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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스크랩] 경주박물관 신라 역사 인물 특별전2 <고운 최치원>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4. 6. 14.

<!-by_daum->신라 역사 인물 특별전2-고운 최치원 2012. 9. 18. ~ 11. 18. 국립경주박물관

 

 

최치원 진영, 조선시대, 117.8×76.5cm, 견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를 세우고, 일구고, 가꾼 역사상의 인물들을 되돌아보는 ‘신라 역사 인물 특별전’을 마련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전시로 2010년에는 원효대사전을 개최한 바 있다.

올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문명(文名)을 떨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년~미상) 특별전을 개최한다.

 

최치원은 신라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학자이며 사상가이고 관료였다. 그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당나라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게 된 최치원은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으면서 그의 문명(文名)을 널리 떨치게 된다. </격황소서檄黃巢書>

 

885년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왕실에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다.

894년에는 신라의 개혁을 위해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를 지어 진성여왕에게 올렸으며, 진성여왕은 이를 받아 들여 최치원을 6두품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인 아찬(阿湌)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시무10여조>는 진골 세력 등의 반발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였고, 이는 최치원이 세속을 떠나 은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말았다.</시무10여조></시무10여조時務十餘條>

 

최치원은 정치적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학문은 다양한 방면에서 뛰어나 후세에 모범이 되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그를 동방의 문종(文宗)으로 추앙하고, 기리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삼국사기 권 46, 열전,김부식(1075~1151), 조선시대(1573년), 31.5×22.4cm, 목판본, 옥산서원, 보물 제525호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최치원의 여러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최치원이라는 인물을 조명해 보고자 하였다.

전시는 1부 청운의 꿈을 품다,

          2부 세상에 문명을 떨치다,

          3부 서책으로 베개를 삼고 풍월을 읊다,

          4부 최치원을 추억하다 등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원필경, 최치원(857~?), 1918년, 29.2×20.0cm, 목활자본, 개인

 

최치원의 대표적 저술인『계원필경』을 비롯하여 <사산비명> 탁본 등 100여점이 선보인다. 이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최치원 진영崔致遠眞影>은 보존처리를 마친 뒤 처음으로 공개된다. </최치원></사산비명>

이 밖에도 김종직(1431~1492), 남효온(1454~1492), 이황(1501~1570), 김창협(1651~1708) 등의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문집도 눈여겨 볼 만하다.

 

 

이번 전시가 천여 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옥같은 글을 남긴 고운 최치원 선생과 대화하는 뜻깊은 자리가 될것으로 기대된다.

 

    

▶  전시 기간: 2012. 9. 18.(화) ~ 11. 18.(일) *월요일 휴관/ 단 10월 1일은 개관, 2일 휴관
     ▶  전시 장소: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  기념 강연회: 2012.10.27. 15시 / 동국대 김복순 교수/ 최치원의 저술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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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후 최공 진영

 

 

 

경주 최씨 문중 소장 '문창후 최공 진영'파란 부분에 동자상이 있었으며 빨간 부분에는 건륭 58년(1793)에 하동 쌍계사에서 제작됐음을 밝혀주는 화기(畵記)를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 시주자 등의 내용도 기록돼 있다

 

 

1793년 그려진 '문창후 최공 진영'(경주 최씨 문중 소장)을 엑스선 촬영한 도판을 보면 원래 신선사상에 근거해 동자상이 초상 양쪽에 있었지만, 후대 모두 지워지고 문방구와 책장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조선후기에 그려져 처음 공개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진영도 이를 본떠 그린 근대기 화가 채용신의 초상그림이 의자 받침 등에서 근대 원근법을 사용했다는 점과 대비되면서, 그를 바라보는 전근대·근대 관점의 차이를 보여준다

 

<관련자료 : < />ONT>http://blog.daum.net/kinhj4801/15959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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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孤雲) 최치원(857~미상)은 신라시대의 조기유학생이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그는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는데, 당시 그의 아버지는 “10년 안에 급제를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공부에 힘쓰라”고 말했다 한다.
아버지의 기대대로 18살에 과거에 급제한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관료 생활을 하며 빼어난 글 솜씨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을 꾸짖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6두품 출신이었던 최치원은 885년 신라로 돌아왔지만 신분제의 벽에 막혀 뜻을 펼치지 못했다. 개혁안 ‘시무 10여조’를 지어 진성여왕에게 올렸으나 진골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이후 그는 세속을 떠나 지리산에 은둔했고,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퍼졌다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메모 : 토함산솔이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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