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생가를 찾아서
시인이며 국문학자인
조지훈은 본명이 동탁으로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나 일제 교육을 거부한 조부
밑에서 주실마을 월록서당에서 한학과
한글, 유학과 역사 등을 배우며 유년기와
소년시절을 보내다가 경성으로 올라와 혜화
전문학교에 들어간 후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하게 되었으며 1939년 시인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를 통해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 하였는데 조지훈은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꼽히는 그는
일제 말 민족의 얼과 정서를 지키기 위해
시를 쓴 민족적 전통 시인 동탁 조지훈
생가 주실마을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조지훈선생이 태어난 집은 조선 중기 인조때 이곳 주실마을에
입향한 시조 조전의 둘째 아들 조정형이 지은 집으로
주실 마을의 대종가인 호운종택입니다
한국전쟁 때 일부가 불에 타서 1963년에 크게 고쳐 지었으며
고가의 맛은 그다지 남아 있지 않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곳 주곡리 주실 마을은 한양 조씨의 동족마을이기도 해서
350년 된 마을의 아늑한 분위기도 느껴볼 수 있습니다.
한양 조씨는 조선 중기인 350년 전에 조광조의 후손이
사화를 피해 들어와 정착하게 되면서 마을을 이루었고
주실 조씨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주실마을은 60 여가구에 200 명이 거주하는데 조지훈 생가
대문 옆에는 호은종택(壺隱宗宅)의 비석이 있습니다
호은은 1629년 주실에 처음 들어와 이 마을을 개척한 주실조씨
시조의 호이며, 종가는 객지에서 공무원으로 정년
퇴직한 조동길씨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댁의 현재까지 지켜오는 가훈은
첫째는 재불차(財不借 ; 재물을 빌리지 않음)
둘째는 인불차(人不借 ;양자를 들이지 않음 않음)
셋째가 문불차(文不借; 문장을 빌리지 않음)로
종손의 말씀은 "주씨들이 공직에 많이 있는데 성질이 꼿꼿한 편이라
머리를 숙이지 않으니 손해도 많이 보지만 뇌물먹고
교도소에 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손해를 보았으면 보았지 비굴하게 살려고는 하지 않았다고 하는바
뒤집어 보면 빌리지 않아도 될 만큰 세가지 요소를 갖추었다는 말이
성립하는데 종택 앞의 문전옥답 1만평은 호은공 때부터
누구하나 손댄 사람 없이 현재까지 전해왔다고 합니다
조지훈생가는 경북 북부지방의 일반적인 반가 형식인 ㅁ자형
본채에 ㅡ자형 대문채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지훈문학관은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 조지훈 선생을
후세에 길이 기리기 위해 건립한 문학관입니다.
이 건물은 2007년 5월에 개관하였는데, 부대시설로는
지훈시공원과 주차장, 탐방로 등이 있습니다.
미망인 김난희 여사가 직접 현판을 쓴 문학관을 들어서면
단층으로 지어진 목조 기와집이 있습니다.
조지훈의 소년시절 자료들과 청록집, 지훈의 가족 이야기,
미망인 김난희 여사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작품,
사용하시던 생활유품 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조지훈의 초기 작품은 민족의 서정을 노래한 것이 많은데
우리 고유의 서정을 노래하면서 민족정신을 심었습니다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 앞에서, 여운 등 그가 남긴
시집들은 모두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승무, 낙화,
고사와 같은 시들은 지금도 널리 읊어지고 있습니다.
조지훈(1920-1968 본명은 동탁)은 시인이요 국문학자로
본관은 한양, 호는 지훈, 한의학자로서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생가에는 조지훈이 탄생한 태실이 있고 생가 인근에는
조지훈이 어렸을 때 수학했던 월록서당이 있습니다.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혜화전문을 졸업하였으며
1939년 고풍의상, 승무, 1940년 봉황수로 “문장”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습니다.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1946년
시집 청록집을 간행하여 청록파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조지훈은 자유 문학상 수상, 해방 후 경기여고 교사, 조선어학회
편찬원, 서울시 문화위원회 위원, 문교부 국어심의회 의원,
한국시인헙회장, 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습니다.
대문과 중문에는 한말부터 태극기를 조각·채색하여 끼워두고 있으며
집 주위는 고풍스럽게 담을 쌓아 둘러 두고 있습니다.
집안서 전해오는 구전에 의하면 이 집터를 잡을 때 호은공이
셋째 봉우리인 매방산에 올라가 매를 날려 매가 날아가다가
앉은 자리에 집터를 잡았다고 합니다
매방산의 높이는 100여 미터의 나지막한 산으로 주실 뒤에 맺힌
세 개의 봉우리 중에 맨 오른쪽에 위치하는 세 번째 봉우리로
이 매가 앉은 지점은 수기가 질컥질컥한 늪지였다고 하는데
이 늪지를 매워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안산인 문필봉을 마주보고 다정하게 자리하고 잡은 이 마을은
배 모양을 하고 있는 형국으로 우물을 파거나 지하수를 파면
동네 인물이 안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도
이 마을에는 우물이 하나 뿐이라고 합니다
집 주의의 모든 산들은 꽃잎처럼 겹쳐 보이고 이 봉우리들은
밝은 기운으로 유정하게 둘러 싸고 있습니다.
중문으로 보이는 안산은 빼어나게 아름다운 문필봉(文筆峰)으로
많은 학사나 문사가 나오는 명산 이라고 합니다
마을에는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과 입향조 호은공의 증손자인
옥천 조덕린 선생의 옥천종택, 1773년(영조49)에 후진 양성을
위해 건립한 서당인 월록서당 등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지훈문학관과 시공원, 시인의 숲, 매년 5월 개최되는 지훈예술제 등
볼거리와 각종 행사가 다양하다고 합니다.
지훈상 시상식 장의 모습을 담아 보았습니다
빗속에서 디카로 담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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