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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스크랩] 석가탑을 무영탑이라 부르는 까닭은?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3.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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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 부르는 까닭은?

 

 

 

무영탑이라 불리는 석가탑

 

 

불국사 대웅전 앞, 다보탑과 석가탑이 동서로 마주보며 나란하게 서 있다.

법화경에 의하면 석가여래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을 하는데 그 뜻을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자 칠보(七寶)의 탑이 땅에서 솟아올랐으며 그 속에서 다보여래가 나타나 석가의 설법을 찬양하며 그 참됨을 설명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석가탑은 석가여래 상주설법(常住說法)의 탑이며, 다보탑은 다보여래 상주증명(常住證明)의 탑으로서, 곧 한쪽에서 석가여래가 설법하고 한쪽에서 그 설법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특히 석가탑은 천년을 두고 민간설화로 전해 내려온 백제 석공(石工)아사달과 그 연인 아사녀(阿斯女)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와 함께 그림자가 없는 '무영탑(無影塔)'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천년을 두고 한국여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탑이다.

 

 

 

아사녀는 신라로 간 남편 아사달이 탑을 무사히 잘 만들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신라로 떠난다. 아사달이 탑을 만들고 있는 불국사로 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탑의 그림자가가 비칠 영지에서 기다리게 된다. 연못에 비칠 거라고 약속했던 기한이 지났는데도 탑의 그림자가 영지에 떠오르지 않자 실망한 아사녀는 연못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이다.

탑은 완성되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다고 해서 무영탑(無影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화인데,.....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유가 여러가지로 이야기되고 있다.

 

 

 법화경

 

법화경은 석가모니가 열반하시기전에 설(說)하신 것으로 불교 경번 중에서 가장 어려운 법문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일반 중생들이 바로 듣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따라서 누군각 쉽게 설명함과 함께 법화경도 진리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증명하는 이가 바로 다보여래이며 석가탑과 다보탑이 함께 있는 이유이다.

 

 

먼저,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 부르는 이유는, 

석가여래(석가탑)가 설법을 하고 있으나 대중이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가슴 속에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영(無影)의 상태이다. 다만 마주보고 있는 다보여래(다보탑)에 의하여 증명된다는 불교의 철학적 표현에 기인한 것이라는 설(說)이 있다.

 

 

 

온 몸이 빛나는 불상

 

또 다른 주장은

부처의 32상호에 '부체유연세활 자마금색(膚體柔軟細滑 紫磨金色)'이라 하여, 부처는 피부가 부드러워 곱고 매끄러우며 자마금빛으로 빛난다

또 80종호에 보면 '사변광각일장(四邊光各一丈) '이라 하여, 사방으로 광명이 각기 일장씩 뻗어 나간다고 한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몸에서 스스로 자금색 빛이 나서 일장씩 뻗어나가기 때문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으므로 석가모니의 몸은 무영(無影)이며 그를 모신 탑이기에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부른다는 주장도 있다.

 

 

탑신의 그림자가 비치지않는 석가탑

 

 

 

또 다른 주장의 하나는

불국사 석가탑이 하지(夏至)날 정오에는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 무영탑(無影塔)이라고 한다는 설(說)이다.

즉 하지를 전후한 날 정오에는 석가탑의 그림자가 탑의 기단 안에 머물러 탑신의 그림자는 땅에 드리워지지 않는다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탑신의 그림자는 탑의 기단 그림자 속에 들어가 기단의 그림자만 보일 뿐 탑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도록 고도의 천문학적 계산에 의해 조성이 되었다는 것이다석가탑의 위치 선정과 건조물의 칫수 등을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정오에 탑신의 그림자가 기단 그림자의 밖으로 나올 수 빆에 없다. 그러나 석가탑은 과학적 계산과 기술적인 시공으로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탑으로 축조되었다는 것이다.따라서 석가탑 축조 당시부터 석가탑을 '무영탑'이라는 부른 까닭은 연못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탑신의 그림자가 지면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說)이다.

 

석가탑이란 본래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나 치아 또는 머리카락을 모신 탑을 말하며 우리나라에는 불국사 외에도 속리산 법주사, 양산 통도사, 오대산 월정사, 칠곡 송림사 등지에 석가탑이 있다.

이 석가탑들은 모두 하지 정오에 탑신의 그림자가 땅에 드리우지 않게 축조된 무영탑이라고 한다.

 

 

 

 

 

무영탑에 관한 본격적인 기록은 '화염불국사 고금역대 제현 계창기(華嚴佛國寺古今歷代諸賢繼創記-불국사고금창기)'에 실린 '서 석가탑(西釋迦塔)'조에 처음 등장하며 무영탑 전설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원형 자료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석공은 이름이 없는 당 나라 사람이고, 그를 찾아온 사람은 누이 아사녀(阿斯女)이다. 불국사 남서쪽 10리 지점의 못에 석가탑 그림자가 비치 않아서 무영탑이라 했다는 간단한 기록만이 실려 있다. 초의 의순(草衣 意恂)의 '불국사회고'라는 연작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앞의 두 자료에는 비극적인 결말은 없고, 단순히 탑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는 사실만 담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발간된 오사카 긴타로(大板金太郞)(1921년)와 오사카로쿠손(大阪六村)의 『경주의 전설』(1927년) 중 영지(影池) 부분에 이르면 아사녀는 누이에서 부인으로 바뀌었고, 탑 그림자가 영지에 계속 비치지 아니 하자 아사녀는 투신하고, 석공은 부인을 닮은 부처상을 조각하고, 투신한다는 비극적인 내용으로 바뀌고  석가탑은 무영탑(無影塔), 다보탑은 유영탑(有影塔), 못은 영지(影池), 영지 언덕에 있던 절은 ‘영사(影寺)’로 불렸다고 각색이 된다.

뒤이어  1938년 7월부터 현진건은  오사카 긴타로와 오사카 로쿠손의 영지 전설을 바탕으로 이를 소설화하여 동아일보에 '무영탑 전설'을 연재하고, 1941년 장편소설 '무영탑'을 발간한다.

이 작품은 서사구조가 복잡한 장편 소설로서, 귀족의 딸인 구슬아기를 등장시켜 본격적인 갈등과 파국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애정 소설로 거듭난다

 

현진건은 석공과 부인을 부여 사람으로 묘사하고, 석공의 이름을 아사달이라 부른다. 그리고 아사달과 아사녀는 당나라 사람이 아닌 백제 사람으로 설정했다. 이것은 현진건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진건에 의해 소설화된 무영탑의 전설은 그 뿌리가 깊어 이제는 거의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현진건의 소설 '무영탑'

 

 

불국사 석가탑을 무영탑이라 부르는 연유가, 애절한 사랑 이야기인 '아사녀 설화'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무영탑'이라는 또 다른 이름 때문에 '아사녀 설화'가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가 요즘 들어와 많이 회자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사찰이던 그 절의 사찰기(또는 창기)는 어느 정도 미화되고 과장하여 기록이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아사녀의 이야기가 실려있는 '불국사고금창기'도 조선시대(1740년 영조16년) 스님에 의해서에 쓰여진 사적기이므로 당시 민간에 전해오던 전설적인 이야기를 그대로 반영하여 기록한 것은 아닐까?

 

아찌되었던, 이 '아사녀 설화'는 그야말로 전승되어온 아름답고 애절한 설화이며, 오래동안 우리 민족의 가슴속으로 잔잔하게 이어질 것이다,

 

 

동리목월기념관(불국사 정문 맞은 편) 앞 정원에 서 있는 아사달 아사녀의 사랑탑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틋한 전설을 소재로 한 탑-영원(永遠) / 불국사 옆 앞 광장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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