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해사를 찾아서
은해사는 팔공산 동편 자락에 있는 사찰로 문화재청에서 지난 2월 23일 은해사의
금고와 금고거를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보았습니다 은해사는 신라 헌덕왕 원년(9809)에 해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해안사를 조선 명조 원년(1546)에 천교화상이 지금의 터로
옮겨지으면서 은해사 라고 이름을 바꿨다고 합니다
팔공산 은해사
은해사는 선조22년(1589)에 법영, 의인, 광심대사 등이 다시 중창을 하였으며
1919년에 대본산 사찰이 되었으며 현재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입니다
은해사 금포정
은해사 일주문을 지나 보화루 까지의 울창한 숲길을 금포정이라고 하는데 조선 숙종
(1714년)때 일주문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 숲을 조성하고 이곳에서는
일체의 생명을 살생하지 못한다 하여 금포정이라고 한답니다
사랑나무
수종이 서로 다른 두나무가 접촉하여 오랜세월이 지나는 동안 서로 합쳐진 나무를
연리목(連理木) 이라 하고 합쳐진 가지를 연리지라고 합니다 100년생 느티나무와
참나무가 붙어서 안고 자라고 있으니 연리지 중에서 아주 희귀한 경우라고 합니다
연리목 아래서 촛불을 켜고 빌거나 왼편으로 돌면 아들을, 오른편으로 돌면 딸을
낳으며 사이가 안좋은 부부가 손을잡고 돌면 사랑의 묘약이 되어서로 화합한다는
구전이 있습니다 연리지는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도 경사스런 일로 여겨 왔습니다
부도
부도는 스님을 다비하고 나오는 사리를 안치하는 묘의 일종으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과 구분하기 위하여 부도라고 칭합니다 탑은 경내에 있으나
부도는 절의 외곽에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석종형 부도
은해사 입구에는석탑모양이나 석종 모양의 부도가 여러구 있습니다 석종형 부도는
고려시대에 부도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대표적인 부도가 되었습니다
팔각원당형 부도와 석탑형 부도
부도의 종류는 팔각원당형부도, 방형부도, 석종형 부도, 석탑형 부도 등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은해사 입구에는 수 많은 부도와 비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도 역사가 오래된 명찰이었다는 짐작이 갑니다
하마비
이곳을 지날 때는 대소인을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대소인하마비가 세워져
있습니다만 大小人下 까지는 글씨가 굵고 깊게 새겨져 있으나 馬碑라는 글씨는
좀 약하게 새겨져 있는데 그 연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알고 계시는 분은 좀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뉴월 삼복지절이 되면 이 곳까지 걸어오느라고 흘린 땀을 식혀주기 위한
배려로 쉬원한 폭포수가 반겨주는 곳이라고 합니다
보화루
은해사에는 천년이 넘는 거조암을 비롯하여 백흥암, 운부암, 백련암, 묘봉암, 중암암,
기기암, 서운암 등의 8개 암자가 있으며 조계종이 설립한 은해사
승가대학원이 설치되어 불교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보화루를 지나면서
보화루의 돌계단을 오르고 나니 마음도 쉬원하게 탁트인 은해사 경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오늘 따라 경내가 너무 조용할 따름입니다
대웅전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전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손모양(수인)은
오른손을 무릎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왼쪽에는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오른쪽에는 부처님의 행원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부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당간지주
당간지주와 같은 모양을 한 석주가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데 이것은 은해사 괘불탱을
게양할 때 사용하거나 행사를 알리는 당간을 게양하는 당간지주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합니다
범종루
범종루에는 아래층에 범종이 있고 2층의 루각 위에는 금고와 운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만 법고와 목어는 보이지 않습니다ㅣ
종루에 있는 금고
은해사의금고와 금고거는 현전하는 예가 적은 17세기 금고로서 1646년에 수도사 금고로
만들어졌다는 명문을 지니고 있으며 규모도 크고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17세기 전반
금고의 면모를 알려주는 자료로 평가되어 09년 2월 23일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금고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금고와금고거 입니다만 역시 오래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금고로
절에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데 두드리는 도구로서
쇠북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얇은 북 모양인데 한쪽은 막히고 다른 한쪽은 터져서 속이 비어
있으며 측면에는 고리가 있는데 막혀있는면은 융기된 선으로 3등분하여 외연에는
꽃무늬 당초무늬 등을 양각하고 중앙의 자방에는 꽃씨를 양각하였습니다
금고의 측면에는 한줄의 종선을 둘러 그 위에 고리를 달고 공간에는 명문을 새겨
두었는데 이 명문을 통해서 제작연대와 소속사찰, 발원문의 내용 등을
알 수 있어서 귀중한 역사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운판
범종루에 걸려있는 범종과 금고와 운판은 모두 이 종각을 보수를 하면서
근래에 새로 만드러진 것 같습니다
지장전
지장전은 중생구제의 큰 원력을 세운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지장보살이 지옥
중생의 구세주이기 때문에 협시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염라대왕을 위시한
지옥의 십왕상을 봉안하고 있어서 명부전으로 더 만히이 불리기도 합니다
산신각
국토의 7할 이상이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서는 산을 숭배하는 사상이 강하며
산신을 모시는 산시각을 건립하고 소원을 빌었다고 합니다
호랑이와 노인
산신당에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을 다양하게 묘사한 것은 도교, 유교, 불교 등 우리의
전통적인 산악숭배사상을 불교에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해사의 가람배치
우리나라의 사찰은 평지 가람형, 산지 가람형, 석굴 가람형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사찰의 문은 일주문, 피안교,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 등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선방은 스님들이 참선을 하는 방으로 선종에서는 가장 중요한 전각이라하여 선불당
이라고도 하며 승방은 스님들이 거주하는 방으로 삼국시대나 신라시대는 금당의
동서로 배치되어 동서승당이라고 했으며 조선시대부터는 요사채라고 합니다
사찰은 왜 산 속에 많을까?
우리민족의 뿌리깊은 산악신앙과 호국호법의 의지이고 불교의 초세속주의와 신라말
도선국사의 풍수지리학에 의한 산천비보설의 영향, 그리고 조선시대의
배불정책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찰의 장독대
관리하시는 보살님이 누구신지는 몰라도 수많은 단지들이 하나같이
윤이 반들반들 날 정도로 깨끗하게 닦아져 있습니다
왕의 태실은 왕의 즉위년에 주로 만들어지며 인종의 태실은 거북모양으로 가봉비의
비좌로 쓰인 귀농대는 귀부와 지대석을 깎아서 만들었으며 조각이 섬세해서
조선후기 석공에술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합니다만 시간에 쫒기다
보니 그 곳까지 올라가 볼 수가 없었습니다만 참고로 안내 드립니다
왕의 태실은 백성들에게는 신앙과 같이 신성시 되었다고 하나 일제강점기때
전국에 흩어져 있는 태실과 왕릉을 직접 관리하겠다는 명분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3원과 46묘, 54기의 태실을 공동무덤 형태로 모아두고
왕릉의 존엄과 품격을 낮추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은해사 괘불탱에 대하여
이 괘불탱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화원, 처일, 보총에 의해 그려진 족자 그림으로
규격은 10.56m* 4.76m이며 재질은 견본채색으로 전체 높이가 11.56m 에 달하며
독존도 형식의 아미타여래상으로 화려하면서도 기품있는 입상이라고 합니다만
보물로 지정되어 지금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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