가리 주위는 관(管) 모양이고 위와 아래에는 약간 청색을 띠고 있다.

 모두 파손이 심한 상태로 발굴되었으나 다행히 원형을 알아 볼 수 있게 복원되었다. 병과 잔①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출토되어 아마 세트를 이루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유리의 질과 그릇의 형태 색깔로 미루어 서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이며, 그 당시 서역과의 문화 교류를 알게 해 주는 자료가 된다.



보물 624호 황남대총 북분 목리문유리잔(우측)

 이 잔은 높이 7㎝, 아가리 지름 10.5㎝로 북쪽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아가리 부분은 수평이 되도록 넓게 바깥쪽으로 벌어졌고, 몸통 부분은 밥 그릇 모양으로 밑이 약간 넓어진다. 아랫부분에는 우뚝한 받침이 있는데, 짧은 목을 거쳐서 나팔형의 굽이 달렸다. 유리는 투명한 양질이고 갈색으로 전체에 걸쳐 나뭇결 무늬가 있다. 받침 바닥에 약간의 손상이 있는 외에는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었다.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여러가지 종류의 유리제 용기가 발견되었지만, 이러한 작품은 처음 보는 독특한 예이다. 잔의 모양이나 무늬로 보아 신라 제품이 아니고 서방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좌측에 있는 유리잔은 도록에는 남분에서 출토된 위의 3개의 유리잔들과 함께 국보 19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걸로 나오는데, 문화재청 자료에는 아닌 걸로 나옵니다. 어느게 맞는 건지...



보물 623호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팔찌는 지름 7.5㎝ 내외로, 북쪽 무덤 덧널(목곽) 안에서 몸에 착용한 채 오른쪽에 5개 왼쪽에 6개가 발견되었다. 좌·우 5개는 금막대기를 구부려서 만들어 장식이 없는 간단한 모양이다. 왼쪽 팔에 있던 1개는 길다란 금판을 동그랗게 말고, 그 위에 금판을 덧 대어 세공하여 남색과 청색의 옥으로 화사하게 꾸몄다.

황남대총 북분의 금제감옥 팔찌는 위아래에 테두리를 만든 기다란 뒷판에 터기석 등의 보석과 누금세공으로 꾸민 앞판을 끼워넣어 조립하는 기법을 썼다. 그런데 이러한 기법은 신라에 없다. 이러한 제작기법과 복하소재가 실크로드를 따라 넓게 확인됨으로, 이 팔찌는 중앙아시아 혹은 서아시아에서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상단 좌측이 야광조개국자 (고령 지산동 44호분. 복원품) 우측이 야광조개

금동제 야광조개국자

야광조개는 크고 광택이 아름다운 고둥으로 나전의 재료로 많이 쓰인다. 일본 열도에서 이 고둥의 껍데기는 구멍에서 똬리의 방향을 따라 길게 도려내어 국자로 만들었다. 야광패 국자는 대가야의 왕릉인 고령 지산동 44호 무덤과 신라의 황남대총 북분을 비롯하여 금관총, 천마총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신라의 것은 모두 국자의 가장자리에 특별히 금동제 테두리를 둘러 장식하였다.



이모가이 조개(우측)

이모가이 장식 금동제 말띠꾸미개

 이모가이라고 부르는 원뿔처럼 생긴 고둥의 구멍 주변은 편평하며 흡사 소용돌이처럼 둥굴게 말려 있다. 이는 일본 열도 큐슈지방의 남부와 더 남쪽바다에 사는 아열대 고둥이다. 특이한 형태 때문에 들여온듯 하며, 다듬어서 말띠꾸미개에 끼워 넣어 장식하는데에 사용하였다.







금목걸이 (북분)



황남대총 북분 '부인대'명 은제허리띠



'부인대'명 은제허리띠

허리띠꾸미게는 버클에 해당하는 띠고리, 허리띠 끝에 다는 띠끝꾸미개, 가죽 또는 비단 허리띠 겉면을 꾸몄던 띠꾸미개, 허리에 매달아 드리웠던 띠드리개로 구성된다. 북분에서 발굴된 은제허리띠꾸미개에는 '夫人帶'라는 글씨가 세겨져 있어, 이 무덤의 주인이 여성이었음을 알수 있다.
 



고구려식 금동신발 (북분. 복원품 포함)

북분의 금동제 신발은 배처럼 생긴 얕은 바닥판에 굵고 긴 스파이크를 박았다.
이러한 신발은 집안의 고구려 무덤에서 몇 개 발굴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집안의 고구려 신발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같다.






금귀걸이와 금드리개 (북분)



보물 623호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

 팔찌는 지름 7.5㎝ 내외로, 북쪽 무덤 덧널(목곽) 안에서 몸에 착용한 채 오른쪽에 5개 왼쪽에 6개가 발견되었다. 좌·우 5개는 금막대기를 구부려서 만들어 장식이 없는 간단한 모양이다. 왼쪽 팔에 있던 1개는 길다란 금판을 동그랗게 말고, 그 위에 금판을 덧 대어 세공하여 남색과 청색의 옥으로 화사하게 꾸몄다.

 반지의 지름 1.8㎝로 모두 19개가 널(관)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오른쪽에 5개 왼쪽에 6개는 손에 낀 채로 발견되었다. 두 가지 문양이 보이는데 하나는 가운데가 마름모꼴로 된 것이고, 다른것은 중앙에 격자문을 새겨 넣은 것으로, 그 당시의 장식품의 문양을 짐작할 수 있다. 

우측의 2개의 팔찌는 북분에서 나온 구술팔찌입니다.



금드리개 (북분)



금귀걸이(북분)



드디어 나왔네요. ㅋㅋㅋ 



국보 192호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의 북쪽 무덤에서 발견된 금 허리띠(과대)와 띠드리개(요패)이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2개의 봉분이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있다.

 과대는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인 허리띠로서 길이 120㎝, 띠드리개 길이 22.5∼77.5㎝이다. 28장의 판(板)으로 만들어진 이 허리띠는 주위에 있는 작은 구멍들로 미루어 가죽같은 것에 꿰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허리띠 아래에 매달려 있는 13개의 띠드리개는 경첩으로 허리띠와 연결하였다.

 이 허리띠와 띠드리개는 출토될 당시 상태가 아주 좋아서, 착용법과 띠드리개의 배치순서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보 191호 황남대총 북분 금관



국보 191호 황남대총 북분 금관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금관이다. 신라 금관을 대표하는 것으로 높이 27.5㎝, 아래로 늘어뜨린 드리개(수식) 길이는 13∼30.3㎝이다.

 이마에 닿는 머리띠 앞쪽에는 山자형을 연속해서 3단으로 쌓아올린 장식을 3곳에 두었고, 뒤쪽 양끝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2곳에 세웠다. 푸른 빛을 내는 굽은 옥을 山자형에는 16개, 사슴뿔 모양에는 9개, 머리띠 부분에 11개를 달았다. 또한 원형의 금장식을 균형있게 배치시켜 금관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는 좌·우 각각 3개씩 대칭으로 굵은 고리에 매달아 길게 늘어뜨렸다. 바깥의 것이 가장 길고, 안쪽으로 가면서 짧아진다. 장식 끝부분 안쪽에는 머리띠 부분과 같은 푸른색 굽은 옥을 달았고, 바깥쪽에는 나뭇잎 모양의 금판을 매달았다. 발견 당시 금관과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들이 분리되어 있었다.

 이 금관은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어느 것보다도 굽은 옥을 많이 달아 화려함이 돋보이고 있다.



요건 남분꺼입니다.



보물 629호 황남대총 남분 금제허리띠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허리띠(과대)와 띠드리개(요패)이다. 황남대총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다.

 허리띠 길이는 99㎝이며, 소형 띠드리개 길이 18∼22㎝, 대형 띠드리개 길이 79.5㎝의 크기이다. 이 허리띠는 문양이 뚫린 사각형의 판과 나뭇잎 장식 34매를 연결하였다. 나뭇잎 장식 아래에는 7줄의 띠드리개가 있는데, 1줄은 길고 6줄은 짧다.

이 허리띠의 좌우 끝에는 서로 연결할 수 있는 띠고리(교구)가 달려 있다.




금동관 (남분. 복원품)



구슬목걸이와 은반지(남분)



국보 194호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길이 33.2㎝의 금 목걸이이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2개의 봉분이 표주박 형태로 붙어 있는데, 남쪽 무덤에서 사람의 목에 걸린 채로 널(관) 안에서 발견되었다.

 금실을 꼬아서 만든 금 사슬 4줄과 속이 빈 금 구슬 3개를 교대로 연결하고, 늘어지는 곳에는 금으로 만든 굽은 옥을 달았다. 경주지역 신라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목걸이가 푸른빛의 옥을 사용한데 반하여 전체를 금으로 만든 특이한 목걸이이다.

 금 사슬, 금 구슬, 굽은 옥의 비례와 전체적인 크기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우아하고 세련된 멋을 풍기고 있다.



금귀걸이 (남분)



금반지(남분)



고리자루큰칼(남분)

환두대도라고도 불리는데, 세워 진열된 넘인데 편의상 눕혔습니다. 순전히 내 편의상..ㅋㅋ



보물 632호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정강이 가리개(경갑)이다. 황남대총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다.

 이 정강이 가리개는 남쪽 무덤 널(관) 밖 머리쪽의 껴묻거리 구덩이(부장갱)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길이 35㎝의 무릎과 정강이를 보호하기 위한 갑옷의 일부이다.

 무릎에 닿는 부분은 넓고 둥근 판 형태로, 중간쯤부터 좁아져 아래로 내려오며, 중앙에 시계추(錘)같은 돌출된 선이 있다. 전체적으로 안으로 휘어지게 만들었다. 하단부는 안으로 휘어진 은판을 경첩으로 연결하여 닫으면, 정강이를 보호하게 되고 끝에 3개의 고리가 있어 고정시키도록 되어 있다.

 천마총 출토 금동제 정강이 가리개가 출토된 적은 있으나, 은제 정강이 가리개로는 처음 발견된 것으로 중요한 유물이다.



금동신발(남분)



가슴꾸미개 (남분)

설명안내판에는 보물 619호 나와있는데, 보물 619호는 경주 박물관에 전시중인 천마총 가슴꾸미개임으로 설명안내판이 잘못되었네요.. 종종 틀리는 거도 나오는 알아서 보시길.. 



가슴꾸미개 (북분)









보물 631호 황남대총 남분 은관

 이 은관은 남쪽 무덤 널(관) 밖 머리쪽 껴묻거리 구덩이(부장갱)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높이 17.2㎝, 머리띠(대륜) 너비 3.2㎝, 지름 16.6㎝이다.

 머리띠 위의 장식은 3개의 가지가 있는 형식으로 신라시대 관모(冠帽)에서는 보지 못하던 특이한 양식이다. 중앙가지는 위에 돌기가 있고, 활 모양으로 휘어지며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마름모 형태의 은판을 붙였다. 좌우에는 반달형 은판을 붙이고, 바깥쪽을 일정한 폭으로 오려낸 다음 하나하나 꼬아서 새털 모양을 만들었다. 새털 모양의 가지는 신라 금관 형식에는 없었던 것으로, 의성 탑리 무덤에서 이와 유사한 관모가 발견되나 경주지역에서는 처음 발견된다.



금동관 (경산 임당 7A호묘, 5세기)



금동관 (황오리 34호묘)



금동관 (출토지 미상, 동원선생 기증)



금동관 (안동 지동 2호묘, 6세기)



금동관모 (남분)



금맞새김판장식 (남분)



은관모 (남분)



백화수피재고깔 (남분)



은제관꾸미개(남분)



보물 625호 황남대총 북분 은제관꾸미개

신라의 관꾸미개는 새 날개모양이 주류를 이루지만, 나비의 날개처럼 생긴것도 있다.
나비 날개모양 관꾸미개는 비교적 이른 시기 유행하였다. 새 날개모양과 다른 점은 날개의 크기가 작고 날개를 좌우로 펼친 상태로 착용하였다는 점이다. 나비 날개모양 관꾸미개와 비슷한 형태로는 고깔 측면에 마름모꼴의 날개를 직접 붙인 것도 있다









남분 출토



북분 출토

신라시대의 복장엔 주머니가 없었다 합니다. 그래서 요대에 주렁 주렁 매달고 당겼다는데, 귀중품 매달고 당기면 도적에게 '날 잡아 잡수~~'라고 선전하고 다니는건 아니였는지..



허리띠 묶는 방법이랍니다.







연세가 드셔서 두분다 요통으로 고생하시는군요...@@. 두 분다 남분출토



위는 고리자루큰칼, 아래는 장식손칼 (남분)



말갖춤



비단벌레장식 말안장꾸미개(남분. 복원품)으로 그 시대 화려한 말갖춤을 알수 있는 유물입니다.
이거 나오기전까진 일본에 있는 비단벌레장식..긍께 뭐 였더라 건물의 기둥인가 먼가가 유일한 거라고 일본이 자랑을 했다는데... 보면 볼수록 아름답군요 ^&^



비단벌레장식 발걸이(남분. 복원품)



이게 그 문제의 비단벌레라는데, 날개를 떼어 장식으로 썼답니다. 말한마리 꾸미는데 4만여 마리가 필요했다고 하던데... 갑자기 영화 빠삐용이 떠오르네요..나비잡는다고 설레발이 치던 장면..신라시대 평민의 삶도 매우 고단했을듯..걍 자신이 살고있는 현재가 최고여 !!





금동제 말띠장식꾸미개 (남분). 우측은 복원품임



말가리개. 어느게 앞이고 뒤인지 모르겠음. 대충 보세요.





위는 청동제 말방울이고, 중간은 청동제 복발형말갖춤입니다.







유리구술. 좌측부터 남분, 북분, 북분



유리구술(남분)



금방울, 유리구술, 곱은옥 등..(남분)







은합(남분)



남분에서 나온 동합, 은사발, 금사발



남분에서 나온 은제손잡이달린 항아리, 은제국자, 은제 숟가락



보물 626호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굽다리 접시)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굽다리 접시(고배)이다. 황남대총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다.

 높이 10㎝, 주둥이 지름 10㎝, 무게 169g의 금제 굽다리 접시는 북쪽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토기 굽다리 접시의 형식을 따라 반구형 몸통 밑에 나팔형 굽다리를 붙인 전형적인 양식이지만, 장식이 가해지고, 금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실용품이라기 보다는 껴묻거리(부장품)로 제작된 듯하다.

 아가리 부분은 밖으로 말아 붙였고, 나뭇잎 모양 장식 7개를 2개의 구멍을 통하여 금실로 꿰어 달았다. 굽다리는 작은 편으로 상·하 2단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 사각형 모양의 창을 어긋나게 뚫어서 장식하는 신라 굽다리 접시의 형식을 하고 있다.

찌그러진 부분이 많으나 발견된 경우가 드문 금제 굽다리 접시이다.



은제 굽다리접시(북분)



금제 굽다리접시(북분)



금사발 (남분, 북분)



은합(남분)



좌측 아래 은합 6개와 우측 상단 은사발 4개 그리고 아래 금사발 3개는 북분에서 나온 것으로 모두 보물 628호입니다.

보물 628호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

 3종류의 용기류로서 북쪽 무덤에서 발견된 것으로 은제합은 높이 8㎝, 아가리 지름 10㎝이고, 은제완은 높이 5.5㎝, 아가리 지름 10.5㎝이고, 금제완은 높이 4.5㎝, 아가리 지름 11㎝이다.

 은제합은 8개로 몸체는 반원형이며, 아래에 낮은 굽이 붙어있고 아가리는 밖으로 말려있다. 뚜껑도 반원형으로 중앙에 3장의 나뭇잎 받침이 있고, 그 위에 고리 모양의 꼭지가 있다. 은제완은 4개로 아래에 낮은 굽이 있고, 반원형을 이룬다. 아가리는 밖으로 말려있다. 금제완은 4개로 은제완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청동긴목항아리(남분)

신라무덤의 청동그릇은 대분분 고구려에서 온것이나, 몇몇은 그 계보가 뚜렸하지 않다. 황남대총의 청동제 긴목항아리는 신라 질그릇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목이 곧게 길며 바닥이 둥글다. 이는 고구려 항아리가 나팔처럼 벌어진 목과 편평한 바닥인 점과 구별된다.



청동긴목항아리(남분)



청동 긴목항아리(북분)



'마랑'명 칠기 (남분. 복원품)

황남대총에서 칠기는 남분에서 총 9점, 북분에서는 30여개로 추정되는 칠기의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이중 남분에서 마랑馬郞 글자가 있는 칠기가 출토되었다. 칠기들의 표면에는 물결무늬와 불꽃무늬가 세겨져있었고, 그 외에 달리는 사슴과 말, 날개를 펼친 봉황과 비상하고 있는 용 등으로 추정되는 동물문양이 그려져있는 것도 있었다.



수정 (북분)



시간을 보니 벌써 1시 40분. 천천히 둘러 보고 싶었지만, 사진찍느라 마음만 바쁜거 같았다. 그래도 편히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고려불화대전보다는 마음이 편했던거 같았다. 이제껏 접해볼 수 없었던 황남대총 98호분의 유물들을 둘러 볼수 있어서 기뻤다. 그래도 마음 한켠으론 경주에 살면서 유물을 보기 위해 먼 서울까지 올라와야한다는 것이 마음이 찹찹하기만 하다. 언제 다시 이 유물들을 볼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의 여운을 뒤로 하고 집한장소인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머니엔 아침에 나누어준 김밥과 떡 그리고 생수가 남아있었다.

"아..배가 고파요...ㅠ.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차에가서 빨랑 점심을 먹어야지.ㅎㅎ




이제 다음 목적지인 충남 공주를 향해 출발해야할 시간. '박물관 피로'란 말이 있듯이 회원들 모두 피곤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회원들 마음속에는 찬란한 고려 불교문화의 정수 고려불화와 황금의 나라 신라의 황남대총 유물을 뒤로하고 떠나야하는 아쉬움과 공주에서 볼 백제의 관에 관한 궁긍증이 교차하고 있었다.



떠나기 바로 직전 주차장까지 따라 나오신 박방룡 유물부장님과 김윤근 신라문화동인회 회장님이 아쉬움의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바쁘신 와중에도 소중한 시간을 내주시어 따뜻히 맞이해주신 박방룡부장님 그리고 사비를 털어 입장료를 내어주신 진한 뚝배기같은 맛의 자상하신 김윤근 회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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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는 뭐든지 재미가 있어야한다. 무거운 주제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어렵지않고, 가볍고 또 재미가 있어어야합니다. ^&^

 

그런 의미에서 사진 몇 장 올립니다. 출연에 협조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출연료는 없으니 양해주시기 바랍니다.....

 

돌발영상 1

 

제목 : 없음

 

 

 

돌발영상 2

 

제목 : 와 이리 가렵노?

 

설명 : 후진 사진이지만 정리를 하다가 보니 김윤근 회장님 표정이 재미가 있어서, 경주의 대표적 문인이신 동리 선생님의 "화랑의 후예"란 단편이 갑자기 떠올라 만들어 보았습니다.

 

 

 

 

다음은 신라동인회 10월 답사기 하편 백제의 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신라문화동인회
글쓴이 : 박정호(찢어진 워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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