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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문화재답사

관우의 머리가 매장되어 있다는 관림을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0. 9. 29.

관우의 머리가 매장되어 있다는

 관림을 찾아서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의장인 관우(關羽)의 머리가 매장되어

있다고 전해지며 낙양시 남쪽7km 지점의

관림 진에  있는 관림은  명나라 때에 처음

사당을 세우고 청나라 때는 크게 증축을 하여

지금의 규모가 되었다고 합니다 무덤과 비석

 매우 크고 사당과 부속건물은 위풍당당

합니다  관우의 주군에 대한 일편 단심과

충성심은 민중의 지속적인 지지를 받아

오늘날에는 장사의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한수정후묘(漢壽亭侯墓)라는 다섯글자가 있는 이 곳은

관우의 머리가 바로 이곳의 무덤 안에 있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한수정(漢壽亭)이라는 비석입니다

 

 

 

 

 

관림(關林) 이라는 현판입니다

 

 

 

 

 묘 안에는 용두백을 비롯하여 측백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묘는 명대의 건축으로 무루, 산문, 의문, 배전,

이전, 삼전 등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대전 앞에는 돌난간으로 된

통로가 있습니다

 

 

 

 

양측 통로의 모든 난간 위에는 108기의

돌사자 조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의장인 관우의 머리를 메달았던

 나무라고 합니다 

 

 

 

 

참배객들이 향을 피우는 곳입니다

 

 

 

 

삼국시기 촉(蜀)나라 장수 관우의 수급이

묻힌 곳으로 전해지는 곳입니다. 

 

 

  

삼국시대 촉(蜀)의 장군이었던 관우는 오(吳)나라 손권(孫權)과 싸워

후베이성(湖北省)의 쉬안창(宣昌) 근처의 탕량(唐陽)에서 패했는데

 

 

손권(孫權)은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환심을 사기 위해

관우의 목을 잘라 보냈다고 합니다.

 

 

 이에 조조는 관우를 의사(義士)라 하여 제후의 예를 갖추어

이곳에다 극진히 장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 뒤에 이곳에 후삼전(後三殿)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관림당에는 장대한 관우상 외에 역대 묘지의 비석 등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실이 있고,

 

건물의 벽면에는 삼국지의 명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관우가 사용하였다고 하는 3m 정도

되는 칼도 있습니다.

 

 

 

  

서기 182년, 중국은 후한(後漢) 말로 혼돈기에 접어들고 있을 때

그 해, 복사꽃 흐트러진 동산에서 유비(劉備),관우(關羽),

장비(張飛) 세사람이 형제의 의를 맺엊는데

 

이것이 유명한 '도원(桃園)의 결의'라고 하며

 이들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37년이 흐른 서기 219년, 유비는 우여곡절끝에

 한중왕에 오르고 관우는 전장군(前將軍)에 올라

형주(荊州)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때 위왕 조조는 도읍인 허도(許都)를 다른곳으로

 옮길것을 고려할 정도로 관우를 두려워 하던중

 

 

 사마의의 의견에 따라 오나라 손권(孫權)을

 부추겨 함께 관우를 공격하고자 합니다. 

 

 

  

손권은  도리어 아들을 관우의 딸과 혼인시켜 유대를

강화하고 조조를 경계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관우는 "범의 딸을 어찌 개의 아들에게 시집 보낼 수

있느냐고 하며 모욕을 주며 거절하였습니다.

 

화가난 손권은 여몽을 총도독으로 삼아

형주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우가  위(魏)의 공격을 받고 그들과 싸우기 위해 형주성을

비운사이 오(吳)나라의 여몽은 지략으로

형주성을 빼앗게 됩니다.

 

관우가 뒤늦게 형주를 되찾으려 하나  형주성에  가족들이

 볼모로  있는 관우군의 사기는 이미 떨어졌고 

 

 도망병이 속출했으며  미방과 부사인은  배반하여 

구원하러 오지않았습니다.  

 

 

  

관우는  단 200여기로 적진을 뚫고 나가다가  호북성

(湖北省) 선창(宣昌)근처의 당양(當陽)에서  

 

 

 

 오나라 장수 반장의  부장인 마충(馬忠)의 군사들에게 

양아들인 관평(關平)과 함께 사로잡히게 됩니다. 

 

 

 

 

   

손권은 관우의 무예와 용맹을 아깝게 생각하여

 항복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관우는  "나는 유황숙님과 도원에서 결의를

 맺은 이후, 그 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몸이다.

잔소리말고 죽여라!"  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래도 손권은 관우를 살려두어 장수로 삼고 싶어 했으나,

측근들의 간언에 따라 관평과 함께 참수하였다.

 

 관우의 나이 58세로  서기219년인 동한(東漢)

건안24년 10월이었습니다.

 

 

  

관우를 참수한 손권은 유비가 조조와 동맹을 맺고

복수하러 올 것이 염려되자

 

관우의 목을 당시 낙양에 있던  위왕 조조(曺操)에게

 스스로 신하의 예를 갖추어 바치고, 몸은 당양에

정중히 묻어주었습니다.

 

유비에게는 조조의 뜻에 의해 참수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조조는 손권의 속셈을 이미 간파하고, 평소에 호감을 갖고

 있었던 관우를 도리어 형왕(荊王)으로 봉하고

 

침향목(沈香木)으로 몸체를 깎아 목에 붙인 뒤  제후(帝候)의

 예로 낙양의 남쪽에 안장했다고 합니다.  

 

 

 

 그곳이 바로 이 관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에는 이곳을 제외하고  관묘가

세개가 더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관우의 시신이 안장된 호북성 당양이고, 나머지 둘은

관우의 고향인  산서성 해현(解縣)과 당시 촉나라의

도읍이었는 사천성 성도(成都)에 있다고 합니다.. 

 

 

 

 

산서성과 사천성은 관우의 의복 등을

묻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두고 "머리는 낙양을 베게삼고 몸은 당양에 누워있으며

혼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관제묘(關帝廟)라고 불리는 관림!

 

관림은 관우(關羽)의 수급이 묻혀있는 묘에 불과한데, 

왜 묘(墓)라 하지않고 '림(林)'자를 붙인 것일까? 

 

 그것은  의를 지킨 역사적인 인물 관우에 대한 

예우 때문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도 우리처럼 무덤마다 붙이는

 칭호가 다르다고 합니다.

 

일반 백성의 묘는 '분(墳)'이라 하고, 귀족의 묘는

'총(塚)'이라 하며, 황제의 묘는 '능(陵)'이라 하고

성인의 묘는 '림(林)'이라고 합니다.

 

 

  

 수천년 역사의 중국에도  '림(林)'은 오직

 "이림(二林)"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무성(武聖)으로 불리는 관우의 묘' 관림'과

문성(文聖)인 공자의 묘'공림(孔林)'

뿐이라고 합니다.

 

 

 

  

중국인들의 관우 숭배사상은 대단하여 현대 교육을 받은

 중국인도 관운장을 말 할 때는 우리처럼 관우나

관운장이라 하지 않고 관공(關公) 이라고

 높여 부르고 있습니다.

 

 

   명나라 영락황제 등 위정자들이 필요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한 점도 있지만,

 

 

옛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를 시대의 영웅과

도덕의 모범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관우는 민간의 숭배대상이 되었고 남북조 시기부터

청대말기까지 역대 제왕들의 추존을 끊임없이 받아 

 

 후(侯)에서 왕(王), 왕에서  제(帝), 제에서 성(聖),

성에서 신(神)까지 올라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교(道敎)에서는 천존(天尊), 유교(儒敎)에서는

 성인(聖人), 불교(佛敎)에서는 부처(佛)로 불리워 왔는데,

 

 현대의 중국인들은 관우를 재신(財神)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낙양의 관림은  처음에는 무덤만 하나 있었으나

1592년 명나라때  이곳에 사당을 짓고 측백나무를

 심으면서 마침내 성역화 했습니다.

 

 

 그 후 청대 건륭 황제 시기에 건물을 증축하여 150 여

 칸이나 되는 현재의 규모로 조성하였습니다.

 

 

 

  

이 대문은 명대(明代)때의 대문으로 지금은

 의문(儀問)이라고 합니다.

 

 이 의문을  지나면  배전(拜殿), 또는 평안전(平安殿)

이라고 불리는 대전(大殿)이 보입니다. 

 

 

 

 의문을 넘어 대전으로 들어가는 통로 양편에는 사자얼굴을

조각해 놓은 돌기둥과 난간이 있습니다.

 

이 기둥에는 모두 리본 같은 붉은 천들이  걸려있는데

 자녀들의 무운을 비는 의미라고 합니다.

 

 

 

  

대전 못 미쳐 좌우에는  벽돌로 만든

정방형의 건물이 있습니다. 

 

청대에 지은 '분향로' 라고 하는데 대전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이곳에서 향을 피운 것이라고 합니다.

 

 대전은  유리기와로 만든 궁전식 건물입니다.

 

 

 

이 대전 입구 좌측에  80근이나 나가는 청룡

언월도를 세워놓았습니다. 

 

 

관운장이 쓰던 무기의 모형물이라고 합니다.

 

 

 

 

대전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6m높이의

관우 좌상이 있습니다.  

 

몸에 용포(龍袍)를 입고 머리에 면류관을 쓴 신성하고

근엄한 제왕(帝王)의 모습입니다.

 

 

 좌측은  요화(寥化)와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는

주창(周倉)이 서있고

 

우측은 왕보(王甫)와  패인(牌印)을 들고  

양자(養子)관평이 시립하고 있습니다. .

 

 

 

  

 주창과 왕보는 관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맥성(麥城)에서

함께 자결했던 부장들이라고 합니다

 

 

 

  

대전을 지나면 청나라 광서황제가 쓴  광소일월(光昭日月)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이전(二殿)이 있는데 이 전각에는

 좌우 벽에 화려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면들이라고 합니다.

 

 

  

삼전(三殿)은 춘추전으로 관우가 수면을 취하고 있는 모습의 상을

 모셔놓은 곳으로 그래서 예전에는 "침전(寢殿)'

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또 이곳에는  관우가  의자에 앉아서  춘추(春秋)를 

 보고 있는 모습의 좌상이 있습니다.

 

 

  

관림은 중국에서 공자의 묘 공림(孔林)과 함께

 이림(二林)으로 칭해지는 곳으로,

 

무예와 재물의 신으로 숭상 받는 관우의 묘를 찾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삼국지를 한 두 번 읽지 않은 이가 있으리오 만 낙양 성은

당나라 수도였던  시안과 함께 경제, 문화의 고도로

 번영을 누렸던 곳이지만,  

 

당나라의 멸망으로 쇠퇴한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이곳 까지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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