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남지역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정월은
시작을 알리는
첫해 첫달이라는데
신유년을 맞이하여 우리
신라문화동인회가 첫답사지로
선정한 곳이 경주 남산의 남쪽
자락에 있기 때문인가 내남지역을
택하여 장엄한 답사를 하였습니다
경주 내남지역은 신라천년의 역사에서
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많은 유적
유물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입니다. 최진립 장군의 생가 충의당과
충노비, 최진립 장군의 신도비와 용산서원,
신라육부촌장의 묘로 유일하다는 정씨시조
묘소 등의 이름난 명소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명계리고분군. 북명사지와
마석산 삼층석탑, 경주 부윤 노상공영경
송덕비 등을 둘러 보면서 가까이 있는
것 부터 답사를 하였습니다
신라문화동인회 김윤근 회장님의 인사와 내남지역을
첫번째로 선정하게 된 의미에 대해서 장장연설(?)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경주부윤 노상공영경송덕비가 덕천리와 심인당에 보관 중이던
송덕비를 2010년 10월에 3기를 현 내남면사무소
경내로 이전하여 보존관리하고 있습니다
충의당은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기거하시던 종택으로 도지정
문화재 민속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으며 종가의 종손이신
최채량 선생님이 직접 나오셔서 안내를 해 주셨습니다
최진립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을 격파하였으며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를 이끌고 큰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 때 69세의 노령으로 경기도 용인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시니 조정에서는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정려를
내렸으며 효종 2년에시호를 정무 라 하여 내려지고
청백리로 녹선되었다고 합니다
충노 기별 . 옥동불망비가 세워져 있는 충노비각입니다
병자호란 때 최진립 장군의 충노 기별이
장군의 옷을 받아 입고 울면서
내가 모시던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 하는데
내가 어찌 충노가 되지 못하리오 라고 하면서
장군을 따라 선봉으로 나아가 싸우다가 장군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동경지
충의편에 있는 내용 입니다
매년 음력 12월 27일 이면 불청위 정무공 대제일에
충노인 기별과 옥동 두분을 지금까지도
함께 제향하고 있습니다
북명사지는 명계 1리 홈실마을 주위에 농가주택과 전답이
있는 곳에 사지의 모습은 없어지고 우주가 모각된 탑신과
층급받침이 5단인 옥개석이 축대처럼 경계를 하고 있으며
1991년 경주문화재 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한 곳으로
북쪽 경작지가 북명사지라고 합니다
홈실마을 사람들이 고름진아라고 부르는 명계리 고분군은
북명사지 뒷산으로 6기 정도의 고분이 있다고 하며
도굴이 된 석실분으로 횡혈식 석실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내부에 들어가 보았더니 키 높이 보다는 좀 낮았지만
5-6명이 들어갈 공간이 되는 석실내부입니다
남남산의 백운마을에서 백운계로 들어가기 전 오른편 등산로를 따라
가면 외동 북토 이씨 문중산이라고 하는 마석산의 죽곡 상류의
절터 위에 누구가 어떻게 복원을 하였는지도 모를
삼층석탑이 나홀로 복원이 되어있습니다
삼층석탑은 단층기단으로 2단 받침의 장대석위에 우주만 표현된
새 부재의 기단석이 올려져 있으며 그 위에 기단 갑석을 올려
놓았고 상면에는 2단의 탑신 받침이 있고 탑신석들은
새 부재로 만들어 올려져 있는 모습이 조금 부자유
스러운 삼층석탑이 외롭게 홀로 서 있습니다
이 석불좌상은 명계리고분 아랫쪽에 새로 지은 사찰의 삼성각
옆에 좌대도 없이 추녀 끝에 앉아 있으며 머리 없는 불상
입니다만 항마촉지인의 바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건국초기에 알천 양산촌, 동산 고허촌, 무산 대수촌,
취산 진지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 이라는 6개의
큰 마을이 있어 각 마을 마다 하늘에서 내려온 촌장이
있어 6부촌의 촌장들이 여섯촌을 합쳐서 나라를
세우고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추대하고 신라를
건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백호가 하늘에서 화산으로 내려와 진지촌의 촌장이
되었는데 성을 정씨라 하였다고 합니다
정씨 시조 묘에서 남향으로 건너다 보이는 묘역이 항일독립
운동을 하셨다는 고헌 박상진 의사의 묘역이라고 합니다
박상진 의사는 대한광복회 총사령으로 활동하시다가 순국
하셨는데 의병장으로 맹활약을 하셨다고합니다
명계리의 어느 민가를 회장님과 함께 찾아가 보았습니다
집은 폐가가 되어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만
집의 축대와 받침돌들이 모두 문화재로 추정되는
석재들로 놓여져 있었습니다
회장님을 비롯하여 생각을 같이 하는 많은 분들이
관계당국에서 합리적인 방법으로
이처럼 각처에 흩어져 있는 석재들을 더 이상 분실되기 전에
한 곳으로 모아서 관리를 하는 방안이 강구
되어야 겠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이 가옥의 앞뒤를 돌아가 보았습니다만 석재들이 한 둘이
아닐었습니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디딤돌과 마루로
올라가는 받침돌로도 활용되고 있는 석재들입니다
마석산으로 들어가다가 새로 지은 금천사가 있습니다
마석산은 남산의 고위봉 남동쪽에 있는 산으로
백운대 마애불과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금천(金泉)사라는 이름은 이 우물이 금천이라는 이름에서
연유된 것으로 비록 물은 조금씩 나오고 있지만
만병을 치유한다는 샘이라고 합니다
용산서원은 정무공 최진립장군을 향사하기 위한 곳으로
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되었으며
숙종25년 기묘에 경주부윤인 이형상이 지방 선비들과 함께
의논하여 경진년에 묘우 3칸과 신도문 3칸, 전사청 3칸,
재사 3칸 등을 세웠다고 하는데
고종 7년에 철거되었다가 1924년에
다시 세워 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원은 앞에 공부하는 공간의 중심이 되는 민고당을 두고
뒷편에 제향 공간인 숭렬사를 두고 있습니다
정면에 식강문 3칸을 두고 담장을 둘렀으며 오른쪽에 관리건물이
있고 민고당은 정면 5칸에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하고 양옆에는 온돌방이 있고
앞면에는 용산서원이라 편액하고 안쪽에는 민고당이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그 뒤 높은 단 위에 사당을 모셨고,
오른편으로 전사청과 재사가 있습니다
정무공은 본관이 경주이고 자는 사건, 호는 잠와로 현곡면
구미리에서 무진년(1568)에 출생하였다고 하며 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0세에 아버지마저 여의었다고 합니다
전서 3자 3행으로 된 「정무공최선생신도비(貞武公崔先生神道碑)」
25세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을 당하여는 권율을 도와 울산
서생포전투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 2등공신에 오르고
경원도호부사 ․공조참판을 거쳤으며 병자호란때 용인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순절하여 12월에 언양현
오지연에 장사하였습니다.
귀부는 사실적으로 조각하여 태종 무열왕릉 귀부를 본뜬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용머리 모양 이전의
모습인 거북모양을 가진 전형적인 모습으로
귀부의 등에 마련된 비좌는 폭 123cm, 두께 62cm이고
그 위에 세운 비신은 대략 높이 218cm,
폭 114cm, 두께 39.5cm입니다
거북 머리에 원을 그리고 등에는 6각형의 귀갑을 표현하고
둘레에는 구름문양을 정교하게 장식하였으며
비좌의 옆면에 마름모 꽃문양 안상을 조각하였고
거북등에는 고사리장식의 연꽃을 앞면 11송이,
옆면 5송이 각 모서리 1송이씩 36송이를
잔잔하게 조각하였습니다.
발가락은 앞발은 5개, 뒷발은 4개로 왼쪽 뒷발은 뒤로
오른쪽 뒷발은 앞으로 달리하여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귀부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으나 통일신라시대 태종 무열왕릉 귀부와 비교하여
통일신라시대의 귀부를 모사한 조선시대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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