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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을 찾아서

명활산성의 설화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4. 8. 25.

명활산성의 설화를 찾아서

 

 

 

경주 보문호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표고 259m의 명활산에는

5세기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측되는 토성과

진흥왕 12년(551)에 쌓은 석성이 남아 있다.

 

보문관광단지 입구로 들어가기 전

삼거리 우측 50m 지점에

 

북문쪽 석성의 일부를

발굴 복원해 놓은 것이 보이고,

산 좌우의 능선을 따라

허물어진 석성을 복원공사 중이다.

 

그 길이는 약 4.5km로 지금은

허물어진 성곽에는 잡목들만 무성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산이라는 느낌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15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험난했던

역사만큼이나 무수한 이야기들이

이끼 낀 돌 속에 묻혀있다.

 

신라의 모태가 되었던

사로 6촌중 고야촌이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아

생활무대로 삼았던 곳이며,

 

 

삼국시대에는

왕도 동쪽을 방위할 목적으로

성곽을 쌓은 중요한 군사 요새였다.

 

기록에 의하면

실성왕 4년(405)과 눌지왕 15년(431),

자비왕 14년(471)에 왜병이

여러 차례 명활성을 공격한 사실은

 

경주주변의 성곽 중에서

왜적과의 전투가 가장 많이

벌어진 곳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래서 진흥왕 때에는

기존의 토성 외에 돌로

튼튼한 석성을 쌓게 되었는데

 

1988년에

현재 복원된 성 근처에서 발견된

명활성 작성비에는

 

진흥왕 12년(551년)에 축조하였으며,

 

성벽을 쌓는데

동원된 담당구역 책임자와

 

그 이하 실무책임자의 이름,

담당한 성벽의 길이, 축성공사 날짜,

글쓴이의 이름 등이 새겨져 있다.

 

 

특히 자비왕 16년(473)에는

명활성을 크게 수리하고 2년후에 이사하여

이곳에서 돌아가셨으며,

 

소지왕 9년(487)에

반월성을 수리하여 그 이듬해에

월성으로 옮기기 전까지

13년 동안 궁성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 선덕여왕 16년(647)에는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김춘추와 김유신의 신진세력을 저지하고

 

이전까지 유래가 없었던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을 폐하고자

 

이곳 명활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이 싸움에서 비담은

김유신과 공방을 시작한지 10일이 되어도

점령하지 못하고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고 있을 때,

 

갑자기 밤하늘의 혜성이 궁성이 있는

월성 방향으로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비담은 "이것은 필시

김유신 진영에 유혈이 일어난 것이다."하고

부하들의 사기를 돋구어 진격코자 했다.

 

 

이에 김유신 진영은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자

김유신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안기고

연에 실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같이 하여,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도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흰 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

제사를 지내고 사기를 회복하여

비담의 난을 진압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성내에는 문지와 건물지

허물어진 성곽과 가끔씩 발견되는 기와 편과

토기조각에서 옛 영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보문관광단지를 찾는 관광객이

년간 약 600만 명에 달한다고 하나 어느 누구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인 명활산을

주목하지 않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비록 허물어지긴 했지만

성곽을 복원하여 누각의 전망대를 만들고

홍보에 조금만 노력을 기울인다면

 

머지않아 신라인들의 혼을 깨우며

보문호를 성돌이를 하는 선남선녀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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