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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청도 신라문화유산을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08. 10. 7.

신라천년의 문화유산이 살아 숨쉬고 있는 청도를 가 보았다

지형적으로는 준령을 넘는 청도가 경주와 가까울 수 없는  위치인 것 같으면서도  한 때는 청도, 경주를 한 선거권으로 국회의원을 뽑기도 하였으며

고 3 수험생들의 수능시험을 경주에서 같이 실시하는 등 한 곳으로 묶어두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될 것도 같다

 

  (경주에서 청도를 입성하는 관문 = 청도운문땜  망향정에도 가을이......)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이 연노랑과, 연붉은 잎새들이 너무 귀엽고 아름다워서

 혼자 보기 아까워요

 

 

 

                                       처진 소나무가 천년기념물이랍니다   

 

 

 

 

  소나무의 품종으로는 금강송과 처진소나무, 산송, 황금나무, 다행송이 있으며금강송은 강송 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 줄기가 곧고 측지가 짧아서 수관이 좁고 눈이 많은 태백산맥 등에서 자생하고 있다. 처진소나무는 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수형을 가진 것인데 접목으로 이 형질이 유전되며, 우리나라 처진소나무 중 가장 전형적인 것이 이곳 매전면 처진소나무이다.

수령(樹齡)은 약2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4m, 가슴높이의 둘레가 1.96m, 지상부의 둘레 2.4m, 가지 밑의 높이가 6m이고, 가지의 길이는 동쪽이 5.5m, 서쪽이 4.8m, 남쪽이 2.9m, 북쪽이 6.2m이다. 국도에서 8m 내외 떨어진 언덕 위에서 자라고 있으며 숲 속에서 자라던 소나무의 가지가 옆에서 자라는 나무에 눌려 처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나 다른 가지에 눌렸을 때 그늘이 심하면 살아날 수 없는 것인데, 가지를 늘어뜨리면서 살아남은 귀한 존재이다.  나무의 가지가 수양버들같이 처진다고 유송(柳松)이라고도 부르고 본시 10여 주가 같이 자라고 있었으나 이 한 그루만이 남아 언덕 끝에 서 있으므로 처진 가지가 한층 더 아름답게 보인다. 나무 옆에는 고성 이씨(高城 李氏)의 묘(墓)가 있는 점으로 보아 도리솔의 한 나무로 보호되어 왔을 것으로 보인다. 옛날 어느 정승이 이 앞을 지나갈 때 갑자기 큰절을 하듯이 가지가 밑으로 처지더니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는 전설도 있다.

 

 

 장연사지 미륵불상이 초등학교 교정에...

청도 매전초등학교 교정에 보존되고 있는 장연사지 미륵불상인데 하루 빨리

제자리를 찾아서 편히 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이 학교 운동장에 지석묘처럼 앉아있는 돌인데 예사 돌이 아닌 것 같았어요 운판이 있는 것 같은데 구멍의 크기가 조금씩 다르고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것 같았어요 관심이 있으신 전문가 님이한 번 현장 답사도 필요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장연사지 가람은 개인 사유재산인 감나무 농장 안에 있어서 찾는데 조금은 어려움이 있었으며 수확을 눈 앞에 둔 남의 잘 익은 감나무 농장 속에 주인도 없는 곳을 들어간다는 것이 죄스럽드군요)

 

 

장연사지(長淵寺址)는 청도 산동지방을 흐르는 동창천(東倉川)을 바라보는 장연리에 평지가람(平地伽藍)의 신라시대 큰 사찰로 미륵불(彌勒佛)을 모시는 흥경사(興景寺)라 전하기도 한다. 이 석탑(石搭)들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조성된 3층 석탑으로 서탑은 도괴(倒壞)되어 하천에 있던 것을 1980년 2월 현 위치로 복원하였고, 동탑은 1984년 12월에 해체 복원하였다.

 

 

온전한 동탑은 높이4.8m 기단높이1.56m 기단부는 이중기단이며 옥신(屋身)은 각 면에 기둥모양의 우주(隅柱)가 2개씩 조각되어있다. 1984년 드잡이 공사시 1층 옥신(屋身)상단에서 사리장치가 있었는데, 목재 사리합(11.8cm)속에 푸른빛을 띈 사리병(4.84cm)으로 이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서탑은 높이4.84m로 하층기단을 지대석(地臺石)과 중석을 함께 붙여서 8석으로 구성하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 柱) 2주씩 이 있으며 갑석은 4매씩이고 위에 각형과 아름다운 활 모양의 호형(弧形)이 2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상층기단 중석은 4매석이고 각 면에 우주와 탱주 1주씩이 있으며 갑석(甲石)은 2매석으로 덮고 밑에는 부연(副椽)이 있다.

두 탑은 하층기단의 탱주( 柱)가 하나로 줄어들고 옥개석의 층급 받침이 모두 넷으로 적어진 것으로 보아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주변에는 당간지주(幢竿支柱), 수조(水槽), 주초(柱礎), 석등대좌(石燈臺座) 등이 있으며 사지 산기슭에 있던 미륵불(彌勒佛)은 매전 초등학교에 옮겨져 있다. 

 

 

 

청도의 명물 청도감과 대추가 풍년이들어 제철을 맞이하고 있어요 

탐스럽고 먹음직 스러워서 조금씩 구입해 왔답니다

  

 나비도 걸음을 멈추고 청도반시를 맞보고 있내요 저도 맛 보았지요  

 자세히 보니 벌도 숨어서 단 맛을 보고 있어요 

 

 

장연사지 평지 가람이 있었던 곳으로 길 건너 앞집 대추나무 과수원에는 

연화 무뉘가 화려한 당간지주가 있다

        

 불령사는 용산리 불령계곡 깊숙이 호랑산 기암절벽 아래에 645년(선덕왕14년)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그 후 1912년 봉주스님이 중건하고 1930년부터 지금까지 중수를 거듭해온 이 사찰에는 신라최고의 조각가이자 명필인 양지스님의 천년 전 작품으로 추정되는 전탑(塼塔)이 있다.

 

 

 

 

         

불령사 전탑(佛靈寺 塼塔)은 장연리(長淵寺址)에서 구운 벽돌을 불자들이 한 장식 이곳으로 옮겨와 3층탑으로 조성되어 있었으나 임란 때 허물어져 오랫동안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쌓아 두었던 것을 1968년 이 사찰의 주지로 있던 최유화 스님이 지금의 모양으로 재건하였다.

 

 

 

        

 

호랑산 비룡골 기암절벽 아래에 있는 이 절은 645년(善德女王14년) 원효대사(617∼686년)가 창건하였는데, 낡고 허물어져 1912년 봉주스님이 중건하고 1930년 이종태주지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평탄한곳에 오래 전에 붕괴된 전탑(塼塔)을 1968년 5층탑으로 재 조성한 전탑이 이 사찰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전돌은 표면에 불상과 불탑을 새겨 두었다. 불상은 불신과 몸 전체를 감싸는 거신광배, 연화대좌까지 완전히 갖추었다.

불상은 머리에 큼직한 육계를 두었으며, 법의는 통견으로 한 줄기의 옷자락이 배에서 흘러내려 대좌까지 이른다. 불탑은 3층으로 이중기단에 상륜부까지 완전하며 체감율과 기단 형태 등, 양식적으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을 보여준다. 석탑과 불상의 상륜부에는 구름무늬가 배치되어 여백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이곳 전탑(塼塔)은 장연동에서 벽돌로 구워 신도들이 한 장식 옮겨와 당초에는 삼층탑으로 조성한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그 수가 많지 않은 탑이다. 전탑의 존재를 문헌상에서 살펴보면 삼국유사권4에 선덕여왕때 석양지가 작은 전탑을 만들어 석장사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전탑은 각종문양을 양각한 벽돌로 쌓는 탑이므로 건립에 앞서 공정이 복잡하고 작업과정이 어려워 일부지역에서만 건립되었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수가 많지 않은 귀중한 전탑이 봉안되어있는 곳이다.

  이러한 전돌이 만들어지게 되는 배경은 천불천탑사상(千佛千塔思想)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전탑은 석탑에 비해 그 수가 많지 않으며 우리나라에서 불(佛), 탑(塔), 불각(佛閣)의 그림문전을 사용한 탑은 울산 농소면, 경주 삼랑사지에서 출토된바 있으나 전탑으로 구성된 것은 이곳 불령사뿐으로 전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청도  답사중에 예쁜 꽃과 나비가 같이 가자고 해요 ) 

 

 

 

 

고인돌(支石墓 : Dolmen)이란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 청동기시대의 무덤 즉 묘재로 알려져 있으며, 선사시대의 큰돌을 이용한 구조에 지역구분의 개념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고 있다. 4개의 넓직한 굄돌을 지상에 세워서 평면이 네모꼴이 되도록 돌방(石室)을 구성하고 그 위에 넓은  덮개 돌을 올려놓은 북방식과 매장의 주체부를 지하에 이루고 그 위에 받침돌이나 돌무지로 지탱되어진 덮개 돌이 올려진 남방식으로 구분한다. 이 고인돌이라는 큰돌들은 우리나라에 가장 많고, 만주 . 중국 . 일본 등지로 발달되며 동남아시아 흑해지역, 지중해지역 프랑스 유럽까지 분포되어 있다. 또한 고인돌은 무덤뿐만 아니라 제단(祭壇)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범곡리 지석묘군

범곡리 지석묘군은 청도천유역에서 가장 많은 기수가 밀집 분포하는 유적이다. 이곳 지석묘는 외견상지석을 구비하지 않고 상석을 지면에 밀착시켜 조성하는 남방식지석묘 중 묘표식 또는 개석식에 해당하는 묘제이다. 

이곳 지석묘군은 50m 간격을 두고 동쪽에 22기, 서쪽에 12기가 있다. 이는 청도 천 변에 정착했던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조성한 묘로서 그 기수가 많은 것으로 보아 까이에 큰 취락들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는 이서국을 형성했던 기층집단의 총체적 위세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추정할 수이다. 

 

 

                                       낙대폭포

 

 

낙대폭포는 청도역에서 약 3 km 떨어진 남산 중턱에 있는 높이 30여m의 폭포다.

대기암괴석의 깊은 계곡에 울창한 나무들이 숲을 이룬 가운데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물소리와 함께 일대 장관을 이룬다.

 

 


낙대폭포는 사계절 내내 절경을 이룬다. 봄에는 만개한 벚꽃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과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와 깊은 계곡에서 밀려오는 바람이 오싹 추위를 느끼게 하면서 절경을 이룬다.      또 가을이면 오색 단풍이 풍벽을 이루는가 하면, 겨울에는 흐르던 폭포수가 그대로 얼어붙어 흡사 은 풍을 연상케 한다.


낙대폭포는 옛부터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약수폭포라고도 불려지고 있다. 
그래서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이 찾아들어 웃통을 벗은채 폭포수를 맞으며 신경통도 고치고, 더위를 식히는 일석이조의 즐거움을 나눈다.

 

 

                                한옥학교를 찾아서

 목수양성 22기 수료식이 있었나 봐요  젊은 목수들이 만았어요

  

          

요즈음 보기드문 목조건축 장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배움의 전당 한옥학교가 청도에 있어요 젊은이들이 이름도알 수 없는 요상한 목공 공구들을 가지고 열심히 토의 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 한옥을 이 분들의 혼으로 영원히 그맥을 이어 갈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강의실 조명등도  이색적으로 디자인 했어요

 

아마 한옥 의 건축 모형을 축소한 수강생들의 실습 작품인 것 같아요 

 못을 사용하지 않은 것 같아요

 

 

 

                                    (석빙고의 참 모습 인것 같아요)

 

 

이 빙고는 인위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겨울철에 자연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 .여름 .가을까지 사용하였다. 청도읍성 동문 동상리 구릉에 위치하고 크기가 길이 14.75m, 넓이 5m 높이 4.4m로  화강암을 지하에서 아치모양으로 틀어 올려 쌓아 올리고 다듬은 돌로 홍예를 올린 후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석빙고의 입구는 서쪽에 있으며 입구의 출입문은 지금은 없어 졌고 계단을 따라 안으로 내려가게 되어있다. 바닥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경사가 졌으며, 흙을 단단하게 다진 바닥에 돌을 깔았다. 배수는 양쪽 가장자리에 있는 배수로의 경사를 따라 가운데 배수구에 모여 외부로 흘러나가게 되어 있다.

 

 천정은 아치형으로 된 10개의 돌을 짜서 틀어 올려 4개의 보를 만들었다. 이 보위에다 거대한 판석을 덮어 천정을 만들었는데, 이들 개석(蓋石)은 거의 파괴 또는 없어지고 몇 개만이 앙상하게 남아있으며,  환기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청도 석빙고는 조선 숙종39년(1713년) 2월 11일에 진사 박상고(進士 朴尙古)가 착공하여 같은 해 5월 5일에 준공했다. 고 비문에는 오산지(鰲山誌)에는  당초 청도읍성 북문밖에 있었는데, 토굴로 만들어 협소하고 허물어져 이곳에 다시 축조하였다고 하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신라 지증왕 때 얼음을 저장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전국에 보존되고 있는 6기의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된 석빙고이며, 규모도 제일 큰 소중한 유산이다

        

  기둥이 없어도 아취를 이루고 있는 진수가 보여지내요 돌 하나 한가  대단합니다 

                곧 무너저 내려 앉을 것 같으면서도 걸어다녀도 안전하다는군요

 

 

 

 

==  청도읍성의 옛모습을 찾아서  ==

 이 읍성은 청도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화양읍 선상지에 축성된 남고북저의 석축성으로 고려 때부터 있었다.  산성과 평지성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평산성으로 읍성의 평면형태는 방형이고 성벽은 자연석 협축벽이며 북·동·서벽의 중앙에 성문이 구비되어 있었다. 

 

 

 

 

==  복원하고 있는 읍성의 관문  ==

 

 

규모는 화안문헌고에 둘레 1,570보(약1,800m)에 벽고는 5자 5촌(약1.65m) 여첩은 600측이라 하였다. 당시의 성곽은 석성과 토성을 혼합해서 쌓은 것으로 화양읍 서상리, 동상리, 교촌리를 둘러싸고 있던 것을 군수 김은휘(金殷輝)에 의해 1590년(선조23) 착수하여 1592년(선조25)까지 석축형으로 고치고 성의 높이도 더 높이게 되었는데, 그러나 임진왜란때 동·서·북문이 소실되고 성벽이 파괴되었다.

 

 

 

 

 

 

그 후 성벽의 수축(修築)과 문루(門樓)의 재건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의 읍성 철거정책으로 다시 성벽이 헐리고 문루도 제거되었다. 또한 장관청, 아전청, 회계소, 동헌, 객사, 군기고 및 3개의 누각 등이 성 내부에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철거되었다. 그러나 지방관아와 민가가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고, 성곽 기저부분이 잘 남아있으며 기록도 전해지고 있는 청도읍성은 지방관아 및 읍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유적이다.

 

 

 

 

새롭게 단장하는 청도 읍성의 복원 모습입니다  삼문인듯 하고요 

공덕비인 것 같은데 아마 입구에 세워지려나 봐요            

 

 

청도읍성 안에 있던 동헌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중심 건물이며 관찰사, 수령 등의 정청으로서 지방의 일반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이 곳에서 행해졌던 곳이다.

 

이곳 청도 동헌은 일제시대에 들어 1917년 대성면(현 청도읍) 고수동에 군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함에 따라 옛 관아 건물은 용도가 폐기되고 동헌(東軒)건물만은 학교교실로 활용되면서 지금까지 용케 남았다. 

래 1737년경(영조13년) 화양초등학교의 운동장에 있었는데 1955년 12월 22일 내아(관사)가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것이다. 

당초의 건물은 자연석을 쌓은 기단 위에 다듬은 원형주초를 두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자연석 덤벙 주초에 두리기둥을 세운 초익공계의 건물이었다.

 

기둥배열은 정면7칸 측면3칸 규모로 앞쪽 칸은 퇴칸 형식으로 구성되었고, 상부가구는 기둥 위에 보아지와 주두를 놓아 대량을 받았고 포대공을 세우고 종보와 중도리를 얹었다.

 

 

동헌은 지방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건물이고, 현재 대부분의 동헌이 없어지고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은 상황으로 동헌건물이 이건 되었다하나 청도읍성내에 있고 기둥을 비롯한 목재부는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조선시대 관아건축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있다. 

양쪽 측면 벽은 중방을 지르고 회벽을 쳤으며, 어칸에는 미서기 출입문을 양쪽 퇴칸에는 각각 외짝 미닫이문을 설치하고 여타칸에는 모두 미서기 유리창을 달았다. 벽을 좌측3칸, 우측4칸으로 크게 2칸으로 구분하여 교실로 이용하였다.

        

                                        청도 읍성의 유적 안내도

 

 

 

                                              ==  도주관을 찾아서  ==                 

 도주관이란 이름자체가  이상하게 들렸으나 객사라고 하드군요

 그런데 경찰지구대 옆에 있어서 도주할 염려도 없을 것 같고  

 관리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아요

 

 

 

 

    ◆ 청도 박곡동 석조석가여래좌상

 얼굴은 풍만하면서도 박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힘찬 어깨와 당당한 가슴 잘쑥 한 허리, 몸에 밀착된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 등에서 강건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통일신라성기의 걸작불상으로 높이평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높이 약1.35m의 미륵불(彌勒佛)이다. 불상은 전체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높이 약1.2m의 연화대위에 있으며 지금은 불각을 세워안치하고 있다. 1928년 이 부락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피해를 입어 불상의 표면 전부가 크게 파손되었으나 아름다운 면상과 목에 있는 삼도는 남아 있다. 또한 대좌는 팔각이나 손상이 많으며 하대석은 복연으로 복변팔엽의 연화문을 각 면에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팔각으로 각 모퉁이에 기둥모양이 있다. 상대석은 반원형이며 앙연석은 있었던 윤곽이 보인다.  당초에는 광배가 있었으나 파괴되어 두 개의 파편만 남아 있다. 이 파편을 보면 주형광배에다 두광과 신광을 나타내었고, 외면에 불꽃무늬와 연꽃무늬을 조각한 웅장하고 화려한 광배였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 걸작불상은 무진년에 화재가 발생하여 화강석이 파괴되고 운반대가 파열되어 험상굿게 보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부근일대에서 사찰용 기구 및 와병등이 나오는데 신라시대의  소작갑사지 혹은 대비갑사지로 추정하며 예전에 대비사가 이곳에 있다가 고려초에 현 위치에 옮겼다.  

 

 

 

 

 

경주시 산내에 새로 조성한 폭폭인데요 청도로 갈 때는 물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올 때는 폭포가 흘러서 보기 좋드군요 조금은 단조롭고 자연적인 표현이 모자라는 것 같아서 조금은 아쉽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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