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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을 찾아서

무장사지의 설화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4. 8. 25.

 

무장사지의 설화를 찾아서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병기와 투구를 감춘 곳으로

알려져 있는 무장사지를 찾았다.

 

경주 보문관광단지

물레방아가 있는 곳에서

암곡동으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라

곧장 가면

덕동댐 상류에 왕산마을이 있고,

 

여기에서 비포장으로 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산 8부 능선 쯤

우측으로 탑이 보이는 곳이

바로 무장사이다.

 

이곳은 암곡이라는 지명에서 보듯이

골짜기가 깊어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곳이다.

 

 

일연선사는

그윽하고 너무도 험준하여

 

마치 깍아 세운 듯하며,

 

깊숙하고 침침한 골짜기는

속세와 단절되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줌으로

도를 즐길만한 신령스러운

곳이라고 하였다.

 

 

요즈음에는

목장으로 가는 넓은 길이

계곡을 따라 있어

정취가 조금은 덜하지만

 

봄이면 골짜기에는 갖가지 꽃이며,

풀, 산딸기 등을 가까이 할 수 있고,

 

여름에는 계곡을

흐르는 청아한 물소리가

찾는 이의 마음을 자연 속으로

젖어들 게 한다.

 

가을이면

붉게 타오르는 단풍을 즐기면서

천년 전 번창했던

절터를 찾아가는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무장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권3 무장사 미타전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이

그의 숙부를 추모하여 세운 왕실의

원찰이라고 한다.

 

이 절터에는

현재 보물 125호로 지정된

아미타조상사적비의 이수와 귀부를 비롯한

보물 126호인 삼층석탑이 남아있다.

 

그리고 건물의

기둥을 올렸던 초석 일부와

석등을 받혔던 연화대좌가

절터에 남아 있다.

 

 

 

특히 보물 125호로 지정된

 

아미타조상비는

신라 제39대 소성왕(799~800)의 비

계화부인이 왕의 명복을 빌고자

 

소성왕이 사망한

다음해인 애장왕 2년(801)에

자기의 재산과 재물을 희사하여

 

아미타전을 짓고

여기에 아미타 1구와

신상을 모실 때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사적비의 비신은 없어지고

 

다만 비를 받혔던 쌍귀부와

비신 위에 올렸던 이수만이 남아 있다.

 

현재 귀부의 머리는 절단되어

없어졌으며,

 

귀부 비좌 4면에는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비좌의 옆에 놓여있는 이수는

6마리의 용이 운무 속에서

 

용틀임을 하면서

앞발로 여의주를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다.

 

신라의 것으로는

태종무열왕릉비 이수가 남아 있으나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는 찾아보기

어려운 유물이다.

 

 

그리고 비신은

다행히 1915년에

 비편 중 3조각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 비편의 발견으로 인해

이곳이 무장사임이 밝혀지게 되었으며

 

발견된 비편 중에는

조선시대 금석하자이며,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가

직접 이곳을 답사하고

 

남긴 조사기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일연선사는

삼국유사에 기록하기를

 

"근고에 와서 미타전은 허물어졌으나

 

 절만은 홀로 남아 있다"라고 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고려중기 까지는

무장사가 존속을 하였으나

 

고려말에 이르러 중창되지 못하고

점차 퇴락되어 간 듯하다.

 

그러나 주변에

흩어진 기와편을 볼 때

조선시대 까지도 법등은 미력하나마

이어져 왔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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