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답사

지리산 제일문을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2. 9. 13.

 

 

지리산 제일문을 찾아서

   

 

함양 오도재

고갯마루에 오르면

지리산 제1문이라는 관문이

있는데 선조들이 지리산을 넘나들며

상거래를 활발히 해왔던 곳으로 오도재의

제일문을 함양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복원한

곳으로 이 곳에는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방장

1문이 2개 있었으나 6.25때 불타버리고 오도재

옆 금대산에서 돌로 만든 방장 제1문의 표지석과

칠언시를 찾아냄으로써 역사성이 증명되어 지리산

1문을 오도재 정상에 복원하였으며 이 오도재는

구형왕후인 계화부인이 제단을 쌓고 망국의 한과

선왕들의 명복을 빌었던 곳이라고 하며 관문의

문 옆에는 산신각을 복원해 두었으며 변강쇠와

옹녀 이야기를 상징하는 장승과 정여창 시비.

김종직 시비. 신숙주 시비, 유호인 시비

야외전망대, 시민공원, 전망대휴게소,

등을 설치하여 현재는 관광명소로

자리잡은 지리산제일문입니다

  

  함양 오도재 고갯마루에 오르면 지리산 제1문이라는 관문이 있는데

우리 선조들이 지리산을 넘나들며 상거래를 활발히 해왔던 곳으로

오도재의 제일문을 함양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복원한 곳입니다 

 

이 곳에는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방장 제1문이 2개 있었으나 6.25때 불타버리고

오도재 옆 금대산에서 돌로 만든 방장 제1문의 표지석과 칠언시를 찾아냄

으로써 역사성이 증명되어 지리산 제1문을 오도재 정상에 복원하였습니다

 

  이 오도재는 구형왕후인 계화부인이 제단을 쌓고 망국의 한과 선왕들의 명복을

빌었던 곳이라고 하며 관문의 문 옆에는 산신각을 복원해 두었습니다 

 

지리산 제1문은 오도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부터 이 곳에는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방장 제1문이 2개 있었으나 나무로 된 문은 6.25때 불타고

없어졌으며 돌로 만든 문이 아직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리산제일문에는 함양출신 명필 정주상성생의 글을 서각가 송문영선생이

전각한 현판이 걸려있으며 삼봉산과 법화산이 만나는 쉼터입니다

 

지난 2005년 초에 오도재 옆 금대산에서 돌로 만든 방장 제1문의 표지석과 바위에

새겨진 방장 제1문에 관한 칠언시를 찾아냄으로써 지리산 제1문의 역사성이

증명되어 2006년 지리산 제1문을 오도재 정상에 준공하였습니다

 

 

오도재 길을 올라 정상에 서면 성곽길이 38.7m, 높이 8m, 7.7m로 팔각

지붕의 웅장한 자태를 선보이는 지리산 제일 관문이 보입니다   

 

  

마천, 하동, 구례로 통하는 고갯길인 오도재에 가락국 구형왕후인 계화부인이

올라와 제단을 쌓고 망국의 한과 선왕들의 명복을 빌었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성황당이 생기고 지나가는 길손이 기도하고 주민과 무당들이 지리산의

천왕신을 모시고 제를 지내던 곳인데 퇴락하여 복원했다고 합니다.

 

오도재 정상에는 옛날 영호남을 오가면서 장사를 하던 상인들이 무사히 재를

넘고 장사가 잘 되도록 산신령에게 기원하는 비석도 있습니다

 

 

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은 서기 532년 신라가 침공하자 선량한 백성을 전쟁의

제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나라를 신라에 양국하고 9만 대군을

거느리고 함양 제한역아래 와서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도재 건너 촉동에 대궐 터를 잡아 역사를 시작했으나 적을 방어하기

어려운 지형이라 칠선계곡으로 들어가 추성을 쌓고 피란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9만 대군이 머물렀던 곳을 대군지라하며 구만동이란 마을이 형성되었고

활개미란 곳은 활을 쏘며 무술을 연마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오도재는 함양읍내에서 함양군 마천면으로 가는 고갯길로 삼봉산 줄기를

넘어 마천면 창원마을로 조금만 내려가면 전망대가 있습니다

 

 

대리석으로 고개의 양쪽을 잇는 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전통식 건물을 지어

아치형관문을 만들고 관문 천정에는 용의 형상을 그려 놓았습니다

 

   

관문 앞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잠시 쉬면서

함양의 풍광과 지리산 준령을 한 눈에 관람할 수 있는 곳입니다.

 

 

산신각 옆으로는 함양에 유명한 전설 중에 하나인 변강쇠와 옹녀

이야기를 상징하는 장승들이 즐비하게 서있습니다.

 

 

이 곳에는 함양 변강쇠 뿐만 아니라 타 지역의 변강쇠들을 세워 두었는데

포항변강쇠, 산청변강쇠, 동해변강쇠 등을 비교할 수 있는 곳입니다

 

오도재에는 변강쇠와 옹녀 이야기를 상징하는 장승과 정여창 시비. 김종직 시비.

신숙주 시비, 유호인 시비 야외전망대, 시민공원, 전망대휴게소, 등을

설치하여 현재는 관광명소로 자리 잡은 지리산제일문 입니다 

 

 

<일두 정여창 시비>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정여창은

'잿부들 바람에 한들한들 가볍게 너울대고,

 사월 봄날에 꽃이 피는데 보리는 이미 누렇구나.

 

 

두류산 수많은 봉우리들을 모두 다 구경하고,

큰 강물에 배를 띄어서 고요히 아래로

흘러가누나.'라고 지리산을 노래했습니다.

 

 

 

그는 본관이 하동으로 호는 일두이고 성종 21년에 출사하여 관직을 두루 거쳐

연산군 4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죽고 갑자사화에 부관참시 되었습니다  

 

 

 

<점필재 김종직 시비>

 

점필재 김종직은 엄천사에 지다 라는 시로 지리산을 노래했는데 엄천사에서

유호인 임대동 함께 세사람이 차 달여 마시며 청담으로 회포를 풀었네.

 

하룻밤 동안 벼슬살이 모두 잊었었는데, 여울소리에 꿈을 깨어

문득 시를 찾누나.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로 외가인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선산이고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주로 받들어 졌는데 그가 지은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인물입니다

 

 

 

그는 조의제문에서 노산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 쪼았는데, 한 동자가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며

 

 

항우에 살해 당해 물에 던져진 희왕을 조상한다는 내용으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꼬는 내용이었는데 살해당해 물에 던져진 단종을 묘사한

부분이 문제가 되어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보한재 신숙주 시비>

 

조선전기 세종과 함께 한글을 창제하고 보급하는데 많은 공을 세운 신숙주는

두류산을 바라보며 라는 시에서 '아득히 두류산이 하늘중턱 솟았는데,

 

 

호남을 바라보니 고운 구름 속에 쌓였구나. 제운루 올라서서 난간에 기대어

보니 천고에 푸른산이 굽이굽이 한결 같구나.'라고 노래하였으며

본관은 고령으로 호는 보한재입니다.

 

 

신숙주는 호남을 바라보니 고운 구름에 쌓였구나.라고 하여 호남 땅의

동쪽 끝에 자리한 두류산을 찾아 국조 이성계의 본관이 있는

호남(전주)을 찬양하였던 것이라고 합니다

 

 

<뇌계 유호인 시비>

조선 전기 시인이자 문인이었던 유호인은 '두류산 노래'에서 '천왕봉에 올라

신선에게 예를 표하노니, 번쩍이는 환한 빛 안개구름 사이로 솟아오르네.

 

 

 

고개 들어 우러러 보면 고금의 사물이 눈 아래 있고, 한 세상 모든 것이

부질없이 아득하여라. 천왕봉 아니라면 우러러 볼 산이 어디 있으랴.

 

 

 

한 밤에 해가 솟는 동쪽 바다 부상나라의 새벽, 동남으로 수만리 멀리

공간을 바라보니 한 가닥 희미하게 푸르른 섬 구름바다 위로 떠오르네.

'라고 노래하였으며 본관은 고령으로 호는 뇌계입니다

 

오도재가 있는 삼봉산은 지리산과 마주하고 있는 산으로 남원의 아영,

산내면, 함양의 마천, 휴천, 금지면에 걸쳐 있는 산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지리산의 특산물을 모아 보관하였다가 왕실에 올려 보냈다는

창고가 있던 창원마을이 이 산 기슭에 있고, 딱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창호지를 만드는 산업이 번창했던 산입니다

 

오도재로 지리산 가는 길은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이 지리산을 넘나들며 지역 간

상거래를 활발히 해왔던 지역으로 함양인의 애환과 삶의 정취가 물씬

배여 있는 산악도로였던 것을 2003년 아스발트로 포장 하였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