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룡의 생가 계서당을 찾아서
이몽룡 생가가
있다는 계서당은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171호로 지정 보호
되고 있는곳이지만 춘향이와 이몽룡하면
남원을 생각하는 선입견때문에 우리에게는
생소한 곳으로, 믿어지지 않아서 직접 한 번
찾아가 보기로 하고 새벽같이 길을 나섰답니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문신 계서 성이성(1595-1661)
선생이 살던 곳으로 남원 부사를 지낸 부용당
성안의의 아들로서 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 부사 등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3차례나 어사를 등용 되었다고 하며
부재학을 추서 받고 청백리로
녹선되었다고 합니다
이몽룡은 이씨로 알고 있었는데 이씨가 아니라
성안의의 아들로 성씨라고 합니다
연세대학교 설성경교수님의 논문
"이몽룡(성이성)의 러브스토리" 라는 연구논문으로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인 이몽룡이 이씨가 아닌 성씨라고 알려지면서
수 많은 세인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곳이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의 이몽룡의 생가라고 하는 계서당 입니다.
이몽룡의 생가는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번지에
있는데, 최근 설교수의 연구논문으로 이몽룡이
봉화사람이라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6월 12일 남원에서 개최된 1문화재 1지킴이 전국대회에
갔다가 찍은 성춘향의 영정입니다만 이 때만 해도
성몽룡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인 이몽룡으로 알려진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은 남원부사를 지낸 부용당
성안의(成安義)의 자제(子弟)이며
인조 5년(1627) 문과에 급제한 후 진주부사 등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며, 세차례나 어사로 등용되었으며
사생활과 마음이 검소하여 훗날에 부제학을 추서받았다고 하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은 실존 인물이고 합니다.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에서 암행어사 이몽룡이 읊었던 ,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 가효는 만성고라 는 시는
성이성이 직접 쓴 시로 4대 후손 성섭이 지은
교와문고 3권에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금준미주시(金樽美酒詩)
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천인혈) 금잔의 맛 좋은 술은 천 백성의 피요,
玉盤佳肴萬性膏(옥반가효만성고) 옥쟁반의 기름진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니.
燭淚落時民淚落(촉루락시민루락)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들이 눈물 쏟고,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도 높더라.
위의 한시는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지은 것으로 소개되고 있으나
이도령은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므로 한시의 작자로 표기
하는 데는 문제가 있었으며, 광해군 때 명나라
사신이 지었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춘향전에서 이도령의 실제 인물이 조선 중기의 문신
성이성(成以性)이라고 연세대학교 설성경 교수가
그의 연구논문에서 밝혀냄으로, 위의 한시는 성이성이
지었다고 하는데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성이성(成以性)의 사당 옆에 있는 보호수로 지정된 이 소나무는
기우러져서 받침대가 세워져 있다습니다만 성이성과
함께 한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로
이 소나무의 기를 받으면 시험에 합격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소나무를 가슴으로
안고 소원을 빌고 간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1613년에 건립된 건물로서 부속 문화재로 안채와
사랑채, 사당이 있고 1984년에 중요민속자료
제171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이 분은 성이성(成以性)의 사당을 관리하고 있는 후손
성기호입니다 농촌의 일손이 한창 바쁘실 때인데도
자세한 안내를 해 주신 고마운 분이십니다
경사진 산기슭에 건물을 남향으로 배치하여
건물이 높이 솟아 보이도록 건축하였고,
정면 7칸, 측면 6칸의 ‘ㅁ’자형 건물이며, 사랑채와
중문간(中門間)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계서당 우측으로 10m 떨어진 곳에 사당이 있으며
와편담이 단아하게 둘러쳐 있습니다
마당에서 건물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10m 떨어진 곳에
사당을 배치하였는데 주위에 와편담을 쌓았습니다.
성이성(成以性)은 창녕인(昌寧人)으로 남원 부사를 지낸 부용당
성안의의 아들로 인조 5년(1627)에 문과에 급제한 후
진주부사 등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3차례나 어사에
등용돤 바 있는데 근검과 청빈으로 관직을 바르게
집행함으로 그의 이름을 높이 떨쳤다고 합니다.
후일에 부제학을 추서받고 청백리로도
녹선되었다고 합니다
계서당(溪西堂) 건물은 광해군(광해군) 5년(1613)에
성이성(成以性)이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지난 6월 12일 남원에서 개최된 1문화재 1지킴이 전국대회에
갔다가 찍은 성춘향의 영정입니다만 이 곳 봉화에도
이도령이 아닌 성도령의 영정그림이라도
한폭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의 부친 부용당 성안의 선생은 1561년(명종16년) 경남 창녕 출신으로
고려 말의 충신인 두문동 72현 중 성만용의 7대손입니다.
1591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32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관이 되었습니다.
계서 성이성 선생은 1595년(선조28년) 임진왜란 중
영주시 동면 문단리에 있는 선성 김씨 집성촌인
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모친이 터가 좋다는 친정에 몰래 들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며
부친이 남원부사를 지내던 시기인 1607년부터 3년여 동안
남원에서 부친과 함께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인조5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홍문관 교리, 응교를 역임하였습니다.
선생이 35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으며 39세에는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고 합니다.
43세에 경상도 진휼어사, 호서 암행어사로 나섰으며 45세에는 병조정랑,
교리, 사간 등으로 배명받았으며, 46세와 53세에 호남 암행어사 등
네 차례에 걸쳐 어사를 지냈으며 46세에 합천현감, 54세에 담양부사
59세에 창원부사, 60세에 봉화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61세에 진주목사, 66세에 강계부사 등, 다섯 고을에 대한 선정을 베풀자
고을민들은 송덕비로 답례하였다고 하며 1660년 평안감사 임의백이
'관서지방의 살아있는 부처'라고 하였지만, 슬하에 6남3녀를 두고
1664년 현종5년 70세로 계서당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가평리 계서당은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먄 가평리에 소재하며
조선 중기의 문신 살던 성이성의 고택입니다.
춘향전에 대하여
설성경 교수의 논문 "이몽룡(성이성)의 러브스토리" 라는 연구논문으로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인 이 도령의 모델이 성이성 이라고 알려지면서 세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곳이 이몽룡의 생가 계서당입니다.
계서당은 춘향전의 주인공인 이몽룡(성이성)의 생가로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위치하는데, 지금까지 역사적 가치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었으나 최근 설교수의 연구논문으로 이몽룡이 봉화사람 이라고 합니다
춘양전(조선 후기,작자 미상)은 춘향의 절개와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을 풍자한 판소리계 소설로 대략적인 춘향전의 줄거리는 ....
조선조 숙종 대왕 초 전라도 남원부에 월매라는 퇴기가 있었는데. 그녀는 아기 갖기를 소원하여 성참판과 동거하여 춘향이라는 아리따운 딸을 낳았다고 합니다.
자색이 천하의 일색인 춘향은 성장하면서 시서에 능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화창한 봄날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은 방자를 데리고 광한루에 올라 춘흥에 겨워 시를 읊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춘향은 향단이를 데리고 광한루 앞 시냇가 버들숲에서 그네를 뛰며 놀고 있었는데 우연히 춘향을 발견한 이도령은 한눈에 반하여 방자를 시켜 춘향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상봉하여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음. 헤어지면서 이도령은 밤에 집으로 찾아가겠노라고 언약하였습니다.
글방으로 돌아온 이도령은 춘향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며, 책읽기도 건성이었습니다. 드디어 밤이 되자 이도령은 방자를 앞세워 춘향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춘향과 백년가약을 맺고자 월매에게 자신의 결심을 밝혔습니다.
월매는 난봉꾼의 수작 정도로 여기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두사람의 혼약을 수락하였습니다. 이도령은 밤마다 춘향을 찾아 사랑을 속삭였습니다. 그런데 이부사가 내직으로 전출하게 되어 이도령은 부득불 상경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도령은 춘향에게 후일을 약속하고 서울로 떠나며, 춘향은 이도령으로부터 기쁜 소식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이때 새로 부임한 신관 사또 변학도는 호색한답게 정사는 돌보지 않고 기생점고부터 시작합니다.
50여명의 기생을 점고한 그는 마지막으로 춘향을 발견하고 수청을 강요하였습니다.
춘향은 수청을 거절하였습니다.
변학도는 크게 노하여 태형을 가하지만 춘향은 죽기를 결심하고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옥에 갇힌 춘향은 임을 그리워 하다가 잠이 들어 꿈 속에서 이비(二妃)를 만났습니다.
지나가는 장님에게 물어보니 서방님이 돌아오고 부귀영화를 누릴 꿈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변학도는 자신의 생신연에 마지막으로 춘향의 의중을 들어보기로 하고 만약 그때도 거절하면 처형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서울로 올라간 이도령은 열심히 공부하면서 춘향과의 재회만을 생각하였습니다.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된 그는 전라도로 내려오게 됩니다.
하루라도 빨리 춘향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에 남원으로 향하였습니다.
도중에 농부로부터 춘향이 변학도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걸인복색을 하고 춘향의 집으로 가서 월매를 만났습니다.
월매는 딸을 구해줄 이어사가 걸인 복색으로 나타나자 실망하여 딸이 죽게 되었다면서 신세타령을 늘어놓았습니다.
이어사는 옥중으로 춘향을 찾아갔으나 춘향은 이어사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변학도의 생신연이 벌어지는 날이 되었습니다.
각읍의 관장들이 모여 들었고. 생신연은 성대했습니다.
이어사는 연회에 걸인의 행색을 하고 참석하여 차운(次韻)을 제의하여 높을 고(高)에 기름 고(膏) 두 자를 운으로
"金樽美酒 千人血 玉盤佳肴 萬姓膏 燭淚落時 民淚落 歌聲高處 怨聲高" 란
시를 지어 탐관오리의 학정을 비판하였습니다.
이어서 어사또가 출도하여 탐관오리 변학도를 봉고파직하고 춘향을 구하게 됩니다.
춘향은 수절로 정렬부인으로 봉해져 삼남이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았으며,
이어사는 후에 좌우영상까지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금준미주시 金樽美酒詩] (암행어사 출주시)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金樽美酒 千人血)
금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사람의 피를 뽑아 만들었고
옥반가효 만성고라 (玉盤佳肴 萬姓膏)
옥쟁반에 담긴 맛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을 짜서 만들었으며
촉루락시에 민루락이요 (燭淚落時 民淚落)
촛대에 흐르는 촛물은 백성들의 눈물이요
가성고처에 원성고라 (歌聲高處 怨聲高)
노랫소리 높은곳에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가 높더라
이몽룡이 변사또를 질책하면서 읊은 시로
많은 사람들의 술자리에서 회자되는 유명한 시입니다.
비록 소설속의 인물이기는하나 무능하고 부패한 탐관오리의 대표적 인물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변학도는 남원 부사로 부임하여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 채, 생일 잔칫날 암행어사가 되어 내려온
춘향의 애인 이몽룡의 출두로 파면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읊어진 시가 [금준미주시 金樽美酒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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